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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이다, 이제 風流(풍류)하시지요

◆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3. 2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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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이다, 이제 風流(풍류)하시지요   

2011.3.20  호호당의 김태규님

 

 

 

바람이 살랑대며 턱과 목 사이를 스치고 다닌다. 바람들이 많이 까불대고 있다.

 

바람의 흐름을 風流(풍류)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봄날의 풍류는 동지로부터 90 일이 지나면 맞이하는 春分(춘분) 무렵부터 시작된다.

 

이제 제법 데워진 땅은 상승 기류를 만들어내고, 상공의 차가운 공기는 내려온다. 그러니 춘분으로서 하늘과 땅의 저 커다란 공간을 무대로 하여 쉴 사이 없이 술렁이는 공기의 일대 순환이 연출되고 있다.

 

우리가 만일 따뜻한 상승 기류를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차가운 하강 기류에 푸른색을 먹일 수 있다면 우리 눈앞의 공간에는 온통 유동하는 붉고 푸른 공기의 흐름들로 엄청난 壯觀(장관)이 펼쳐질 것이다.

 

눈을 감아보라 그리고 상상해보라.

 

놀이공원의 관람차보다 수십배 아니 수백배 높이에 달하는 아주 크고 투명한 거대한 회전식 관람차가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올 적에는 푸름, 오를 적에는 붉은 빛을 보일 것이니 그 광경을 연상해보라. 그만한 스펙터클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눈을 뜨지 말라, 상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기는 아직 이르다.

 

당신은 그 투명한 회전 관람차에 올라타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저 높은 곳으로 오르니 겁도 난다고? 그건 아직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다. 당신은 이미 공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아주 가벼운 상태, 마음 편히 높은 저 藍色(남색)의 창공으로 올랐다가 다시 소리치며 신나게 내려오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즐겁지 않은가!

 

봄날의 풍류는 그런 까닭으로 그냥 ‘놀이’인 것이다. 놀며 다니는 것이니 遊行(유행)인 것이다.

 

거치적거림 없이 이곳저곳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이 봄날의 놀이를 莊子(장자)는 逍遙遊(소요유)라 말했다.

 

봄날에 봄바람이 난다는 것은 놀이에 대한 욕구가 衝動(충동)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제 노시오 할 때 놀지 못한다면 그건 바보, 天然(천연)의 선물 앞에서 애써 외면할 까닭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 이 봄날, 집안에서 장자의 소요유 편을 펼쳐놓고 그 글귀를 읽고 있는 자는 장자의 門徒(문도)중 왕초보. 실제 밖에 나가 노니는 자는 중급의 문도일 것이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바쁘게 일하는 사이로 잠시 바깥세상의 공기를 바라보며 앞서와 같은 상상을 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면 가장 우수한 문도일 것이니 아낌없는 點數(점수) 받으리라. 에이 뿔뿔!

 

春分(춘분)으로서 日夜(일야)가 均分(균분), 낮과 밤의 길이가 똑 같아지고 그 이후로는 낮이 더 길어진다.

 

그리고 춘분으로서 아지랑이가 자연의 무대에 본격 등장한다.

 

아지랑이, 말만 들어도 간지러운 느낌 또는 나른한 느낌이 든다.

 

아지랑이를 중국 문학에서는 들판을 달리는 말이라 해서 野馬(야마)라고 한다.

 

또 풀린 실이 놀고 있다고 해서 놀 遊(유)에 실 絲(사)를 써서 遊絲(유사)라고도 한다.

 

중국 당나라 때 40 세에 요절한 불우했던 시인 盧照隣(노조린)은 ‘長安古意(장안고의)’라는 제명의 시에서 이런 문구를 넣었다,

잠시 감상해보라.

 

百尺遊絲爭繞樹 (백척유사쟁요수)
一群嬌鳥共啼花 (일군교조공제화)

 

우리말로 옮겨보면 이렇다.

 

‘백 길의 아지랑이 다투어 숲을 에워싸고, 한 떼의 예쁜 새들은 함께 꽃밭에서 우지지네.’

 

백 길이나 되는 아지랑이, 한 척을 30 센티미터라 하고 백 척이면 30 미터가 된다. 이렇게 긴 아지랑이가 하늘거리면서 봄날의 숲을 에우는 모습을 연상하면 우리 마음도 덩달아 신선해진다.

 

하지만 아지랑이가 본격적으로 피어오르는 춘분 무렵은 사실 우리 정서가 대단히 불안정한 때인 것도 사실이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천지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다 그러하다.

 

왜 그러냐고?

 

그 이유를 말하겠다. 춘분의 철학 보따리를 풀겠다.

 

앞서 봄날의 風流(풍류)는 따뜻한 상승기류와 차가운 하강기류가 일대 對流(대류)를 일으키는 현상이라 했다.

 

그렇다면 자연에 속하는 우리 마음 속에도 춘분 무렵이면 상승기류와 하강기류가 존재하며 때로는 마구 뒤섞이기도 한다.

 

그러면 기분이 좋았다가 금세 나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내 마음 나도 몰라’가 된다.

 

躁鬱症(조울증)의 계절이 바로 춘분을 전후한 시점인 것이다.

 

기온이란 사실 땅으로부터 반사되는 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니, 춘분 무렵 낮과 밤이 같아져서 우리들은 이제 따뜻한 계절이 왔구나 하지만 실은 아직 시기상조. 땅은 여전히 차가운 편에 속한다.

 

낮이 밤보다 길어진다는 것은 ‘빛’이 많아진다는 것이지 온기가 한기보다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溫氣(온기)가 寒氣(한기)보다 많아지는 때는 춘분에서 다시 한 달이 지나 4월 20 일경의 穀雨(곡우)부터이다.

 

사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온기이고 또 熱情(열정)이지 빛이 주는 希望(희망)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흔히들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아직 열기는 부족하다는 말이고, 더 쉽게 말하면 현실은 苦生(고생)하며 살고 있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경우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 희망을 품고 산다는 말이다.

 

이미 따뜻한 사람들은 희망 같은 얘기 별로 하지 않는다. 희망보다는 욕망 또는 탐욕에 대해 얘기한다.

 

예를 든다.

 

직장을 어쩔 수 없이 그만 두고 작은 가게를 오픈한 사람들은 희망을 얘기한다. 달리 말하면 망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이미 안정궤도에 들어선 가게 주인이 말하는 것은 그런 희망이 아니다. (모든 희망은 소박함을 특징으로 한다.)

 

잘 운영되는 가게의 주인을 보면 그 눈빛을 보면 탐욕으로 가득하다.

 

이거 가게 하나로 성에 차지가 않으니 슬슬 분점을 내어볼 까 하는 생각이 가득하다. 이거 망하지는 않는다지만, 어느 세월에 떼돈 만져볼까 하는 생각에 은행 대출을 포함하여 확장 방안을 궁리하면서 탐욕과 열정으로 몸 달아 한다.

 

소박하지 않은 것이다, 욕망 또는 탐욕은.

 

그를 나쁘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희망과 거침없는 탐욕은 달라도 많이 다른 것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춘분은 희망을 품는 계절이다. 아직 욕망이나 탐욕을 부릴 때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상승기류를 타고 꿈을 품어보다가도 다시 차가운 하강기류에 금방 좌절하기도 한다. 희망의 계절은 그래서 조심스럽기도 하고 소박하기도 하다.

 

더러 타고나기를 寒氣(한기)가 많은 자는 이 무렵이면 우울함으로 힘들어한다.

 

겨울은 너무 추워서 희망 자체를 가질 수 없기에 沈潛(침잠)할 뿐, 오히려 우울하지는 않다.

 

우울함이란 어느 정도 희망을 가져봄 직도 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아예 추운 겨울은 언감생심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우울증도 없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鬱症(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물론 앞부분에 내가 제시했던 상상, 커다란 관람차를 타는 공상과 함께 봄날의 풍류를 느끼고 이미 바람이 든 분들도 계실 것이지만.)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다. 먼저 우울하신 분들에게.

 

조금 더 시간을 보내면 다 좋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드린다.

 

Don't worry, you will be happy, I sure. Okey.

 

걱정마세요, 행복해질 거예요, 제가 보장하지요. 암요.

 

그리고 바람이 든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도 있다.

 

Now is spring, be free as the wind, not hesitate.

 

이제 봄날입니다, 風流(풍류)하시지요, 주저하지 마시고.

 

(긴급 알림: 메이 데이 메이 데이, 고전강독 근사록 강좌가 다음 주부터 목요일에서 화요일 같은 시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3월 22일입니다. 미처 알리지 못해 죄송, 또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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