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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결국 견뎌내야 하는 것이라서

◆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22. 11. 22.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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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로 시작해서 역시나로 마무리되는 과정

오늘 글은 일종의 문제 제기이고 다음 글에선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면서 마무리할 것이다. 최대한 쉽게 풀어보고자 하기에 독자도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오시길...

 

청소년기의 우리는 성장환경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모두 언젠가 내게도 행운과 福(복)이 깃들 거란 막연한 기대를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나이가 더 들어 사회에 진출할 무렵이면 그런 기대는 서서히 懷疑(회의)적으로 변한다. 확률이란 것을 알게 되면 더욱 그렇다.

 

서른 그리고 마흔 고개를 넘기다 보면 엄청난 奇遇(기우)를 만나지 않는 이상 삶은 그저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큰 행운과 큰 복이란 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인정하게 된다.

 

젊은 세대들과 마흔 중반까지의 세대는 그 바람에 정치에 큰 희망을 걸기도 한다. 좋은 정치가 내가 사는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한다. 그래서 “지르는 자”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냥 당하고만 있지 말자, 분노하라, 바꿔보자 등등의 말이 그런 얘기들이다. 그런 까닭에 진보와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의 얘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관심을 끌게 된다.

 

오십이 넘어가면 어느새 시니컬하게 바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때론 이 세상은 어쨌거나 ‘해먹는 자, 도덕과 양심을 떠나 능력 있는 자의 세상’이란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지금 하는 얘기는 비단 우리 대한민국 사회만의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러는 사이에 유전적 요인이나 고생하는 과정에서 생각지 않은 어려운 병을 얻기도 한다. 혈압 당뇨 기타 등등, 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관리해가면서 살아간다. 질병만이 아니라 여타 고난을 맞이해서 좌절하고 또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때론 나만 왜 그럴까? 하는 억울함을 가지기도 하지만 물론 그건 착각이다,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경우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다.

 

육십이 넘어 노후로 접어들기 시작하면 더 이상 얘기를 하지 말아야 하겠다. 돈 많고 건강하고 떵떵거리며 보란 듯 살아가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그 나이 정도가 되면 겉으론 그렇게 보여도 실은 모두 한 가지 이상의 애로와 어려움을 안고 있다.

 

삶이란 결국 한계상황이니

 

이제 삶이란 것 전체를 좀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모두 어느덧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삶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출생과 삶의 최종적인 과정인 죽음 사이에 있으니 그건 括弧(괄호)가 쳐져있다고 할 수 있다. 출생과 죽음 사이 즉 괄호 안의 영역을 우리들은 삶이라 부른다.

 

열 살만 되어도 알게 된다, 태어난 사람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20-30대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역시 죽음은 나의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 나이에는 다른 고민할 것들이 더 많이 있다. 우선 살아야 하겠고 살아남기에도 바쁘다.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작년 2021년 우리나라 사망자 총계는 317,680 명이었다. 하루 밤 사이에 870명이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통계를 알아도 모르고 여간해선 찾아보지 않는다. 신경 쓰고 싶지가 않다. 물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게 되면 다르긴 하지만 어차피 내가 아닌 이상 그렇다. 그리고 그게 더 나은 것일 수도 있다. 갈 사람은 가고 살 사람은 산다는 말처럼.

 

사람에 따라 그 시기가 다르겠지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삶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어떤 한계가 지워져 있다는 것, 즉 한계 상황 속에서의 삶이란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찾아온다.

 

주어진 삶의 시간 동안 역시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는 세상도 아니요, 세상에 사람이 많다 보니 나보다 잘난 사람 또한 너무나도 많다.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부비고 마찰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엄청난 압력을 견뎌내는 과정이란 것을 알게 된다.

 

여러 좋은 말들도 있지만 결국 그렇다.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즐기세요, Enjoy Your Life!, 물론 좋은 말이고 긍정적인 말이다. 생활을 즐기고 일을 즐기고 취미와 문화를 즐기고 로맨스와 섹스를 즐기고 권력과 명예를 즐기세요, 다 좋다. 하지만 그 즐길 것들을 얻으려면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압력을 견디거나 극복하면서 얻어내거나 싸워서 차지해야 한다.

 

모두가 즐기려다 보니 이 세상은 온통 싸움판이다. 어딜 가나 그렇다. 어디 이기는 게 그리 쉬운가? 나아가서 지는 것 또한 그리 쉽지가 않다.

 

결국 한계상황으로 되돌아온다.

 

과거는 아쉬움으로 가득하고 미래는 불안 속에서 대기하고 있다. 더러 어떤 이는 현재를 충실하게 붙잡고 현재를 즐기라고 충고하지만 그 또한 마치 손 안에서 바람 빠져나가듯 스르륵 사라져버린다.

 

물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즉 사는 게 죽는 것보다는 더 좋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 좋다는 삶을 이어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렇기에 산다는 것은 살아내어야 하는 과정이고 따라서 삶을 견뎌내야만 한다.

나 호호당은 삶과 운명에 대한 연구를 통해 삶의 과정은 60년을 하나의 주기로 하는 순환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알아내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이의 삶도 절대 만만하지 않은 일들로 채워진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심지어 주어진 삶의 시간에 있어 행복이란 것이 있긴 한 걸까? 하는 생각도 수시로 한다.

 

앓는 이 빼고 나면 개운하다. 그게 행복일까? 굶주리다가 따뜻한 라면 두어 개 끓여 먹고 나면 만족스럽다, 그게 행복일까? 그런 一回(일회)적인 것을 떠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그 행복함이 과연 얼마나 이어질 수 있는지 당신은 아는가? 로또에 당첨이 되면 순간 강렬한 희열을 느끼겠지만 로또의 당첨 확률을 따질 것 같으면 그게 도대체 가능한 일이겠는가?

 

행복이란 것은 결국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는 삶이란 기본적으로 견뎌내어야 하는 것이란 생각에 더 수긍이 간다.

 

이런 말도 있다, 결과보다는 과정 자체를 즐겨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좀 멋이 있긴 하다. 그런데 과정이란 것을 들여다보면 그 또한 성취할 때까지 묵묵히 충실하게 견뎌내는 시간들이란 사실이다. 결국 견뎌야 하고 견뎌내는 것을 즐기라는 얘기인데 그게 쉽지 않다.

 

과정을 즐겨라, 무슨 말인지 얼추 이해가 가긴 하지만 결국 견디는 시간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자, 다 되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끝납니다, 그러니 이 시간을 즐기세요, 하는 식인데 사실 이 말은 나 호호당이 치과에 가서 이빨 치료 받고 있을 때 주로 듣는 말이다. 다만 내 주치의는 나더러 이 시간을 즐기란 말까진 하지 않을 뿐이다. 독자들은 이빨 치료하면서 그래, 이 시간을 긍정적으로 즐겨보자, 이런 생각 하시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과정을 즐기라는 말 또한 일종의 최면요법, 자기최면 또는 자기암시에 불과하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승패를 떠나 경기 자체를 즐겨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百戰(백전)의 경력을 가졌으며 그 백전 중에 적어도 50승 이상 이겨본 자, 즉 그간에 승리의 기쁨 그리고 패배의 아쉬움을 흠뻑 느껴본 자라면 경기 자체를 즐길 수도 있겠다. 그건 흔히 말하는 ‘구력’이 좀 되는 자에게나 가능한 말이다.

 

지든 이기든 월급이 나오고 보너스가 나온다면 모를까, 이기면 보너스가 나오고 지면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게임이라면 즐길 수 있을까? 나아가서 오늘 눈앞의 경기에 지면 그것으로 탈락이고 다시 또 경기에 나갈 가능성마저 희박한 상황이라면 경기를 과연 즐길 수 있을까? 경기 중에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각오로 임할 뿐 나머진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게 정상일 것이다.

 

어차피 우리 모두 인생 한 번 살다간다. 내세를 믿지 않고 윤회전생을 믿지 않고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간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는 한 인생은 단 한 번의 경기와도 같다. 그러니 그 한 번의 경기를 5백원 주화 하나만 넣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오락실 게임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는 얘기. 떽! 이다.

 

이처럼 좋은 말 참으로 많긴 하지만 앞의 예처럼 결국 그렇고 그렇다. 그러니 결국 삶이란 견뎌내어야 하는 것으로 말로 되돌아온다. 삶은 한계 상황인 것이다.

 

삶의 暴壓(폭압)

 

이 견뎌내어야 하는 삶에 대해 어떤 사람은 暴壓(폭압), 사나운 압력이란 말을 했다.

 

오늘은 이 정도로 그치고자 한다. 다음 글에서부터 그렇다면 사납고 거친 삶의 압력으로부터 과연 우리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제시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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