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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慾望(욕망) 그리고 사랑 : 갖는것과 주는 것

◆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3. 2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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慾望(욕망) 그리고 사랑   

2011.3.21  호호당의 김태규님

 

 

 

욕망과 사랑이 진실로 다르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되기까지 먼 길을 걸어왔다.

 

멀고 굽이가 많은 길이었기에 들뜬 적도 많았고 좌절한 적도 많았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생명은 욕망하는 존재이지만 모든 생명의 개체들이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고 한다면 그 결과 이 세상은 殘酷(잔혹)함과 非情(비정)함만이 넘쳐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욕망의 게임’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라 한다면 하나의 커다란 수수께끼와 봉착하게 된다.

 

욕망 게임만이 있다면, 분명 이 세상은 여러 천 번에 걸쳐 이미 끊임없는 고통만이 존재하는 無間地獄(무간지옥)이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여기 먹을 것이 하나 있고, 먹을 사람은 둘이라고 하자. 그리고 먹을 것 하나를 다 먹지 못하면 두 사람은 어차피 굶어죽는다고 하자. (사실 이 가상 실험은 소크라테스가 던진 질문이다.)

 

그러면 두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싸워서 상대를 죽인 다음에 먹을 것 하나를 통으로 차지하거나, 아니면 그냥 어느 한 사람이 ‘당신이 먹어요, 나는 굶어 죽을 터이니’ 하고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두 사람이 싸우는 길을 택했다고 하자.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크게 다치고 출혈이 심하면 두 사람 모두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먹을 것은 손도 대지 못한 채.

 

그러나 그렇지 않고 한 사람이 상대를 ‘나이스’하게 죽인 다음 먹을 것을 통으로 다 먹고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주검 앞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많이 미안해할 것이다.

 

‘어쩔 수 없었어, 반대의 경우라 해도 나는 자네를 원망하진 않았을 것이니 부디 나를 용서해주시게’ 하며 그 사람은 주린 배를 채울 것이다. 그리고 시체를 매장해주는 정도의 예의는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경우 살아남은 자는 살기 위해 상대를 죽였을 뿐이니 그를 나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현실의 세상은 앞서의 두 갈래 선택에서 대부분 서로 싸워서 남는 사람이 먹을 것을 통으로 먹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 하겠다.

 

그냥 난 굶어죽을 터이니 당신이 먹기를 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극단적인 假定(가정)이고 가상의 실험이니 현실과는 다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현실의 세상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다르지가 않다. 어디 한 번 잘 생각해보시라.

 

그렇기에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였다. 우리가 잊고 살아서 그렇지, 인류의 지난 역사는 무수한 사람들의 피로 얼룩져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진보해왔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진보했고 발전했는가를 살펴보자.

 

 

첫째는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더 많은 개체가 번식을 해왔다.

 

또 하나는 투쟁의 양상에 있어 죽기 아니면 살기 식 투쟁에서 여러 천년을 지내는 동안 이제는 상대를 무력화시키기만 하면 굳이 잔혹하게 죽이지 않아도 될 정도까지는 발전해왔다.

 

그러나 이 또한 냉정히 살펴보면 생산력의 발전이 있었기에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는 진보를 이룩한 것이지 인류의 심성이 高揚(고양)된 결과는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 먹을 것이 이제 풍부해져서 나누어 먹어도 되는 세상이 되니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지, 지금도 만일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세상이라면 여전히 죽이고 또 죽이는 잔혹 비정함이 일반적일 것이다.

 

이 말은 인류역사의 진보는 결국 생산력의 발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생명 그리고 인류의 또 다른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가상 실험에 들어있지 않은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얘기해보자.

 

생명을 이어가는 것을 生殖(생식)이라 한다. 생식에는 무성 생식이 있고 유성 생식이 있다. 유성 생식이란 암수가 있어 짝을 지어 생식하는 것이다.

 

유성 생식을 하는 생명체들은 무성 생식을 하는 생명체에 비해 크게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을 숙명으로 한다는 점이다. (무성 생식은 수명 자체가 없고 그저 세포 분열을 통해 이어갈 뿐이다.)

 

낳아서 번식하는 것을 대가로 죽게 되는 것이 유성생식체의 운명이라 하겠다. 낳은 대신에 죽는 것이다.

 

이 세상은 짝짓기 생명체에게 후손을 낳을 시간을 어느 정도 줄 뿐 영원히 살지는 못하도록 설계해 놓았으니, 우리는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내거 보기에도 후손을 보고 대를 이어가는 우리가 만일 불사의 존재가 된다면 일단 지구 차원에서 자원의 과다한 소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過用(과용)이다.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은 인류의 오랜 소망이지만, 부디 인류과학기술이 그 정도로까지 발전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짝짓기 동물은 지구상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태어나고 죽기를 거듭하면서 하나의 이상(?)한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보다 때로는 후대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다. 그 결과가 바로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과 같은 다큐에서 흔히 보게 되는 모든 어미들의 ‘자기희생’이다.

 

후대를 지키려는 노력은 어미들의 모습에서 직접적이고 처절하게 나타나서 그렇지 실은 수컷들도 크게 다르지가 않다. 다만 생산에 따르는 비용이 암컷이 수컷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암컷들이 더 치열할 뿐이다.

 

임신해서 낳기까지 엄청난 자원의 소모가 따르기에 암컷들은 일단 낳은 새끼를 최대한 살리고자 애쓰는 것이다.

 

알고 보면 수컷들도 죽어라 갖은 힘을 다해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다니면서 후대를 번성시킬 확률을 높이는데 총력을 다 한다.

(그걸 우리는 수컷의 바람기라 한다. 바람기를 흔히 ‘부도덕’하다 하지만 수컷 입장에선 다소 억울한 면도 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짝짓기 생명들은 가혹한 환경 속에서 대를 이어오는 동안 후손 또는 후대를 지키는데 엄청난 노력을 해왔으며 그 노력은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앞서의 가상실험과 모든 조건이 같다고 하고, 다만 먹을 것을 다투는 두 사람 사이가 부모 자식 간이라고 해보자.

 

이 경우 물론 서로 먹겠다고 싸우는 부모 자식 간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양보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난 이미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나보다 자식인 네가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이런 정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려가며 자식을 지키려는 이 감정을 우리는 ‘내리 사랑’이라 부른다.

이런 정서는 대단히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자기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자기 아닌 다른 대상을 살리려는 것은 대단히 드문 정서라 하겠다.

 

어찌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원래 유한한 생명을 가진 자에게 있어 그 하나뿐인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법인데도 말이다. 시쳇말로 돈이 억만금 있으면 뭘 하나, 살아 있어야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하는 말처럼.

 

결국 합당한 이유를 찾아낸다면 후손은 다른 객체 또는 他者(타자),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우리가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을 떠나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처럼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감정은 개체인 자신의 생명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엄청난 것이니 실로 모순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내리 사랑이 대부분 부모 자식 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부모에서 자식으로 향하는 원 웨이, one way 이고 자식에서 부모로 향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희귀한 일이다.

 

물론 옛날에는 유교적 孝(효)란 관념이 있어 자식이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일도 많았지만, 그 역시 당시 환경의 산물일 뿐 오늘날처럼 자식을 적게 낳고 핵가족인 일반적인 세태에서는 부자연스런 일이다.

 

자식이 많았으니 많은 자식 중에 나 하나 정도 희생되어도 자손을 이어가는데 별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중간 정리를 좀 해보자.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욕망 게임을 펼친다. 내 욕망의 충족은 다른 이의 희생을 전제로 하기에 비록 타인의 희생을 보며 우리가 동정하고 미안해하는 마음을 가질 수는 있어도 논리적으로는 끝내 無間地獄(무간지옥)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동정심의 역할이 작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큰 것도 아니다. 우리가 동정심 또는 憐憫(연민)이란 감정을 진정으로 내면화시키고 있다면, 리가 매일 먹는 각종 육류, 소나 돼지, 닭, 물고기 등을 어떻게 맨 정신으로 입으로 가져갈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라.

 

아무튼 이 점은 일단 그냥 두고 정말 다행한 일은 인류가 생산력을 크게 발전시켜 왔기에 지옥이라 말할 수 있는 세상에서 탈피해서 어느 정도 중간 지대로까지 발전해올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지옥을 회피할 수 있었던 커다란 힘은 좀 전에 말한 부모 자식 간에 존재하는 ‘내리 사랑’이란 것이 있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제 중간 정리를 마쳤으니 이제 마지막 대목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눈앞의 세상과 저 자연을 보라, 아름답지 않은가!

 

엄밀히 살펴보면 잔혹하고 비정한 세상이건만 왜 우리는 거기에서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이 글의 머리 부분에서 말했던 하나의 커다란 수수께끼이다.

 

무간지옥은 피했다 해도 결국은 잔혹 비정한 세상이건만 어찌하여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수수께끼.

 

내리사랑만으로는 그럴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전부가 되기는 어렵다. 부모나 자식이 아닌 이상 모두 내 敵(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정상일 터이니 그렇다. 흔히 하는 말로 ‘세상에 믿을 놈’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세상은 아름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잔혹하고 비정한 면모도 보여주면서 말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게 있어 이 문제는 커다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혹시 모두 내분비 호르몬의 장난인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일시적인 기분일 뿐 결국 세상은 잔혹 비정한 곳이라는 생각이 더 정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더러는 내 욕망이 일시적으로 충족되었을 때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착각에 빠진 적도 있기는 하다.

 

오랜 세월을 통해 얻은 결론은 이 세상에는 내리 사랑 말고도 또 다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에 마치 우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질량, 암흑 물질(dark matter)과도 같았다. 있기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그 무엇처럼 그런 사랑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겠다.

 

그래서 멀고 굽이진 길이라 표현했었다, 글머리에서.

 

그것은 내리 사랑이 그 外延(외연)을 넓힌 결과 생겨난 사랑, 따라서 특수한 관계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보편적(universal)인 사랑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알게 모르게 가득하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욕망은 가져와서 나를 충족시키게 하는 것이다. 이에 욕망의 궁극적인 형태는 우리가 흔히 所有(소유)라고 말하는 것으로 귀착이 된다.

 

난 너를 가지고 싶어, 난 이거를 가질 테야, 또는 넌 내꺼야, 이건 내꺼야, 이런 것이 욕망의 대표적인 표현 방식이다.

 

세상은 그렇게 많이 소유한 자를 성공한 자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은 욕망과는 다르며 소유와도 많이 다르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그런데 준다고 하니 일반적으로는 손해 보는 마이너스 게임이라 해야 정상일진대 이상하게도 사랑은 줌으로서 궁극적으로 나를 충족시키는 또 하나의 이상한 방식이라는 점이다.

 

욕망과 사랑은 다른 것이다.

 

그러니 욕망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가져오고 또 주어라.

 

이게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존재하고 살아가는 방식이기에 이 세상은 추악하고 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라 본다.

 

줌으로써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느냐 하고 물어온다면 그게 말로는 설명이 좀 어려운 면이 있다고 답해야 겠다.

 

설명도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느껴야 하는 것이라서 그저 좀 살다보면 절로 느끼게 되는 때가 온다는 말을 드린다.

 

힌트를 드린다면 하느님의 사랑이나 부처님의 慈悲(자비)가 그런 것이지만 은 우리 누구나의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표현일 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사랑 또는 자비 그 자체가 하느님이고 부처님일 뿐이다.)

 

그러니 그런 거룩한 것을 떠나서 우리 삶 속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때가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우리 속에 누구나 다 있다.

 

살아보라, 알게 되리니, 그걸 모르고 가는 바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은 무정 잔혹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긴급 알림: 고전강독 근사록 강좌가 다음 주부터 목요일에서 화요일 같은 시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3월 22일 내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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