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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뎌내는 세 가지 방법 (후편)

◆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22. 11. 2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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超越(초월)이란 방법

초월, 영어 단어론 trenscend, 이런 딱딱한 단어 말고 쉽게 말하면 go beyond 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한계를 넘어선다는 말인데 사실은 말 자체가 모순이다. 넘어설 수 있다면 그게 한계라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 호호당은 오히려 그게 인간 정신의 위대함이라 본다.

 

진정한 믿음은 초월이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초월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지적,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어렵게 얻은 첫 아들 이삭을 燔祭(번제)의 제물로서 바치라고 요구했다.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요구였지만 아브라함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피눈물을 머금고 그 말에 따랐다.

 

아브라함이 정말 그랬던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다만 고대엔 첫 수확물을 신에게 바치는 제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첫째 아이를 바치면 자녀를 더 많이 낳고 키울 수 있다는 관념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실제 행해졌던 것은 사실이다.

 

나의 모든 것을 절대자에게 맡기는 것, 이게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넌 죽어라 해도 기쁜 마음으로 죽을 것이고 무단히 동쪽으로 가라 하면 넵! 하고 동쪽으로 가겠다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란 구절이 있다. (11장23절)

 

아무리 예수가 진정으로 말한다 해도 사실 말이 되질 않는다, 지극히 非(비)합리적이고 非(비)이성적이다, 하지만 저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진짜 믿음은 그 자체로서 초월적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대표적으로 기독교가 되겠지만 아무튼 종교적 믿음이란 이성의 견지에서 볼 때 무모한 투기 또는 도박이다. 폭락장에서 바닥일 거라 확신하고 자신의 모든 돈과 신용을 당겨다가 풀(full)로 레버리지를 거는 행위보다 더 무모하다. 이처럼 무모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상황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얘기, 삶의 暴壓(폭압)이 엄청나다는 얘기이다.

 

반대로 말해서 그럭저럭 지낼만한 자가 그런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이란 절벽에서 그냥 뛰어내리는 일이다. 

 

실존주의의 선구자로서 평가받는 쇠렌 키르케고르는 이런 무모한 믿음의 자세를 “신앙의 도약”, 낭떠러지에서의 무모한 점프와 같다고 표현했다. 저 표현은 불교 수행자들 사이에서 말해지는 百尺竿頭(백척간두), 30미터나 되는 막대기 위에 서서 進一步(진일보), 즉 허공으로 한 발 내딛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죽기 아니면 살기의 자세이자 必死(필사)의 몸부림이다.

 

싯다르타의 열반 또한 초월이다. 

 

싯다르타 고마타는 涅槃(열반)을 얘기함으로써 삶의 끝없는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했으니 그 역시 초월이다.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정작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로 설명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 또한 하나의 초월인 까닭이다. 그야말로 不可思議(불가사의), 헤아릴 수 없는 것.

 

물론 우리 모두 초월해야만 삶의 폭압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삶이 견딜 만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초월적 기대를 가지기도 한다. 교회나 성당에 나가서 목사님이나 신부님의 설교를 듣는 신자들은 진짜 믿음을 가진 게 아니라 언젠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어쩌면 막연한 기대를 안고 나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초월적 행위들

 

그런가 하면 명절이나 기일에 먼저 가신 조상들이나 부모님께 제를 올리는 것 역시 그 前提(전제)가 조상의 영령이 존재할 것이란 기대인 것이니 그 또한 초월적 행위에 가깝다.

 

등산할 때 산신령에게 무사히 산행을 마치게 해달라고 예를 갖추는 것 또한 초월적 행위이다. 모든 사물에 정령이 깃들었을 거란 생각 역시 마찬가지.

 

산사에 가서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이나 산신각에 가서 정성스럽게 절을 올리는 것 역시 초월적인 행위이다. 그걸 우상숭배라고 폄하하는 자들은 좀 모자란 사람들이다. 굳이 과학을 들먹일 것 전혀 없다.

 

초월은 기본적으로 이성과 합리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초월은 모든 종교와 종교적 감정, 고래로부터의 모든 철학의 바탕에 놓여있다.

 

(세상에 교회도 많고 성당도 많고 절도 많지만 진정한 信者(신자)는 드물 수밖에 없고 또 희박해야만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무시와 포기 그리고 초월은 모두 행하기 어렵기에  집단이 등장했다. 

 

믿음을 통한 초월만이 아니라 앞에서 얘기한 無視(무시)라든가 抛棄(포기) 모두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삶에 가해지는 暴壓(폭압)이 그만큼 강하다는 말도 성립된다.

 

무시하기도 포기하기도 초월하기도 모두 어렵다. 그런데 누군가 함께 거들거나 또는 함께 나설 것 같으면 그게 좀 쉬워진다, 정확히 말하면 쉬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인간의 감성은 무리를 지었을 때 훨씬 강해지고 용기가 솟기 때문이니 바로 군중심리이고 廣場(광장)의 심리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던 붉은 악마의 추억을 떠올려보라.)

 

혼자서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묵상하거나 수행하려면 신앙이나 수행이 상당한 경지에 올랐을 때 가능하다. 하지만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노래하면 신앙이 샘솟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집단의 심리, 군중 심리, 광장의 심리를 통해 원동력을 얻는 것이 바로 사회운동이다. 유럽의 경우 종교개혁 이후 서서히 신이 죽어가기 시작했고 덩달아 왕의 권력도 약해졌으며 이로서 기존의 지배구조가 흔들렸다. 반면 신흥 상인계층과 그를 이어 피지배계층의 권력에 대한 욕구가 끊임없이 커져갔다. 그 역시 삶의 폭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움직이었고 그를 통해 근대 시민사회란 새로운 질서가 등장했다.

 

공산주의, 절대자를 죽이고 집단을 원동력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

 

그런 면에서 대표 주자는 역시 공산주의를 주장한 카를 마르크스였다.

 

자본주의는 내부 모순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붕괴될 것이며 치열한 계급투쟁, 즉 집단의 투쟁을 통해 마침내 나중엔 아예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로 구성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것이란 얘기, 다시 말하면 ‘파라다이스’를 되찾게 될 것이란 주장을 했다. 그건 사실 예측이 아니라 煽動(선동)적 예언이었고 선동이란 결국 그 대상이 군중이고 집단이다.

 

계급이 없는 사회,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산자의 세상,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자유로운 생산자, 참으로 환타스틱하다. 그게 된다고 했으니 얼마나 매혹적인 예언인가! 그 바람에 20세기는 집단을 동원했던 두 개의 이념,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온 세계를 뒤흔들었고 숱한 희생을 자아냈다.

 

오늘날 파시즘이나 공산주의는 거의 사라졌지만 집단적 움직임인 데모라든가 시위는 일상화되었다.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체제는 그를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역사철학

 

마르크스의 주장은 사실 헤겔의 주장, 역사란 “절대정신”이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자유를 구현해가는 과정이라 했던 그 주장을 포이어바흐로부터 박아들인 유물론에 기초해서 약간 바꾸어 달았을 뿐이다. 그리고 煽動(선동)했다.

 

헤겔이나 마르크스 모두 이제 곧 삶의 暴壓(폭압)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둘 다 모두 변덕스런 역사가 빚어내는 暴壓(폭압)은 종말을 맞이하고 영원히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 예언했던 것이니 이는 미륵보살이 곧 이 세상에 나와 세상을 구원한다는 신앙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선언, 즉 사회 해방 선언은 결국 불교의 한 지류인 彌勒下生經(미륵하생경)과 같다. 그렇기에 중국 피지배층을 중심으로 일어난 백련교도의 亂(난)이라든가 태평천국의 亂(난), 마오쩌뚱의 공산 혁명 모두 같은 맥락일 수밖에 없다.

 

무리를 이룰 때 고독하지가 않아서

 

사회적 해방을 위한 변혁 운동의 호소 속에는 대단히 은밀하고 달콤한 유혹이 하나 숨겨져 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남들이 이룩해주거나 또는 나 혼자서만 위험부담을 지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진다는 점에서 덜 위험해보이고 덜 고독할 것이란 기대가 그것이다.

 

고독, 그거 무섭다. 우리가 죽음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그 역시 죽음의 길은 혼자 가야하는 길이고 잊히는 소외의 길인 까닭이다.

 

기독교의 포교야말로 마케팅의 대표 원조

 

집단을 통해 힘을 얻자는 발상은 사실 초기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서 자리 잡는 과정에서 행해졌던 마케팅 방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모두가 평등하고 동일한 형제와 자매로서 대접을 받았던 것과 같다.

 

그 바람에 일요일 서울 대형 교회에 가보면 돈 많은 사람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모두 형제요 자매란 것을 몸소 실천해 보임으로써 신앙적 자기만족도 얻고 동시에 다른 신도들로부터 존경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타양피! 교회는 그래서 대단하다.

 

무리를 지어서 움직여라,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되면 강해지고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폭압에서 더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을 부여한다. 이는 신천지 교회와 같은 신흥종교나 이단 분파를 보면 새로 들어온 신자를 극진하게 대우해주는데 이는 기독교의 초기 마케팅과 액면 그대로 동일하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절대정신을 주장한 헤겔의 역사철학 또한 4-5세기 경 기독교 교의를 완성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에 대한 생각, 역사에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결국 거기엔 신의 의지가 담겨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하나님의 의지에서 절대 정신을 거쳐 집단 또는 무리의 결집과 투쟁을 통한 공산사회로 중심이 이동되었을 뿐이다.

 

(이것으로 볼 때 어떤 생각이나 사상도 결국은 기존에 존재하던 사상적 문화적 풍토 위에서 변화 발전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원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낙원을 만들어보자는 혁명은 모두 실패했고 또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초월하려는 인간 의지의 발로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시 돌아와서 얘기이다.

 

아무튼 오늘날 세상은 어쨌거나 좋아졌다. 90까지 살 수도 있고 어지간한 질병은 약이나 병원이 해결해주는 세상, 누구나 교육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을 가능케 한 것은 사상도 아니요 종교나 철학도 아니다. 과거 지배질서가 붕괴하면서 시민사회가 생겨났고 그 결과 자유경쟁과 사적 이익의 추구를 통해 기술발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정치를 보면 후보들이 公約(공약)이란 것을 한다. 물론 空約(공약)이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어차피 선거에 참여하는 일이야 공짜이고 게다가 공휴일까지 되니 기분 나쁠 까닭이 없다, 솔깃한 말을 던지는 후보에게 표를 준다. 물론 내 돈 들어갈 일도 아니다.

 

당선된 후보는 시늉만 하다가 또 레임덕에 빠지고 다시 게임이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민주정치가 무의미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권력이 계속 바뀐다는 점이다. 하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가 삶의 폭압으로부터 구원해주진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삶의 暴壓(폭압)을 견딤에 있어 정치 또한 전혀 역할을 하지 않는다 말하면 너무 심한 얘기가 되겠으나 그렇다고 그쪽에서 답을 찾을 일은 아니란 얘기이다. 나이가 마흔 중반 정도 되면 으레 알아차릴 일이고 알아차리게 된다.

 

현실에서 삶의 폭압을 견뎌내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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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현실의 삶에서 폭압을 견뎌내는 좀 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얘기해보자.

 

우리 모두 세속의 가치를 제대로 無視(무시)하기 어렵다, 혹시나 찾아올 수 있는 행운을 애당초 抛棄(포기)하기도 어렵다. 물론 超越(초월)은 더더욱 어렵다.

 

나 호호당만 해도 12층 아파트에 살고 있다. 화실 바로 곁에 창이 있어 밑바닥의 포장도로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하지만 삶의 폭압으로부터 자유롭고자 저 밑으로 떨어질 용기? 전혀 없다. 백척간두진일보, 어림도 없다.

 

그렇지만 무시나 포기 그리고 초월을 전적으로 순도 높게 행할 순 없지만 우리 모두 어느 정도 엇비슷하게 흉내를 내면서 그런대로 삶의 暴壓(폭압)을 견뎌낼 순 있다, 그렇다고 본다.

 

예를 들면 열심히 해보다가 안 되면 말고, 이런 식의 마음 자세는 얼마든지 가져볼 수 있다. 그 정도까지의 멘탈은 가능하다. 사업을 하다가 어려우면 그만 접어야 할 터인데 접는 순간의 선택, 즉 포기는 어디까지나 내가 정한다는 식의 마음을 가지는 것도 비슷한 예이다.

 

고통의 길을 선택하는 것 또한 중요한 자유이다.  

 

작년 상담을 할 때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해본다.

 

미대생이었다. 고민인 즉 어려서부터 방면에 소질이 좀 있다 보니 미대에 진학했고 또 대학원까지 다니고는 있지만 앞길이 막막하다는 것이었다. 운세를 척 보니 소위 ‘좋은 날’ 오려면 한창 걸릴 판국이었다.

 

자넨 무엇이 고민인가 한 번 편히 털어놓아보시게나, 했다. 그랬더니 그림 그리는 일 자체는 너무 좋은데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예상한 바였다.

 

얘기했다. 그림에 대해 전망이 있든 없든 세상에 자유로운 이는 없어, 하지만 뭘 해도 먹고 살 순 있는 세상이란 건 자네도 알겠지, 다만 고생을 좀 해야 하겠지, 그림을 통해 돈을 잘 벌고 유명해진다? 참 어려운 얘기이지.

 

그런데 자네 운의 흐름을 딱 보니 그림을 계속 하든 딴 길을 찾든 어차피 주어진 ‘고생의 시간적 분량’을 피할 순 없다네, 그럴 바엔 차라리 좋아하는 그림을 하면서 고생을 제대로 해보는 것도 나빠 보이진 않는데, 내 생각이지만 말이야. 물론 딴 길을 찾아도 그 또한 괜찮아.

 

문제는 어떤 것을 택하든 모두 나쁘지 않다는 점이야. 우리가 무서운 것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야. 뭘 해도 자네가 주어진 분량만큼의 고생을 소화해야 할 터인데 그렇다면 이제 와서 새롭게 선택할 필요 자체가 없잖아! 그냥 좋은 것 하면서 고생을 지속하는 게 좋지 않을까?

 

사람들은 흔히 ‘빼박’을 무서워하지만 실은 빼박이야말로 선택이 없잖아, 오히려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면에서 그게 바로 길게 보면 성공의 지름길이거든. 살다 보면 알게 되지. 성공하려면 사실 빼박의 외길을 가야만 해.

 

자네가 하는 고민, 이 세상 거의 모든 미대생들이 하는 공통된 고민이잖아. 집안에 돈이 많아서 나중에 갤러리 하나 우아하게 운영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렇잖아.

 

사실은 다 괜찮아.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네의 自由(자유)란 거지. 망해도 내가 선택해서 망할 것이고 적당히 살아도 그 또한 자신의 선택이니 나쁠 게 없어. 중요한 것은 칼날을 쥘 것이 아니라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는 얘기야.

 

다시 말해서 선택을 강요당하지 말라는 얘기일세, 자네가 선택할 것이지 선택을 강요당하지는 말라는 얘기, 무슨 말인지 감이 가시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고생할 것이 무서워서 선택을 강요당해, 그건 폭력이야, 그게 진짜 문제야.

 

괴로움으로부터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기꺼이 괴로운 길을 선택할 자유 또한 어쩌면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는 게 인생이야, 난 그렇게 생각하네.

 

그렇게 말했더니 그 학생은 그림의 길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진짜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요? 하는 걱정이 든다고 했다. 이에 답하길 자네가 선택한 길이니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적어도 강요당한 것은 아니잖아!

 

그 이후 그 미대생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나 호호당은 알지 못한다. 그저 한동안 어려운 길을 갈 것이란 점만 알고 있다.

 

상담이 끝나서 되돌아 나가는 그 친구의 모습을 보다가 문득 작고한 시인 오규원의 시 구절이 스쳐갔다. “詩(시)는 敗北(패배)이니 승리는 오해 말라”는 구절. 내가 시를 쓸 땐 이미 승리에 대한 미련, 인생의 부귀영화 따윈 다 저버리고 시작했으니 쓸데없이 나더러 패배한 글쟁이라고 보진 말라는 얘기이다. 너희들이 패배자라고 낙인을 찍기 전에 내 스스로 패배의 길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얼마나 당당한가, 적극적 포기의 길을 택한 시인이었다.

 

삶을 망쳐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또 선택을 하다 보면 그 결과 참으로 어렵게 될 때가 있다. 그럴 경우 내가 아니라 주변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지만 그런다고 한들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결국 결과는 스스로의 몫이다.

 

어렵지만 차라리 당당하게 때로는 비굴하고 구차하게 

 

이처럼 삶의 폭압 앞에서 때론 다 던져버리고 다 내려놓을지언정 당당하게 맞서야 할 때가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앞의 예를 들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다 성공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어렵더라도 차라리 당당하게.

 

하지만 방금까지의 말도 사실 쉬운 게 아니다. 보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가능하면 부귀영화도 누리고 싶고 무병장수하고 싶으며 자녀들도 모두 잘 길러내어 사회적으로 성공시키기도 싶다.

 

우리의 욕심과 욕망은 끝도 없고 한도 없다. 또 그런 기대를 안고 살기에 무수히 좌절을 겪고 삶의 暴壓(폭압)에 시달린다. 이에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지금껏 소개했지만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바라던 것을 어느 순간 되지 않는다고 무시하기 어렵고 포기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초월은 더 어렵다.

 

결국 우리 모두 矛盾(모순)된 존재이다. 그러니 그 모순을 안고 가자는 얘기이다. 중요한 것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듯이 때론 구차하고 비루할지언정 이 삶을 건너가면 되는 일이다.

 

잘 나갈 땐 득의양양하고 교만을 좀 떨어도 좋다, 그게 사는 맛이다. 어려워지면 백방으로 노력하되 정 안 된다 싶으면 큰 길에 나가 울고불고 소리를 쳐도 된다. 아니면 하나님도 찾고 부처님도 찾아보자. 조상님께 기도를 하는 것도 좋다. 다 좋다.

 

결론적으로 하고픈 말은 삶의 폭압을 견디는 과정, 한 평생 살다가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 때론 좀 비굴해지고 또 苟且(구차)하게 이어가는 것 또한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이다. 왜냐면 삶 자체가 구차하기 때문이다.

 

이제 글을 마친다. 평소 쓰던 분량의 두 배에 가깝지만 재미있는 대목들을 대폭 줄이고 깎아야 했기에 아쉬운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핵심은 다 얘기한 것 같다. 글 따라오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다. 감사의 인사 올린다. 나 호호당 또한 쓰느라 수고했다. 이제 글에서 벗어날 때다.

 

(이번 글의 주제는 사실 좀 더 풀어서 책 한 권으로 엮어도 되는 것인데, 책으로 만드는 것은 판매를 생각할 때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서 그냥 접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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