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도)와 하느님, 그리고 合理性(합리성)
2011.3.16 호호당의 김태규님
(이 글은 사변적인 글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夏至(하지)에 이르러 陰(음)이 陽(양)에 올라타면 이로서 萬物(만물)은 死滅(사멸)로 접어든다는 말이 淮南子(회남자)에 있다.
원문을 옮겨본다.
夏日至則陰乘陽(하일지즉음승양) 是以萬物就而死(시이만물취이사).
이 문구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 1학년 시절이었다. 그 이후 접할 때마다 다른 생각이 들었지만, 그로부터 30 년이 지나 내 나이 쉰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뜻을 좀 제대로 알게 된 것도 같다.
窮理(궁리)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理致(이치)를 窮極(궁극)에까지 탐구한다는 것이 이런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위의 말은 사실 간단한 말이다. 특히 오늘날의 ‘자연과학’으로 설명하면 대단히 쉽다.
하루 중 日照(일조)시간은 夏至(하지)에 이르기까지 점점 길어져서 최고조에 달하게 되니 한해를 통해 가장 해가 긴 날이 되고, 그로부터 다시 일조 시간이 줄어든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일조 시간이 길어졌다가 다시 짧아지고를 반복하는 까닭도 오늘날 우리는 명확하게 알고 있다.
이는 지구의 자전축이 공전 궤도면에 23.5 도 경사가 져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지구본을 놓고 전등을 비추면서 가르치던 기억이 아마도 날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 그런 이치를 몰랐던 중국 철학자들은 오랜 세월에 거쳐 궁리하면서 나름의 정교한 철학체계를 다듬어내었다.
예전부터 존재하던 개념인 陰陽(음양)이라는 用語(용어)와 五行(오행)이라는 용어, 그리고 周易(주역)에 나오는 太極(태극)이라는 용어를 써서 무척이나 精緻(정치)한 宇宙觀(우주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천지인이란 개념을 활용해서 하늘의 이치는 그대로 땅과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관념을 활용해서 변치 않아야 할 도덕과 윤리의 체계를 세웠다.
이런 체계의 기본을 세운 이는 약 천 년 전, 중국 송나라 때의 性理學(성리학)을 창시한 周敦(주돈이)선생으로서 그가 남긴 저 유명한 太極圖說(태극도설)이 그것이다.
이어 주돈이의 제자 중 하나인 程(정이)는 ‘한 번 陰(음)하면 한 번 陽(양)하는 것이 道(도)’라고 하는 周易(주역)의 문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게 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니 그게 바로 도’라고 규정함으로써 성리학의 철학적 기반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정이가 주장한 것 즉 道(도)라는 것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다.
一陰(일음)하고 一陽(일양)하게 하는 理致(이치)를 道(도)라고 한다면 이는 자전축이 기울어진 지구의 태양공전이 바로 道(도)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 이제 정이 선생이 그렇게도 평생을 두고 궁구했던 ‘도의 실체’가 겨우 ‘자전축이 기울어진 지구의 태양 공전임’이 밝혀졌으니 그로부터 人倫(인륜)의 大義(대의)를 밝힌 성리학의 가르침들은 의당 폐기 처분 되어야 할 것도 같다.
분명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나 정이의 ‘도’에 관한 관념은 지구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던 시절에 세워진 관념의 체계임이 분명하다.
이런 난처한 사정은 사실 서구 기독교의 ‘하느님’에 관한 생각 또는 관념과도 동일하다.
아주 오래 전 바빌론 문명이 종말을 맞이하고 이집트 문명이 융성하던 시절, 神(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는 인간들에게 지극히 당연한 존재였다.
여러 민족이나 부족들은 저마다 나름의 신을 섬기면서 다른 부족의 신들과 競合(경합)을 시켰다.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의 질투와 진노는 그런 사정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유태민족이 가혹한 정복 전쟁으로 기존의 부족들을 쫓아낸 다음 그 땅에 정착하게 되고 농사를 지으면서 서서히 전쟁의 신인 여호와를 버리고 농경민족의 신,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을 따르는 무리들이 늘어남은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정착해서 농사를 지으니 풍요를 기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당시 신은 여호와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민족과 부족에 걸쳐 저마다의 신들이 있었고 그 신들간에 치열한 경합 현상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 이후 오랜 세월의 과정을 거쳐 예수가 등장하면서 분노와 질투의 신이 아니라, 그리고 여러 민족과 부족들의 신이 아니라 세상에는 하나의 신만이 계신다는 ‘보편적 신’의 관념을 제시했다.
나아가서 그 하느님은 분노와 질투하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矜恤(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생각, 즉 ‘사랑과 은애의 신’이라고 제시했다.
여기서 정리해보면 처음에 神(신)은 원시 문화로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관념이자 하나의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마치 초기 중국 문화의 天帝(천제)라는 관념과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부족마다 민족마다 각자의 神(신)이 있었던 것은 상호 교통이 적던 시절에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고, 중국의 경우 비교적 이른 시기에 통합이 되면서 天帝(천제)라는 보편적 초월자의 개념이 생겨난 것 또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다.
부족의 신이든 천제든 능력 면에서는 인간을 훨씬 초월해있지만, 성격 자체는 인간의 의식이 투사된 존재로서 성질도 내고 화도 내며 때로는 치를 떨면서 분노하는 우리 인간과 사실상 동일한 성격을 지닌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복 전쟁을 능기로 했던 유태족에게 있어 여호와가 무섭고 대단히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예수 이전의 유태 종교 엘리트들은 유태 민족이 숱한 박해를 받는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관념의 신을 창출해내었고 그것이 예수에 이르러 ‘한 분밖에 없는 하느님이자 사랑의 하느님’을 주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 그러면 돌아가 보자.
주돈이와 정이 등에 의해 세워진 성리학의 체계가 그 근본에 있어 자전축이 기울어진 지구의 태양 공전이 도의 실체에 입각해 있다고 해서 성리학 전체를 버릴 것인가 하는 문제.
또 오늘날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도무지 그 존재를 인정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관념이라는 문제.
이 두 문제를 합리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응당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기성의 종교, 기독교와 카톨릭 또 불교는 사회적 실체이자 권력으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대단히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를 떠나 합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다는 얘기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의 하느님을 부인하거나 부정해야 한다고 보지 않으며, 성리학의 가르침 역시 여전히 긍정하고 있다.
이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으니 그렇고, 또 장중하기 그지 없는 성리학의 무게 때문에 타협하려는 마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말씀 속에 또 인륜대의를 밝힌 성리학자들의 가르침 속에 진정으로 인간이 살아갈 길이 제시되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하지에 이르러 음이 양을 타고 들면 그로부터 만물은 사멸로 접어든다는 말로 돌아가자.
물론 이는 자연과학적 측면에서 지구의 태양 공전에서 생겨나는 이치인 것이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에 더하여 내가 발견하고 느낀 바가 따로 있으니 그것은 지구상의 모든 사물은 물론 우리 인간 역시 그 이치에 따라 모든 정신과 육체의 활동이 밀접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하지부터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미치는 영역이 전방위적이고 여러 층차에 걸치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런 까닭에 하지에 이르러 밤이 길어지는 바로 이 자연과학적인 이치로부터 우리의 삶 또한 정교한 수순을 밟아가며 운명의 길을 가더라는 말이다.
성리학의 가르침이나 예수의 말씀, 그리고 자연과학, 그리고 운명학 이 모두가 오늘날 인류가 도달해있는 현 수준에서의 합리성에서는 다소 별개의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 모두가 더 깊고 높은 합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로 통한다는 생각이다.
오늘은 사색의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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