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목 최기영·신응수 씨와 소목 설석철 옹은 중요무형문화재로 명실공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인이다. 두 대목은 궁궐이나 사찰 같은 문화재 보수·복원과 큰 규모의 한옥 건축을 겸하며 전통 건축의 계보를 잇고 있다.
설석철 옹은 한옥을 채우는 가구를 전통 기법 그대로 계승해 만들고 있다. 대목 최웅희·박석규·김길성·조전환·송혜종·정영수·홍덕길·문석환 씨는 북촌뿐 아니라 전국을 오가며 전통 한옥을 지금 시대에 맞춰 짓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서성환 화문장은 손 많이 가는 꽃담을, 박천동 창호장은 한옥에 설치될 창과 문을, 노행용 가구장은 한옥에 들어갈 살림살이를 만드는 장인이다. 다시 태어나도 목수가 되겠다고 말하는 그들의 인생과 연륜을 나무와 흙과 종이에 묻고 혼을 담아 지은 집이 바로 한옥인 게다. 그들과의 동행 취재가 마치 어깨너머로나마 한옥 한 채를 지은 듯 하다면 과장일까. 과연 누가, 어떻게, 우리의 드림 하우스, 한옥을 짓고 있을까.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전수교육관 공사 현장. 그곳의 배흘림기둥처럼 든든하고 근엄한 기운이 느껴지는 최기영 씨를 만났다.
“혼을 불어 넣어 천 년 가는 집을 짓는다” 대목 최기영(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
“한옥의 뭣을 알고 싶은가?” 다짜고짜 경계의 눈빛으로 묻는 최기영 씨에게서 장인다운 고집과 까탈이 엿보였다. 한옥의 미덕을 묻자, “기자 양반, 잘 적어. 한옥은 세계 최고의 집이야. 풍수지리에 맞게 들어앉은 집의 형세는 봄의 보슬비, 여름 장마, 가을 태풍,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줘, 지붕의 각도, 마루와 기둥의 높이, 창과 문의 폭, 모든 게 사람에게 편하도록 과학적?철학적으로 계산된 것이야, 끓여 마셔도 유익한 송진이 함유된 소나무, ‘생명의 흙’이라 불리는 황토로 지으니 거기에 사는 사람이 건강한 게 당연하지.” 마치 민요처럼 가락을 타고 술술 풀려 나오는 그의 이야기가 청산유수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한옥은 잘 짓고 잘 살면 1천 년을 간다고. 고려 말기의 건축물인 봉정사 극락전이 1천3백 년이나 된 것이 그 증거다.
그처럼 훌륭한 한옥을 제대로 책임 있게 지어내는 것은 대목의 소임. 대목은 집터에 맞게, 기후와 문화에 맞게 집을 해석하고 지을 줄 알아야 한다. 엄청난 태풍의 중국, 습한 기후와 지진의 일본, 산이 많고 좁은 한국이 각기 다른 집을 탄생시켰듯이. 때로는 대목의 재량을 넘어, 시대가 집을 결정하기도 한다. 1백 년 이전의 한옥이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데 반해 일제강점기의 한옥이 제멋대로 왜곡되고 부실하게 지어진 것처럼. 현대적 설비가 발달하고, 물자가 풍부한 지금은 오히려 어느 때보다 훌륭한 한옥을 만들 수 있는 시대라 본다. 그 같은 믿음으로 그는 질 좋은 목재를 찾아 캐나다에 막 다녀온 길이었다. 경계를 풀고 긴 이야기를 나눈 끝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멋들어지게 써서 선물로 주었다. 한옥에 대해 잘못 쓰면 잡지 회사를 통째로 동해에 갖다 넣겠다는 으름장도 잊지 않고 말이다.
최기영 씨는 현재 부여의 백제재현단지, 남양주의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전수교육관, 경주의 월정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이자 동국대학교 초빙 교수로, 얼마 전에는 한 증권회사의 TV 광고에 등장해 “이음새 하나가 천 년을 결정하는겨”라는 소신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경북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태조 왕건 사당· 이화학당 등의 보수, 오대산 상원사 신축 등을 지휘한 바 있다.
경복궁 복원 현장에서 신응수 씨를 만났다. 그는 일을 하면서 좋은 추녀 재목을 찾았을 때처럼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없다고 했다. 지금 그는 강릉과 서울을 오가며 광화문 복원에 사용될 나무들을 치목(마름질)하느라 분주하다. 17년째, 이곳 경복궁을 집 삼아 살고 있다고 한다. 신응수 씨가 입은 오렌지색 니트와 아이보리 니트 집업 점퍼는 모두 란스미어 제품.
“한옥은 수만 개 조각품이 이룬 한 채” 대목 신응수(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
지난 11월 말, 지름 94cm, 높이 20m, 수령 150년 된 소나무가 신응수 씨의 지도 아래 몇 가지 의식 뒤 베어졌다. 이후 강릉으로 옮겨져 치목 과정을 거친 뒤 경복궁 광화문 복원 시 기둥으로 사용될 가장 굵은 나무였다. 신응수 씨는 이렇듯 적게는 25년, 길게는 300년 정도의 수령을 지닌 나무를 재료로 삼는다. 그가 중점적으로 하는 일은 문화재 복원. 그러면서 때때로 한옥을 짓기도 한다.
그가 짓는 한옥들은 북촌의 한옥에 비해 규모가 크며, 철저히 전통적인 방식에 따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용인 호암장. 고 이병철 회장의 별장으로 호암미술관 옆 230여 평 대지에 들어선, 정원이 아름다운 전통 한옥이다. 어려서 목수 일을 시작할 때는 3년 가까이 밥만 먹고 돌아서면 밤낮 없이 대패질을 했다. 그때는 다 그렇게 일을 배웠다고. 그는 1975년 수원성 장안문을 복원하면서 도편수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해 뜰 무렵부터 해가 져서 먹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대목 일을 하며 쉼 없이 달려왔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오로지 전통 건축에만 몰두해온 것이다. “한옥은 시간으로 짓습니다. 하나하나가 조각이고 그것이 수천, 수만 개 모여 하나의 집을 완성하죠.” 목수란 결국 나무를 다루는 사람. 그래서 좋은 나무에 욕심을 갖지 않는 이가 없다. “처마 선이 잘 나왔을 때처럼 기쁠 때가 없어요.
인위적으로 만든 형태가 아니라 원래 그렇게 생긴 나무를 찾은 뒤 추녀 재목으로 삼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굴곡을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기술이 발달해 서까래까지 기계로 깎는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사람 손이 최고지요.” 그와 함께 세월을 보내온 국산 목재들이 얼마 전 뉴욕으로 실려 갔다. 108평 규모의 대지에 한국 전통 건축을 선보이기 위해. 대목 신응수 씨는 이제 한국의 목수들을 이끌고 세계의 중심에서 한국 전통 건축의 사절단 역할까지 하고 있다.
신응수 씨는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된 1991년부터 지금까지 경복궁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흐르는 한국 대목장의 계보를 이어가며 전통 건축 문화재 복원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1989년 신축한 청와대 대통령 관저와 1979년 지어진 서울 한국의 집 외에 고 이병철 회장의 자택이었던 이태원 승지원도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나무, 흙, 돌, 종이로 지은 숨 쉬는 집이다”
대목 최웅희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현장을 지키는 최웅희 씨. 그러나 그는 청년 목수 열 명이 안 부러운 베테랑이다. 나무의 질감과 속성을 체득해야 하고, 집의 구조와 공간의 쓰임을 깨달아야 하는 대목은 힘보다는 노련함, 지혜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왜 안 어렵겠어요? 처음 10년쯤 배운 다음에나 조금 자신감이 생겼죠. 지금도 나무를 재단하기 위해 먹으로 형태를 그릴 때는 신경이 곤두서는데요.” 한평생 동안 목수로 살아오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하지만 한옥만큼은 옛날 방식을 살려 만드는 것이 제격이라고 믿는다.
첨단 시스템과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화려한 아파트가 사방에 깔렸지만, 흙과 나무, 돌과 종이로 만든 한옥이 훨씬 더 건강하고 풍요로운 집이라고 생각한다. “한옥은 숨을 쉬는 집이에요. 한옥의 재료인 나무, 종이, 흙 때문이지요. 이들은 표면의 미세한 공기 구멍으로 호흡하면서 유해한 물질을 흡수하고 전자파도 차단해줄 뿐만 아니라 습도까지 조절하죠.
때문에 꽉 막힌 아파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집이에요.” 이처럼 한옥 예찬을 늘어놓는 그도 한옥에 살고 있지는 못하다. 도시보다 시골에 한옥을 짓고 싶은데, 서울이 삶의 터전인 까닭에 아직은 꿈으로 남아 있다. 둥글고 무딘 마디가 잡히고 까맣게 때가 낀 장인의 손을 보니, 좀 더 도시에 머물며 그 믿음직한 손으로 많은 한옥을 지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웅희 씨는 열대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수 일을 시작했고 1967년 상경하여 지금까지 한옥 짓는 일을 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서울 우이동의 보광사, 서오릉의 정자, 파주 하동 정씨 사당 등을 완성했고, 북촌 일대의 한옥을 여럿 작업했다.
북촌 한옥 공사가 한창인 현장에서 최웅희 씨를 만났다. 대패와 톱, 목수에게 이처럼 중요한 연장이 얼마나 많겠는가. 반평생을 일해도 좀처럼 바꿀 수 없는 연장이고 아무리 좋은 기계도 이들만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사람 손이 하는데 다른 게 맛이지” 대목 박석규
단 한 채도 같을 수 없다. 이것이 박석규 씨가 꼽는 한옥의 최고 매력이다. 사람의 손으로 빚은 집. 그는 최근 건축가 황두진 씨가 설계한 한옥을 지으며 그의 수 십 년 목수 인생에서 첫 시도를 해보았다고 한다. 바로 시스템 창호를 사용한 한옥 짓기. “요즘 한옥들은 시설적인 면에서는 아파트랑 별반 다르지 않아요.” 도면과 건축가 없이 척척 집을 짓던 시절과 비교하면 살기에는 많이 좋아졌지만 법적 규제가 강화되어 짓기에는 더 까다로워 진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 도중 박석규 씨는 습관처럼 직각자를 들고 있다. 대목에게 직각자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했다. “바로 이 안에 바닥이 있고 기둥이 있고 지붕이 있어요.” 그는 작업 도중에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간격을 찾으라”는 말을 몇 번 반복했다. 그야말로 목수의 본능으로 알아챌 수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아름다움이 차곡차곡 쌓이고 끼워 맞춰져 온전한 한옥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공사 진행 중에는 사실 작업 반장이나 마찬가지죠. 여기서 현장 진행도 하면서 소목들이 와서 창호 만들고 하나씩 구색 맞추는 동안 나는 대문도 짜다 달고 하죠.” 언젠가는 자신도 한적한 동네에다 한옥 한 채 짓고 살고 싶다는 그는 거친 손과 나무를 느끼고 다루는 섬세한 감각으로 4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이제는 복잡하고 좁은 서울에서 벗어나 넓은 공간에 여유 있게 한옥을 짓고 싶어요. 요즘 사람들이 한옥을 찾는 것이 참 좋다가도 이렇게 좁고 복잡한 서울 안에다 지으려고 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네요.”
박석규 씨는 가회동의 쌍희재와 취죽당을 비롯해 여러 채의 한옥을 지었다. 처음 목수 일을 시작할 때는 창호 짜는 소목에서 출발하여 지금은 북촌 일대에서 생활 한옥의 달인이 되었다. 요즘 그는 대형 한옥, 공공 공간으로서의 한옥을 짓는 꿈을 꾼다. 북촌의 엄격한 규제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심도 있다.
박석규 대목의 가회동 공사 현장엔 웃음소리와 나무 부딪치는 소리, 톱질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툇마루에 사용하기 위해 잘라놓은 부재와 그가 직접 손으로 짠 공구 상자가 놓여 있다.
“몸에 좋은 것만 고르고 살펴 짓는다” 대목 김길성
좋은 건 몸이 먼저 아는 법. 한옥도 그렇다. 채광과 통풍을 고려해 터와 방향을 잡고 나무와 돌, 흙으로 집을 지으니 몸에 해로울 게 전혀 없다. 40여 년을 한옥 건축에만 매진해온 이답게 김길성 씨의 한옥 예찬은 그칠 줄을 모른다. “우리 몸에 좋은 걸로만 고르고 살펴 지은 집이 한옥이에요.
집을 지을 때마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정말 대단하다는 걸 몸소 체험한다니까요. 게다가 네모반듯한 천편일률적인 아파트와는 달리 한옥은 나지막한 처마와 추녀 선 그리고 기와가 멋들어진 운치를 전하니 얼마나 근사해요?” 과묵한 천성조차 한옥에 대한 애정을 이길 수는 없나 보다.
그간 지었던 한옥 중 대표작 몇 개만 꼽아보라는 말엔 “일평생 한옥만 했는데, 대표작이랄 게 따로 있나?”하고 눙치더니만 한옥의 장점이 뭐냐는 질문에는 끝도 없이 대답이 늘어지는 걸 보면. “사람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잖아요. 한옥은 흙 냄새 맡아가며 흙 기운을 마냥 느낄 수 있는 집이니 몸에 이로울 수밖에요.”
너나 할 것 없이 힘들던 시절, 먹고사는 방편으로 선택한 목수 일이 햇수로 40년이다. 도면이 있을 리 없었다. ‘한 칸에 몇 척’, 이런 식으로 계산해 머릿속에 그린 집을 척척 현실화해냈다. “노하우는 별 거 없어요. 정해진 한도 내에서 제일 좋은 수종을 선택하는 거죠.
우리 육송도 수준이 천차만별이거든요. 그중에서도 우리 옛날 한옥에서 뜯어낸 고재古材가 제일 좋아요. 좋은 고재가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한달음에 달려가 놓치기 아까운 놈은 미리 사서 저장해두는 거죠.” 한마디로 좋은 것을 보고 고를 줄 아는 눈, 이것이 김길성 씨의 40년 목수 인생을 가능케 한 원동력인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옥은 변함이 없어요. 자연에서 온 그대로 지으니 아토피 같은 게 생길 리 없지요. 최근 한옥이 살기 좋다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그 때문 아닐까요?”
김길성 씨는 40여 년 경력의 목수다. 그 스스로 가회동에 살며 가회동 일대 한옥을 재건축하는 데 앞장서왔고 무무헌과 같이 보기에도 좋고 살기에도 편리한 한옥들을 두루 지었다. 현재 조선조한옥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김길성 씨는 대목이기보단 연구소장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지금은 겨울이라 그림이 될 만한 현장이 없다며 최근 완성한 북촌의 한 한옥으로 안내했다. 하늘색 스웨터는 빨 질레리, 조끼는 존 스메들리, 팬츠는 갤럭시 제품.
“최고의 연장은 노트북이다” 대목 조전환
조전환 씨의 관심사는 한옥의 현대화다. 이전 경복궁 복원 작업에 참여하면서 ‘유령’이 된 왕의 집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의 집을 만들고 싶어 한옥 살림집을 짓기 시작했다. 보다 많은 현대인들이 한옥을 누리기를 꿈꾸며,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건축 방식을 연구 중이다. 특히 작년에 모습을 드러낸 경주의 한옥 호텔 ‘라궁’은 그의 실험적인 방식이 빛을 발한 프로젝트. “라궁은 모듈화된 설계를 바탕으로 현대적인 방식으로 완성한 최초의 한옥일 겁니다.
나무를 짜 맞추어 만드는 한옥은 보통 각 부분의 목재를 그때그때 대목이 다듬어 완성하게 되지요. 그러나 라궁은 목재를 표준화하여 기계 작업으로 먼저 준비했고, 이를 한 번에 조립, 시공할 수 있었어요. 이는 건축 기간을 단축하는 것은 물론 공사 비용을 줄일 수 있어 한옥의 대중화에 도움이 됩니다.”
라궁에 이어 요즘은 골프장 내 한옥 클럽하우스를 짓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그가 매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애지중지하는 제1의 연장은 망치도, 대패도 아닌 노트북. 밤마다 노트북과 씨름 중이라는데, 그 안에는 한옥 각 부분의 목재를 샘플화한 그만의 프로그램이 들어 있다. 이는 미래의 대목이 한층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줄 것이다.
조전환 씨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한옥 짓는 일을 익혔다. 경복궁 복원 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고, 경주에 있는 한옥 호텔 ‘라궁’에 이어, 골프장 내 한옥 클럽하우스를 짓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처마는 높게, 마당은 깊게” 대목 송해종 “한옥은 흙과 돌, 나무의 삼위일체가 만들어내는 예술이에요.” 정감 넘치는 사투리 억양에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한옥의 미학을 논하는 송해종 씨. 좁다란 가회동 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누비는 그는 30년 목수 생활을 이곳 북촌에서 이어온 천생의 ‘한옥장이’다. 사는 곳이 북촌이다 보니 자연스레 ‘전통 한옥 전문 목수’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는 그는 한옥 짓기가 일인 동시에 즐거움이라고 설파한다.
“한옥의 매력은 다소곳한 물매에 있어요. 우리 한옥은 지붕의 선이 단아하고 멋스럽잖아요. 여기에 마당은 낮고 깊게, 처마는 높고 웅장하게 해주는 거죠. 마당을 낮추고 처마를 높이면 그만큼 공간이 많이 확보되니까요. 시대 변화에 맞게 한옥도 바뀌어야죠. 옛것만 고수하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말은 이리 해도 그는 누구보다 전통에 충실하다.
나무와 흙, 돌 이외의 재료는 쳐다보지도 않고 나무도 허여멀건 요즘 나무보다 빛깔이 묵직하고 깊은 고재古材를 선호한다. 결국 그의 말은, 한옥의 정신은 그대로 잇되 실용성을 보완해야 한다는 뜻인 셈이다. “한옥의 아름다움은 들고 남에 있어요.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한옥의 선이 얼마나 운치 있는지 한번 보세요.” 덧붙여 한옥은 탄탄하고 내실 있는 집이라 했다. 백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그렇기 때문에 현대적인 실용성과의 접목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송해종 씨는 한옥 건축만 30년째다. 원서동 궁중음식연구원을 비롯, 100평에 달하는 화성 송산의 홍씨 문중 종택, 고양의 유명 맛집 ‘양수면옥’의 누각과 육각정 등 숱한 한옥을 지었다.
최근에 완성한 공간으로 특히 이 집의 마루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 송해종 씨. 인심 좋은 아저씨처럼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빨간 브이넥 니트는 라코스테, 갈색 코르덴 팬츠는 빈폴 골프 제품
“한옥은 인연으로 완성된다” 대목 정영수
보기 좋은 육송이 얼기설기 얽혀 지붕을 이룬다. 대들보를 세우고 지붕을 얹었으니 곧 기와가 얹혀질 터. 성북동에서 한옥 상량上樑에 여념이 없는 정영수 대목은 한파에도 아랑곳 없이 현장을 지킨다.
“한때는 가구를 만들었었죠. 가구 작업(소목)이 외로운 작업이라면 대목은 여럿이 탁 트인 공간에서 일할 수 있어 좋아요.” 문화재 대목장 기능 보유자인 그는 문화재 복원에도 조예가 깊다. 하지만 최근에는 문화재나 사찰 복원보다 개인 집을 신축, 보수하는 일이 더 많다.
한옥으로 살림집을 옮기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변화다. “놀지 않고 일하니 좋죠”라는 무심한 한마디로 최근의 변화에 대한 감회를 토로하는 정영수 씨. 그는 스물둘의 나이로 목수에 입문, 27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일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나무도, 집도 인연이 되어야 만날 수 있어요. 억지로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거든. 좋은 나무로 좋은 사람들과 어우러져 지은 집은 좋은 집이 될 수밖에 없어요.. 나중에는 처가가 있는 해남 땅끝마을에 내려가 한옥 짓고 살고 싶어요.” 바다와 맞닿은 땅끝마을에 들어설 단아한 한옥. 완벽주의자 정영수 씨의 수십 년 노하우로 지어질 그 집이 궁금해진다.
정영수 씨는 대목 신응수 씨에게 대목 일을 배워 문화재와 사찰, 쟁쟁한 한옥들을 두루 섭렵했다. 완공 당시 가회동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건축가 조주립 씨의 집을 비롯,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북촌 은덕문화원 등을 지었는데, 나무의 결과 선이 제대로 살아 있는 한옥을 짓기로 유명하다.
아직 지붕을 얹지 않은 이곳은 성북동 현장. 정영수 씨는 치목한 나무들을 하나씩 세워 집을 만든다. 아직 지붕이 없는지라 파란 천막만 덮여 있다. 오렌지색 집업 스웨터와 스웨이드 점퍼, 코르덴 팬츠는 모두 갤럭시 제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