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이 되길 바라면서
앞의 글에 대해 독자가 공감했다면 이번 글로서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와 함께 얘기를 시작해보겠다. 글 한 편으로 마무리하려 했으나 써놓고 보니 너무 압축이 심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풀어서 두 개의 글로 나누었다. 미리 양해 바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동안 성취를 하고 나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최대한 합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이성(理性)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感性(감성)의 동물이란 점에서 뜻하지 않은 고난과 불행, 앞의 글에서 얘기한 삶의 暴壓(폭압) 앞에선 꼭 그것만으로 맞서고 대처할 수 있지는 않다.
세 가지 방법이 있으니
기본적으로 세 가지 방법이 있으니 이 세 가지 방법이란 결국 우리가 가진 그야말로 강인한 정신, 즉 의지(意志)라고 표현할 수 있는 어떤 힘을 사용하는 것이란 얘기로부터 시작한다.
세 가지 방법을 열거하면 첫째는 무시(無視)이고 그 다음으론 포기(抛棄), 마지막으로 超越(초월)이 그것이다.
고래(古來)로부터 제시된 모든 철학과 종교, 삶의 지혜 등등 그 어떤 것을 들추어보고 따져 봐도 앞의 세 가지 범주에 들어간다. 이 세 가지를 믹스하거나 강조점이 다를 뿐 기본적으로 결국 이 세 가지로 요약이 된다.
無視(무시)의 철학
먼저 무시(無視)하는 것부터 얘기해본다.
무시(無視), 즉 없다고 치는 것인데 이게 상당히 강력한 마음씀씀이다.
가령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몹시 미워하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럴 경우 만남을 피하면서 그런 사람 세상에 없다고 여기는 방법 또한 무시에 속한다. 이런 방법은 다소 소극적 방법에 속한다.
알베르 까뮈의 부조리 철학이 있다. 삶에 대해 아무리 의미를 부여하고자 애써본 들 결국 삶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 아예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해버리자, 우리의 운명이 부여하는 폭압을 없는 걸로 무시함으로써 자유, ‘잘 살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자는 주장이다. 이는 무시와 포기의 믹스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본 들 가령 당신이 부자가 되거나 성취를 할 확률이 없다, 무망(無望)하다는 계산이 나올 수 있겠다, 그러면 부(富)나 성공의 가치 자체를 무시해버리는 방법과 같다. 난 출세나 부자 되는 것 따윈 하지 않을 거야, 그저 눈앞의 먹고 사는 일 정도만 되면 충분해, 하고 마음먹는다면 이를 자족(自足)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바탕엔 무시(無視)의 마음이 깔려있다. 선망(羨望)하는 마음 자체를 없어버리는 방법이다.
안 된다 싶으면 없는 셈 쳐라!
최근 유행하는 “소확행”이란 것 역시 그 바탕에는 무시(無視)의 마인드가 깔려있다. 산다는 게 뭐 별 거 있겠어, 당장 가능한 소소하지만 즐거운 것을 즐기면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소확행만으론 멘탈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 여전히 마음의 바탕엔 어쩌면 행운을 붙잡을 수 있다는 기대가 놓여 있다면 그렇다. ‘소확행’밖에 없다는 정도는 되어야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은 통속에 살면서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직접 찾아와 당신의 소원을 말해보시오, 했을 때 내 앞의 햇빛을 가리지 말라고 했던 디오게네스를 떠올리게 된다. 욕망을 최대한 줄여서 자족했던 이른바 견유학파의 이 철학자 역시 세속의 가치를 무시하고 욕망을 포기했던 경우에 해당된다.
흔히 동아시아 고전이나 기록에도 무시의 자세가 자주 나타난다.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법도 한 竹林七賢(죽림칠현)이 바로 그들이다. 혼탁한 세상,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니 서늘한 대숲에 모여서 맑은 담론 즉 淸談(청담)이나 논하고 권세가들을 비웃으며 일생을 보냈다는 그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권력과 부를 무시했던 것일까? 를 놓고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볼 것 같으면 그런 것 같진 않다. 그들은 세속의 가치를 무시했다기보다는 마지못해 포기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無視(무시)는 抛棄(포기)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이다. 추구하고 또 추구하다가 끝내 되질 않자 포기하는 것과 계산을 두루 뽑아보니 이게 될 일이 아니다 싶고 그럴 바엔 아애 없는 셈 치는 것이 무시란 점에서 그렇다.
抛棄(포기), 나름의 예술이어서
그러면 이제 슬슬 抛棄(포기) 쪽으로 넘어가보자.
포기한다는 것이 나름 꽤나 흥미롭다. 포기에는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 어쩔 수가 없어서 내려놓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부터 알아두고 시작하자.
조선시대 양반, 문인들의 경우 관직에 나가는 것 出仕(출사)만이 뜻을 이루는 길이었다. 그런데 벼슬길을 가다가 당파 싸움에서 밀렸을 경우, 오늘날로 치면 정권이 바뀔 경우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사표를 냈으면 흔히 落鄕(낙향)한다고 했으나 어지간해선 진짜 살던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한양 외곽에 눌러 살았다. 그게 바로 野黨(야당)인 셈인데 여차하면 다시 정권이 바뀌어서 다시 벼슬길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기에도 여러 층차가 있어서
이 경우 임금님이 계시는 궁궐을 멀리서나마 내려다볼 수 있는 서울 남산의 북쪽 기슭에 사는 이와 남산의 남쪽 기슭, 즉 궁궐을 등지고 한강을 바라보는 쪽, 오늘날로 치면 한남동 쪽에 사는 이는 자세가 달랐다.
궁궐을 바라보는 쪽 사람들은 미련이 많이 남아서 권토중래의 길을 찾는 이들이었고 궁궐이 보이지 않는 한남동 사람들은 복귀를 거의 포기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한남동 쪽 사람들도 아예 낙향하지 않고 한양 언저리에 눌러 붙었다는 점에서 적극적 포기를 택한 것은 아니었다. 이게 바로 不敢請固所願(불감청고소원), 즉 감히 청할 순 없지만 본래부터 바라는 바라고 하는 말, 여전히 혹시나 다시 벼슬길에? 하는 미련을 안고 살았다.
좀 더 벼슬을 포기했거나 벼슬 하면서 한 재산 불린 사람들 또한 완전히 낙향하는 일은 드물었다. 가령 경상도 상주 근처의 고향집으로 가지 않고 경기도 이천이나 여주 등지로 내려가 집을 마련하고 땅을 마련해서 장기전에 돌입했다.
그 경우 오늘날 경기도와 강원도를 나누는 섬강을 건넜느냐의 여부에 따라 또 달랐다. 강을 건너 강원도로 들어선 경우를 좀 더 벼슬을 포기한 것으로 인정해줬고 건너지 않았으면 여주 이천에서 일단 농사를 지으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하게 해서 재기를 도모했던 쪽이었다.
정말이지 이게 아니다 싶으면 어떤 벼슬이라도 지푸라기처럼 여겼던 이가 정말 있었을까 싶다. 그건 바로 적극적인 포기이자 나아가서 더 강력한 無視(무시)의 마인드이니 말이다. (퇴계 이황이 있지 않느냐? 하겠지만 그 역시 자세히 알고 보면 별 차이가 없다.)
제갈량이 그토록 인기가 있었던 이유
동아시아 유교사회에서 삼국지연의 속의 제갈량이 그토록 숭앙을 받는 것은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어떤 곳에도 줄을 대지 않았건만 유비가 알아서 제 발로 그것도 무려 세 번씩이나 찾아와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는 점에 있다.
출세나 부귀공명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때가 되니 절로 초빙을 받았으니 동아시아 문인 계층들이 얼마나 부러워하고 선망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건 삼국지연의, 즉 소설 속의 것이고 현실에서 진짜 제갈량이 그랬는지 유비가 삼고초려를 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포기야말로 정말 어느 선에서 포기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다는 말, 논어에 나오는 얘기이지만 그게 정말 그런 심정이었는지 아니면 짐짓 그래봤던 것인지 그건 사실 모르는 일이라 하겠다.
포기 면에서 최고의 포스(force)는 역시 싯다르타
이런 면에서 가장 적극적인 포기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불교의 개조인 싯다르타 고타마가 아닌가 한다. 이 분은 포기와 초월을 믹스하고 약간의 무시를 가미한 경우이다. 기본적으로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났기에 세속적 영화와 가치를 나름 맛을 본 양반이고 그렇기에 포기가 아니라 무시할 수 있었는데 이 분의 위대함은 포기에 대해서도 대단히 적극적인 면이 있다는 점과 독특한 방식의 초월에 있다.
싯다르타는 삶의 모든 것이 苦(고)라고 했는데 이 대목에서 苦(고)란 고통이라기보다는 앞글에서 얘기한바 삶은 어차피 한계상황에 놓여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싯다르타는 생명이란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渴愛(갈애)와 執着(집착)의 두 가지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라 했으니 이건 생명 또는 삶의 의미 자체를 거의 무시하는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渴愛(갈애), 마치 끊임없는 갈증과도 같은 욕망과 근본적인 어리석음 즉 無明(무명)에서 오는 執着(집착)에서 벗어나야만 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삶의 모든 욕망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근본적인 어리석음이란 결국 존재(Being) 자체에 대한 집착이라 하겠는데 그런 거 내려놓으란 얘기를 남긴 싯다르타였다. 네가 생각하는 너란 존재 또한 알고 보면 일시적으로 결합된 물질과 의식작용으로 이루어진 假建物(가건물)이니 영원성이 없다는 얘기, 그러니 붙들려 하지 말라는 것, 즉 포기를 의미한다.
생명으로서의 욕망과 존재에 대한 집착을 다 내려놓으면 마치 무겁고 구차한 짐으로부터 벗어나고 풀어놓을 수 있으니 곧 解脫(해탈)이다. 그리고 바른 지혜를 통해 제대로 수행하다 보면 어떤 독특한 경지, 초월이라 말할 수 있는 涅槃(열반)에 이를 수 있고 다시는 苦海(고해) 그 자체인 이 세상에 태어나 고생하는 일 없게 된다는 것이 싯다르타의 주장이다. 따라서 삶 자체에 대한 無視(무시) 또한 가미되어 있다.
(하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리고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아무래도 대중적 호소력이 떨어졌는지 몰라도 다소 변하게 된다.)
싯다르타와 거의 동시대인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 역시 해탈을 성취한 영혼은 현생이 끝났을 때 세계의 가장 꼭대기로 올라가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린다고 했으니 포기와 초월을 베이스로 하고 있다.
하이데거, 까뮈, 니체 등등
사실 현대철학의 거장이라고 평가되는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 역시 서양철학의 계보를 바탕으로 존재학이라 아니라 현상학이란 분야를 개척했으나 그 역시 존재(Being) 자체를 따져 물으면서 우리가 가진 한계상황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고 있지만 그 역시 방법은 초월과 포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알베르 까뮈가 적극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자유롭고자 했던 것, 즉 초월하고자 했던 것과 본질적으론 같은 맥락인 것이다.
덧붙이면 “권력에의 의지”를 역설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경우 어차피 되지도 않을 일에 연연하지 말고 당당하게 삶의 고통과 맞서라, 우리를 위로하던 신은 이제 죽었으니 치사하게 빌붙지 말고 우리 자신의 힘 즉 인간의 강인한 의지 즉 권력에 대한 추구로서 삶과 운명의 폭압에 맞서자, 라고 했다. 이 역시 독특한 자신만의 포기와 초월을 주장한 셈이다.
니체의 저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읽어보면 인간적이 되려면 보통 인간은 어렵고 超人(초인)이 되어야만 한다. 참 어렵고 요원한 얘기란 생각이 드니 재미가 있다. 재산이 대략 천억 원 정도 되는 사람이 저는 그냥 평범한 중산층에 불과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제 마지막 방법인 超越(초월)에 대해 다음 글에서 얘기를 하면서 마무리를 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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