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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5. 26.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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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기상승의 전반부에 대해   

 2011.5.25  호호당의 김태규님

 

 

 

중국 宋代(송대)의 위대한 성리학자 정이천 선생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陽(양)이 처음 생겨날 적에는 지극히 미미해서, 편안하고 고요한 때를 거친 연후에야 멀리 뻗어갈 수 있다. 陽始生甚微(양시생심미) 安靜而後能長(안정이후능장)이란 말이 그것이다.

 

전날 저녁 고전강독 근사록 강독시간에 나온 말이다. 근사록을 여러 차례 숙독하다보니 이 문구를 외우게 되었지만, 실로 신기한 것은 암송할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고 또 새롭게 얻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陽氣(양기)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생겨날 적에는 왜 지극히 微微(미미)한 것인가에 대해, 왜 안정을 취한 연후에만 자랄 수 있다고 하는 것일까에 대해 늘 생각해보게 된다.

 

젊어서 근사록을 처음 대했을 때 나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좋은 말이네 하며 휘리릭 읽어치웠다. (좀 머리가 좋고 학구적인 젊은이들은 으레 이런 짓을 한다. ‘교양 포트폴리오 쌓기’라는 명분하에 말이다.)

 

그런데 陰陽五行(음양오행)에 빠져 30 년 이상 지내다 보니 어느 사이 나도 모르게 근사록의 말들을 점점 깊게 이해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앞에 소개한 문장도 그런 것 중에 하나이다.

 

사실 내가 세상의 이치에 서서히 눈을 뜨게 된 것은 결국 독서를 통한 것이 아니라, 삶을 체험하는 과정에서였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저 들녘에 존재하는 자연의 부단한 순환을 통해서였다.

 

자연은 늘 거기에 있다. 그러면서 늘 변화해가니 그를 순환이라 한다. 나날이 새롭지만 늘 거기에 있으니 전체로서의 자연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무성하며, 가을이면 풍요롭고 겨울이면 쓸쓸하다. 자연의 변하는 얼굴들이니 순환이라 한다. 하지만 또 봄이 와서 꽃을 피우면서 한해의 순환을 시작하니 실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

 

그 자연의 얼굴 또는 모습을 옛 학자들은 象(상)이라 했다. 그리고 象(상)을 통해 자연의 元型(원형)을 느꼈으니 이를 理(이)라 했다.

 

자연의 象(상), 그 변화하는 얼굴에도 일정하고도 엄밀한 규율이 있으니 그를 數(수)라 한다. 수가 무엇인가? 정확한 것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숫자나 통계치를 들이대면 당장 쉽게 반박할 수 없다. 숫자는 설득력을 가진다.)

 

자연의 상을 통해 그 수를 알 수 있으니 이것을 예전에는 術(술)이라 했고 오늘날에는 科學(과학), 즉 사이언스라 말한다. (과학은 무엇보다 숫자를 들이밀기에 설득력이 있고 권위를 가진다.)

 

내가 밖으로 나가 놀았으니 독서보다도 자연에서 무엇을 알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놀다보니 거기에 象(상)이 있고 그 너머에 理(이)를 느끼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니 數(수)를 알게 된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 자주 말하는 것, 운명에 따른 숫자를 말하는 것이 바로 이 數(수)라 하겠다. 예를 들면 우리 국운은 1964 년을 바닥으로 하여 60 년의 주기를 가지고 다시 그보다 더 큰 360 년의 주기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數(수)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數(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조금은 더 理(이)에 관한 것이다.

 

理(이)를 알고 체득해야만 실은 수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돌아가서, ‘陽(양)이 처음 생겨날 적에는 지극히 미미해서, 편안하고 고요한 때를 거친 연후에야 멀리 뻗어갈 수 있다’는 정이천 선생의 말이 무슨 말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죽음에서 아니면 無(무)에서 무엇이 생겨난다는 것, 즉 無中生有(무중생유)의 과정이 ‘양이 처음 생겨날 적에’라는 말이다.

이 점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본다.

 

봄은 양력 2월 초부터 시작된다. 우리 뇌리에 봄이라 하면 당연히 꽃피는 봄이지만, 사실 꽃은 석 달의 봄 중에서 마지막 달인 4월에 피어난다.

 

그러면 양력 2월과 3월은 봄이 아닌가?

당연히 그 또한 봄이다.

 

양력 2월 초부터 나무와 풀은 꽃을 피워낼 준비에 들어가지만, 우리는 꽃이 피어야 봄이라 여기는 까닭에 그 때가 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여기에 ‘실제의 봄’과 ‘우리 의식 속의 봄’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것이다.

 

아시겠는가? 실제 봄과 의식 속의 봄 간에는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사실 陽氣(양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때부터가 봄이다. 꿈틀거리는 것을  한자 용어로는 蠢動(준동)이라 한다. 蠢(준)자를 살펴보면 봄 春(춘)에 벌레(충)이 두 마리가 있으니 봄이 되어 여러 벌레들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꿈틀댈 대는 우리 눈에 잘 보이지가 않는다. 미미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 시력이 나쁜 것이고 또 달리 말하면 성에 차지가 않는 것이다. 꽃이 만개해야만 봄이라 여기는 우리들에게 순이 움트는 모습은 전혀 미흡한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양력 2월의 초봄부터 꽃을 피울 준비에 들어가고 사실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지만, 우리 눈에는 그저 망울만 맺혀 있을 뿐 그것이 꽃이 아니기에 쳐다보지 않게 된다.

 

그래서 봄이 왔어도 우리는 그를 봄이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봄이 왔어도 봄 같지가 않다는 시적 표현을 쓰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따뜻하고 꽃피는 봄’이지 쌀쌀하고 썰렁한 봄은 봄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따뜻하고 꽃피는 봄만 봄이라 여긴다면 그건 어쩌면 성급한 마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기대는 언제나 현실을 훨씬 앞질러가는 법이니 그런 것이지만, 때로는 현실 속에서 기대를 열어가려면 참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기다리고 좀 더 정성을 다해 열심히 해가면서 마침내 봄을 열어가는 것이지 따뜻하고 꽃 만발한 봄이 절로 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도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정이천 선생은 ‘陽(양)이 처음 생겨날 적에는 지극히 미미해서, 편안하고 고요한 때를 거친 연후에야 멀리 뻗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양이 처음 생겨날 적에는 지극히 미미한 것이 아니라 실은 대단한 것이다. 무에서 유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니 어찌 대단하지 않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의 기대에 비하면 미미할 뿐인 것이다.

 

또 편안하고 고요한 때를 거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라도 불편하고 초조한 마음을 편안하게 다지고 고요하게 다잡아야만 마침내 멀리 뻗어갈 때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뻗어가려면, 당장 무엇을 시작했어도 어찌 한 술밥에 배부를 리 없고, 내 기대에 비해 미미하고 한심한 때를 참고 기다리면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지극정성을 다해야만 마침내 멀리 자라는 때, 즉 꽃피는 봄과 무성한 여름을 열어갈 수 있는 것이다.

 

陽(양)이 시작된다는 것은 어떤 기대와 소망을 안고 무엇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陽始生(양시생)의 의미이다.

 

이제 갓난아기를 낳아놓고 그 놈더러 세상에 나가 어떤 것을 해오라고 강요하는 부모는 세상천지에 없다.

 

그런데 우리들은 흔히 봄이 이제 시작되고 있건만 바로 꽃이 만발해야 하고 또 더 나아가서 잎새 무성한 여름을 기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봄을 탓하거나 가짜 봄이라고 나무란다면 봄은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기가 막혀서 말이다.

 

이 글은 어제 올린 글, ‘운세의 상승과 하강에 대해’란 글이 다소 부족한 것 같아서 쓰게 된 보충 글이다.

 

봄에는 세 개의 봄이 있으니 일러 三春(삼춘)이라 한다. 그 중에서 꽃피는 봄은 마지막 달이다. 그 이전의 봄은 얼핏 보아 전혀 봄 같지가 않겠지만 그 봄이 있기에 백화가 만발하는 늦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陽(양)이 처음 생겨날 적에는 지극히 미미해서, 편안하고 고요한 때를 거친 연후에야 멀리 뻗어갈 수 있다.

정이천 선생의 말을 다시 한 번 새겨보시면 좋겠다.

 

특히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처음 새롭게 어떤 일을 시작했다든가 또는 너무나도 모든 것이 어렵기만 한 처지에서 새롭게 자신의 삶을 일구어 나가고자 하는 독자라면 호호당의 이 말을 깊게 새겨보시길 바란다.

 

1964 년에서 1979 년에 이르는 시기 우리나라의 국운은 봄이었다.

 

그 때는 봄이었고 힘든 계절이었다. 그 계절에 온 백성을 가혹하게 다그치며 나라와 민족의 여름을 준비한 지도자는 독재자 박정희였다.

 

이제 이해가 좀 되시는가? 그러니 이제 이념을 떠나 그 분의 헌신을 기려야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지금 힘들어서 힘든 자가 볼멘소리로 ‘정말이지 맹렬히 열심히 했거든요, 그런데 결국 아무 소용이 없어요!’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응석 정도에 그쳐야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어쩔 것인가, 그냥 힘을 더 내는 수밖에 달리 있겠는가!


봄은 원래 그런 것이다. 예외 없는 봄이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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