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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과 중화제국, 그리고 서울 : 동양 삼국의 평화

◆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5. 25.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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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과 중화제국, 그리고 서울   

2011.5.23  호호당의 김태규님

 

 

옛날에 로마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어 졌고, 서로마제국은 야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동로마제국은 그 뒤로도 아주 오래오래 이어졌다는 것 정도는 아시고 계실 것이다.

 

이에 조금만 더 자세히 얘기해보자.

 

기원 전 27 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시작된 로마제국은 그로부터 약 400 년이 지난 기원 후 395 년에 동서 로마제국으로 분할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대단히 영악한 인물, 미국 드라마 ‘ROME’에서 시저의 양아들로 나오는 옥타비아누스라는 꼬마아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분할로부터 100 년도 안 된 476 년, 서로마제국은 사라졌다. 하지만 동로마제국은 이후로도 상당한 번영을 이어갔으니 서로마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근 1000 년을 이어가자가 1453 년에야 문패를 내렸다.

 

그러니 로마 제국은 제국 성립 이전인 기원 전 510 년의 공화정 때부터 계산하면 무려 2000 년을 이어간 엄청난 정치적 실체였다.

오늘의 유럽과 미국은 로마 제국의 연장선상에 있는 문화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제국을 모태로 하여 그 주변의 여러 부족들이 문명화되어온 과정이 유럽과 미국의 역사이다.

 

제국의 변방인 중동에서 생겨난 기독교 역시 로마 제국을 기반으로 성장했기에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성지순례 여행상품도 사실 로마제국 순례상품인 셈이다.

 

돌아가서 얘기하면 왜 서로마제국은 분할로부터 100 년도 안 되어 없어지고 말았던 것일까? 강력하기 그지없던 로마제국이었는데 말이다.

 

그건 제국이 동서로 분할될 당시부터 이미 서쪽 로마를 포기한다는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할 때부터 제국의 핵심은 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도시로 옮겨갔던 것이다.

 

식량생산이 풍부해서 덩달아 인구가 번창한 쪽은 이집트 방면이었기에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서 교역의 요충인 오늘날 이스탄불에 당시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즉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란 이름을 붙여 새롭게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제국 수도로 삼았다.

 

그러니 당시 로마가 있던 서로마제국은 포기한 땅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서양에 로마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중국이 있다.

 

그리고 중국 역사의 맥락도 로마제국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

 

중화제국 역시 황하 유역에 형성된 거대한 三角洲(삼각주)에서 시작되었다. 황하가 실어온 흙이 쌓여 형성된 땅에서 농경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인들이 부르는 ‘가운데 넓은 평야지대’ 中原(중원)이 그것이다.

 

수백개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다 보니(춘추시대), 일곱 나라가 남게 되고(전국시대), 그 중에서 서쪽으로부터 전래된 제철 기술을 먼저 수용한 秦(진)나라가 처음으로 통일했다.

 

秦(진)에 이어 漢(한)제국이 등장했으니 그 이후로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漢族(한족)이라 한다.

 

이후 서쪽과 북쪽의 이민족이 중원에 들어와 양자강 북쪽을 차지했고 전통의 중국인들은 양자강 이남, 오늘날의 중국 남경 일대로 근거를 옮겼다. (이를 오호십육국 시대, 또는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이는 마치 로마제국이 서쪽 로마를 내어주고 동로마제국에 핵심을 둔 것과 같다. 그러나 중국은 그 이후 새롭게 통일을 이룩했다.

 

그 바람에 중화제국의 역사에 있어 핵심 거점은 세 곳이 되었다.

 

서쪽의 장안(오늘의 서안)과 북쪽의 북경, 그리고 양자강 남쪽의 남경이다.

 

서쪽 장안은 로마제국으로 치면 ‘로마’라 하겠고, 남쪽의 남경은 콘스탄티노플에 해당된다.

 

그러나 중화제국은 명나라 때에 들어와 중원을 회복한 뒤 몽골의 수도였던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건설한 성이 지금 북경의 ‘자금성’이다. 이리하여 핵심 거점은 세 곳이 된 것이다.

 

유럽의 경우 이 대목에서 중국과 양상이 달라진다. 동로마가 사라진 이후 프랑크 왕국, 신성로마제국, 대영제국, 합스부르그 제국,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 히틀러의 제3제국, 소련제국 등등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유럽을 통합하고자 했으니 모두 실패했다.

 

그 바람에 중국의 북경처럼 제3의 수도가 등장하지는 못했다. 파리와 비엔나, 런던, 베를린, 모스크바처럼 그때마다 힘의 향방에 따라 중심이 이동하다가 급기야는 오늘에 이르러 미국의 워싱턴으로 옮겨가 있는 현실이다.

 

핵심 거점의 이동거리는 로마제국이 훨씬 크다. 대서양 건너 미국의 워싱턴에 이르렀으니 그렇다. 그러나 워싱턴 역시 당장은 로마제국의 수도이긴 하지만 또 옮겨갈 수도 있다는 점이 숙제이다.

 

중화제국과 로마제국의 역사상 차이점은 중화제국은 여전히 당초의 강역 안에 머물고 있는데 비하여 로마제국은 보다 글로벌 차원이라는 면에서 스케일이 크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중심은 앞서 얘기했듯이 그간 부단히 이동해왔다. 런던, 파리, 비엔나, 베를린, 모스크바, 워싱턴 등등 말이다.

 

중화제국은 固定(고정)적인 면이 강하고 로마제국은 流動(유동)적인 면이 강하다.

 

나는 이를 두고 중국은 土(토)의 성격이고 로마는 ‘물’의 성격이라 파악한다.

 

중화제국은 그 자체로서 너무나도 크고 인구가 많아서 주변의 다른 힘이 그것을 대체할 수가 없다. 한때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도쿄’를 새로운 중심으로 세워보려고 했으나 알다시피 실패로 끝났다.

 

이 세상에는 사실 로마제국과 중화제국, 이 두 개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디아는 그 특유의 非(비)역사성과 심오한 철학으로 인해 제국이 될 수 없고, 한때 유럽을 능가했던 이슬람은 오늘날 그 토지의 척박함으로 인해 중심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요원하다. 물론 아프리카는 여전히 논외라 하겠다.

 

달리 말하면 강한 역사의식을 가진 문명은 여전히 로마와 中華(중화)인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이 양자가 패권을 다툴 것은 자명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 역시 로마와 중화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장래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중화제국의 틀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사대주의를 하자거나 중화제국 안으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의 기본적 틀은 중화의 틀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능해 보이는 것은 일본제국의 도쿄가 한때 로마 이후 대영제국의 런던 역할을 했다면, 우리 역시 서울을 중화제국의 틀 안에서 새로운 베를린 역할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물론 우리 한겨레가 인구에서 중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영제국이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았어도 런던이 로마제국의 법통을 이어 수도 역할을 했듯이, 우리 역시 잘하면 서울을 중화제국의 수도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말이다.

 

가능성이 커보이지는 않지만 그런 상상을 해본다.

 

서울이 중화제국의 수도가 되려면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할까?

 

무엇보다 중국과 우리, 그리고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삼국 사이에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적 갈등이 현저히 적어져야 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겠다. 서로 으르렁 거려서는 그럴 가능성은 없다 할 수 있겠다.

 

이어 경제적으로도 사실상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단일 시장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고, 이어 대한민국의 기술과 경제가 크게 앞서가면서 일본과 중국 경제에 유익한 역할을 한다면 서서히 서울이 제국의 수도로 부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중국 사천성의 머리 좋은 학생이 서울로 유학올 수도 있을 것이고, 일본 학생이 서울로 와서 공부하고 직장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꿈같은 얘기이다. 너무나도 많은 장애물들이 있으니.

 

하지만 우리가 진정 문화강국이 되고 경제와 정치가 그들의 모범이 된다면 사실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영원히 서울이 동양 삼국의 수도로 남는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베푸는 나라가 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 여긴다. 너무 꿈같은 얘기인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내놓은 辯(변)은 ‘민족의 복수’라는 말이 아니었다, ‘동양 삼국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말이었다.

 

우리 선인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통이 컸었다.

 

초여름 한낮의 백일몽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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