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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 충의당

명언 I 인생조언

by 21세기 나의조국 2016. 2. 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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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의 혼(魂)이 시작된 소박한 공간
충의당(忠義堂)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3길 소재


충의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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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우리 역사의 가장 대표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이야기할 때 항상 첫 손에 꼽히는 최부자집. 하지만 그 명문가에도 원류는 존재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모두 참전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이 생애를 보낸 충의당(忠義堂)이 바로 그곳이다.


내부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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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당 배치도

안팎으로 단속하는 정갈함



충의당은 크지도 위압적이지도 않다. 단정하고 반듯한 공간들은, 최진립 장군의 고매한 인품을 반영이라도 하듯 기단이 낮고 화려하지 않으며 건물의 위세를 뽐내지 않는다. 그곳에 살던 사람, 그리고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의 유명세에 견주어 보면 굉장히 겸손한 모습이다.

“ 대대로 청렴한 집안이었습니다. 한 번은 아이들이 최진립 장군께 드릴 물고기를 잡아온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사용한 그물코가 촘촘한 것을 확인하시고는 ‘작은 물고기까지 모두 잡아버리면 후세에 남길 것이 없어진다’라며 그물을 태워버리셨다고 합니다.”

교편을 잡고 후학을 양성하다, 이제는 고택과 그 안에 서린 선조의 혼을 지키고 있는 15대손 최채량(崔採亮) 씨는 충의당에 대해 “최부자가 백 년 동안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많은 이들을 도운 곳”이라고 말한다.

“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최부자 정신과 가훈들역시 모두 이곳에서 최진립 장군에 의해 시작된 것들이지요.” 그래서인지 충의당은 오랜 역사와 많은 사연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역시도 오직 청렴과 근검을 가장 높은 가치로 삼았던 집안의 내력에 기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경주 충의당 전경

경주 충의당 전경

경주 충의당 흠흠당

경주 충의당 흠흠당

충의당과 흠흠당(欽欽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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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충의당 경모각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에는 사당(祠堂)이 있고, 사랑마당으로 들어서면 다실로 사용되는 경모각(景慕閣)과 충의당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충의당 뒤로는 흠흠당, 우산초려(愚山草廬), 안채인 잠와(潛窩)고택이 안마당을 둘러싸고 자리 잡아 부분적으로 열린 口자형의 전형적인 남부 지방 양반 가옥의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충의당은 좌측에는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으로 꾸미고, 우측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흠흠당은 원래 충의당의 당호였으나 사랑채의 이름이 충의당으로 바뀌면서 중사랑채에 흠흠당이라는 당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지붕에 기와를 책으로 엎어놓은 듯 한 맞배지붕이며 방과 함께 마루가 있어서 여름에 시원한 바람을 쐴 수 있다. 사당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고즈넉한 느낌이 살아 있고 내부는 전통 한옥에 걸맞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독립된 화장실과 욕실이 있어서 숙박을 하기에 편리하다. 경주 충의당 경모각


우산초려와 잠와고택,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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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충의당 우산초려

우산초려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원래 초가지붕 이었으나 최근 기와지붕으로 바꾸었다. 흠흠당에 비해서 좀 더 소박한 느낌을 주며 편리한 숙박을 위해 독립된 욕실과 화장실을 가지고 있다.

잠와고택은 안채로 사용되는 一자형 건물로, 왼쪽으로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이 연결되어 있다. 충의당의 손님들은 이 안채의 큰방에서 안마당을 바라보며 아침식사를 하게 된다.

사당은 전면에 툇마루가 딸린 맞배지붕으로, 상부 구조물은 민가의 사당으로서는 매우 화려하고 섬세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 충의당 우산초려


충노비와 회나무

경주 충의당 충노비

충의당을 방문하면 꼭 보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충노비(忠奴碑)고 다른 하나는 회나무다.

충노비는 말 그대로 충성을 다했던 노비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병자호란 당시, 용인(龍仁)전투에서 죽음과 마주하게 된 최진립 장군이 평생에 걸쳐 자신을 따르던 환갑을 넘긴 두 노비에게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목숨을 지키라”라고 명했지만 이에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거늘 어찌 저희가 충노(忠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되물으며 함께 목숨을 바쳤다 한다. 그 뒤로 이곳 충의당에서는 최진립 장군에게 제를 올린 후 그대로 상을 물려 두노비를 위해 제를 지내고 있다. 신분 구분이 엄격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러 양반들로부터 많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집안의 전통이 되었다. 경주 충의당 충노비


경주 충의당 회화나무

회나무는 집에서 대문을 나서면 왼편으로 보이는데, 최진립 장군이 직접 심은 것이라 전해진다. 신기한 것은, 이 나무가 1905년 고사(枯死)했다가 1945년 갑자기 회생했다는 것이다. 한반도가 일본에 점령당한 후 다시 해방된 연도와 일치한다. 우연치고는 참으로 기이한 우연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며 여러 번 불에 탄 이후에도 여전히 푸른 잎을 틔웠다는 얘기를 듣게 되면 단순히 우연이라 치부하기는 어렵다. 경주 충의당 회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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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확인할 수 있는 ‘최부자 정신’



충의당에는 작은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최진립 장군때부터 내려오는 유물과 유품을 철저하게 관리해온 덕분에 일 년 내내 순환 전시를 해도 될 만큼 그 수가 많으며, 일부는 한국정신문화연구소 등에 위탁 관리를 하고 있을 정도라 한다.

물론 집안에 설치된 것이기에 유물전시관의 면적이 그리 넓지는 않다. 하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전시품은 최진립 장군과 그 후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경주 충의당 유물

경주 충의당 유물


문화체험공간

경주 충의당 서예체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충의당에서는 서예, 다도 등 체험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한다. 특히 현재 충의당을 지키고 있는 최채량 씨의 글씨는 경주에서도 알아주는 명필로 소문이 나있으니 서예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문의해 보기를 바란다 경주 충의당 서예체험


여행정보

여행정보
  • 첨성대
  • 반월성
  • 국립경주박물관
  • 경주오릉
  • 포석정
  • 경애왕릉
  • 충의당
  • 용산서원
숙박정보
    • 흠흠당 충의당의 원래 사랑채. 4~6인용
    • 우산초려 원래는 초가집이었던 공간. 4~6인용
    • 충의당 남자 주인이 기거하며 손님을 맞이하던 곳. 4~6인용
    • 머릿방 집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다용도방. 2인용
    • 아침 식사는 유료(예약 필수). 저녁 식사는 제공하지 않음
    • 흠흠당과 우산초려 : 내부 화장실과 샤워실 구비
    • 충의당과 머릿방 : 외부 화장실과 샤워실 사용
    • 취사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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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
  • 승용차 이용시

    동대구분기점 → 경주IC → 나정교삼거리에서 부산, 언양 방면 우회전 → 이조리 방향 우측 방향 → 이조중앙길 → 내남로 → 이조3길

  • 고속버스 이용시

    경주시외버스 터미널 → 154/505/507/502/508번 탑승 → 이조 정류장 → 충의당

  • 기차 이용시

    신경주역 → 51/70번 탑승 → 경주초등학교 앞에서 502번 환승 → 이조 정류장 → 충의당


주변 관광지

  • 01
    용산서원
    용산서원
    정무공 최진립(崔震立)을 향사하기 위해 1699년(숙종 25) 경주부윤 이형상(李衡詳)이 지방 유림과 함께 건립하였으며, 이듬해 묘(廟)가 이루어져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1701년(숙종 27) 강당 및 남북재를 세워 강당을 민고당(敏古堂), 양 협실(夾室)을 흥인재(興仁齋)·명의재(明義齋)라 하고, 남재를 호덕재(好德齋), 북재를 유예재(遊藝齋), 문을 식강문(植綱門)이라 하였다. 1711년(숙종 37) 권대규(權大規) 등의 진정소(陳情疎)에 의해 숭렬사우라는 묘액을 내렸는데, 이때 경주의 유림들이 원호를 용산서원이라고 하였다. 묘액의 글씨는 이익(李瀷)의 형 이서가 썼다. 이후 1870년(고종 7) 금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24년에 중건, 복향되었다. 서원은 총면적 8,138㎡로 앞쪽에 강당인 민고당을 세우고 뒤쪽에 제향공간인 숭렬사를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배치되었으며, 입구에 신도비각을 세웠다. 소유자는 최채량이며, 경주최씨 가암파 문중에서 관리한다. 자세히보기
  • 02
    경애왕릉
    경애왕릉
    경애왕은 신라 최말기의 왕이다. 성은 박씨이고 휘는 위응이다. 재위 4년 포석정에 遊宴(유연)할 때 불의에 견훤의 습격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릉은 평범한 원형토분이다. 표면에는 아무 시설이 없고 릉 앞에 석상(石床)이 있으나 이는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주변에 송림이 울창하고 봉토가 일반묘보다는 크므로 왕릉으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경애왕의 최후와 당시의 국세가 재기할 수 없을 만큼 기울었다는 정세를 감안하더라도 왕릉으로서는 빈약한 편이다. 자세히보기
  • 03
    포석정
    포석정
    포석정은 왕이 술을 들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별궁의 하나였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마른 전복(포어:鮑魚)모양의 석구만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성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규모는 폭이 약 35㎝, 깊이 평균 26㎝, 전체 길이가 약 10m이다. 포석정은 중국 고대 강가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악귀를 쫓는 행사의 하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에서 유래하였다. 353년 중국의 왕희지가 쓴 난정서문(蘭亭敍文)에 보면 맑은 시냇물을 아홉 구비로 돌아 흐르게 하여 흐르는 물속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게 하되 술잔이 아홉 구비를 다 지날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술 3잔을 마시게 하였다. 이 때 술잔의 모양은 뿔모양이다. 자세히보기
  • 04
    경주오릉
    경주오릉
    사적 제 172호인 오릉은 신라 시조왕인 박혁거세왕과 왕비 알영부인,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초기 박씨왕 네 명과 왕비 한 명을 한 자리에 모셨다고 하여 오릉이라 한다. 오릉 동편에는 지금도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는 숭덕전이 있으며, 그 뒤에는 알영부인이 탄생한 알영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자세히보기


주변음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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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뫼

궁중음식 전문가인 주인이 운영하는 예약제 한정식 전문점. 수리뫼란 으뜸 가는 음식맛과 최고의 정성을 뜻한다. 이곳의 주인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 이수자로, 각종 국가 행사에도 종종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반드시 4인 이상으로 예약을 해야 하며, 하루 한 끼당 한 팀만 예약을 받고 있다. 메뉴는 예약 사항에 맞춰 구성하여 차려낸다. 궁중요리인 구절판과 연저육찜, 죽순채, 대하 잣 무침, 너비아니, 승기약탕, 도미면 등의 메뉴가 대표적이다.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59
  • 전화 : 054-748-2507

용산 회 식당

회덮밥 한 가지 메뉴만 내놓는 독특한 식당. 그만큼 회덮밥에 있어서는 자신감이 넘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외양은 여느 식당 같은 소박한 느낌을 주지만, 듬뿍 얹어주는 회 때문에 유명한 곳. 양푼에 담긴 밥 위에 얹어져 나오는 회는 종류를 따지지 않고 그날의 신선한 생선을 이것저것 섞어서 놓는 것이 특징이다. 보통은 포항 구룡포에서 가져 오는 청어, 물가자미, 숭어 등을 사용한다고 한다.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10-3
  • 전화 : 054-748-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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