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누구가 과연 사랑을 공급하는가?
2011.3.23 호호당의 김태규님
사이프러스라는 이름의 나무가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側柏(측백)나무 종류로서 키가 큰 상록 침엽수라 되어있는데, 사실 나는 측백과 편백, 이런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냥 고흐의 그림 속에 잘 등장하는 나무라고 하면 생각이 나실는지.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이란 제목의 그림이나 황금색 밀밭과 일렁거리는 하늘을 배경으로 짙은 회록색의 나무가 서 있는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이다. 고흐의 그림 중에는 이 나무가 잘도 등장한다. 흔히들 ‘지중해 삼나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일본식 표기를 잘못 번역한 것이라 한다.
사이프러스 나무로 얘기를 시작했는데, 그 경위는 이렇다.
‘갈망하지 않는 삶은 없다’는 찬송가 가사가 오늘 아침 문득 떠올랐다. 노래는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 당신’, 원 제목은 'You raise me up', 많이들 아시는 노래 속에 들어있다.
가사를 소개하면 이렇다.
There is no life, no life without its hunger. (그런 삶은 없어요, 갈망하지 않는 삶은 없습니다.)
대중들이 즐겨 듣고 또 가창력 있는 가수들이 즐겨 부르는 이 노래는 물론 찬송가이다.
노랫말을 기억하려 애를 쓰다가 엉뚱하게도 돈 매클린이란 가수가 생각났다. 삼천포로 빠진 셈이다.
자연히 그가 부른 대단히 인상적인 노래 ‘아메리칸 파이’가 떠올랐고, 이어 또 ‘빈센트’란 노래가 연상되면서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이 떠올랐다. ‘스타리 스타리 나이트’로 시작하는 아주 감미로운 노래 말이다.
노래 ‘빈센트’도 물론 좋지만 ‘아메리칸 파이’는 1960 년대 시절 미국에 대한 가수 자신의 批評(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노래는 꽤나 길다. 3 분 이내에 끝나야 대중성이 있건만 돈 매클린은 무려 8 분 이상을 끌고 간다. 일부러 의도적으로 길게 노래하면서 ‘얍삽한 소비의 시대’에 저항하고 있다, 듣든 말든 그건 너희들의 몫이고 난 길게 부른다 하는 식이다.
단순한 피아노 반주로 시작해서 기타 반주가 가세하고, 이렇게 해서 高揚(고양)되다가 마침내 가차 없이 가슴을 흔들어놓는 로큰롤 풍의 연주와 노래가 이어져간다.
로큰롤에 있어 한 시대를 風靡(풍미)했던 걸작이 돈 맥클린의 아메리칸 파이이다.
이 노래가 히트를 친 것은 1972 년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해적 복제 판, 당시 ‘빽판’이라 부르던 디스크를 사서 들었다.
‘바이바이 아메리칸 파이’, 그리고 ‘음악이 죽던 날’, the day the music died 로 이어져가는 노랫말은 단박에 나를 39 년 전의 한 시절로 데려다 준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얘기하게 된 배경에 대해 제법 긴 얘기를 했다.
고흐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나 역시 이국적인 풍경의 수채화를 그릴 때 사이프러스 나무를 잘 집어넣는다. 연한 바탕에 녹색과 갈색 또는 청색을 섞어 칠하면 상당히 근사하다. 또 몸을 비틀어 꼬아가며 하늘로 솟는 그 기상이 내 마음에 든다.
나온 김에 사이프러스의 유래는 과연 뭘까?
그것은 사이프러스 지방에서 많이 자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이프러스는 과연 어디일까?
지중해에 있는 섬나라인 키프로스가 바로 사이프러스이다. 터키의 남쪽, 이집트의 북쪽, 시리아의 동쪽에 위치한 지중해의 거대한 섬이 바로 키프로스이다.
영어로 써보면 대번 알게 된다. 나무 사이프러스는 cypress, 섬나라 키프로스는 cyprus,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키프로스의 어원에 대해 異說(이설)들이 있는데 한 가지를 소개하면 고대 수메르 문명에서 구리를 kubar 라 했던 데서 온 것이라 본다. 영어 copper 의 어원이 이것이다.
키프로스 섬 전체에 걸쳐 구리가 풍부하게 나온다는 것이 이 주장을 받침하고 있다.
아무튼 사이프러스 나무는 태양 빛으로 밝고 명랑한 남색 바다 지중해를 연상케 한다.
오늘은 이리저리 얘기의 갈래가 오간다. 이런 글을 예전에는 漫筆(만필)이라 했다, 가령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이 남긴 西浦漫筆(서포만필)처럼.
하지만 이 글은 갈 之(지)자의 醉拳(취권) 스타일이니 醉筆(취필)이라 해도 되리라.
어쨌든 다시 앞서의 말, 갈망하지 않는 삶은 없다는 말로 가보자.
물론 그 갈망 또는 배고픔이란 다름 아니라 사랑받음(be loved)에 대한 것이다.
노랫말처럼 ‘사랑을 받는 삶’은 높은 험한 산의 連峰(연봉)위에 굳건히 올라서게 하고, 풍랑 거센 바다 위를 걷게 하며, 나 이상의 그 무엇이 되게도 한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영원(eternity)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느낌을 안겨주기도 한다.
사실 이제 이 글의 의도를 밝힐 때가 되었다.
앞글 욕망 그리고 사랑이란 글의 연장선상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사실 처음부터 의도적이었다. 그리고 8 분 이상에 걸친 아메리칸 파이처럼 본론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살면서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그 바람은 지독하리만큼 엄청난 갈망인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알게 되었다,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동물은 물론 식물까지도 모두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어떠한 생명도 사랑받길 원한다는 사실을 깊이 알게 되었다.
또 알게 되었다. 생명은 다양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욕망 중에서 가장 큰 욕망은 바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사실이었다.
사랑받는 것이야말로 골룸(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그 친구)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프레셔스, precious 한 것이다. (프레셔스 프레셔스, 너무 인상적이라 귀에 선연하다.)
한편 사람이 사랑에 주리다 보면 저 ‘골룸’처럼 비쩍 마르고 가녀리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재화는 바로 사랑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이런 질문이 대두된다.
그 고귀하고 소중한 사랑을 과연 누가 공급하는가? 수요는 저리도 많은데 누가 있어서 공급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앞글에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고 그것이 외연을 넓힌 결과 보편적인 사랑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무간지옥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기억하시는지.
여기서 질문은 外延(외연)을 넓힌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공급하는 이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하느님이 있다고 하시지만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부처님의 자비 역시 나는 잘 모르겠다.
앞서의 찬송가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 당신’과 같은 감동적인 노래를 들을 때면 내 생각이 틀렸나 싶을 때도 있긴 하다.
하지만 같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유럽의 하느님과 이슬람의 하느님을 다르다 하면서 저리도 다투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모르겠다. 나아가서 하느님을 잘 믿고 있는 이슬람 나라들에 가서 또 전도하는 것은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깐 이마 또 까기도 아니고, 뭐냐!)
그런가 하면 일본 지진을 놓고 하느님의 징계라고 말하는 수상한 목회자는 또 누구인지 나는 그 정체를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랑을 실제 공급하는 이는 누구일까? 사실 그 답은 自明(자명)하다.
사랑 받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바로 당신이 당신 곁의 누군가에게 사랑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달리 나올 곳이 없지 않겠는가!
얼핏 이 게임의 본질을 말하면 시쳇말로 ‘제 꼬리 뜯어먹기’ 식으로 되어있다. 다시 말하면 내 물건 팔아서 돈을 벌고 그 번 돈으로 너의 물건 사주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사랑이란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재화를 공급하려면 그에 앞서 생산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게 ‘때로는’ 생산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에 따라 다소의 비용이 수반되기는 하겠지만 그 자체 비용은 거의 무료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사랑의 카드를 한 장 보낸다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돈이 들지만 때로는 그냥 종이에 그려서 직접 가져다주면 사랑의 비용은 아주 저렴해지고 때로는 거의 무비용인 것이다.
또 부모님의 자애로운 눈길만으로도 자식은 사랑을 느끼니 이게 사랑의 공급인 것이다.
오늘 집에서 나오는 길에 고속터미널 뒤편에 피어나고 있는 노란 개나리를 보았다. 사랑스러웠다, 그 노란 색은 개나리가 내게 보내는 봄날의 생기로운 눈길이고 사랑의 메시지였다.
그러니 내가 또한 어찌 개나리를 사랑하지 않겠는가!
사랑에 주린 餓鬼(아귀), 또는 골룸이 되어도 좋다. 그러나 그런 그대가 또 누군가에게 사랑을 공급한다면 그대 모습은 골룸이 아니라 어느 새 주는 자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순간에 바뀔 것이다.
사랑에 굶주려서 모두가 골룸 모습으로 변해가지 말고, 찌질한 골룸끼리라도 서로 껴안고 보듬다 보면 어느 사이 귀엽고 사랑스런 자가 되어있을 것이다.
결국 굶주린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는 길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오랜 세월 끝에 알게 된 비밀을 하나 누설하겠다.
그것은 사랑을 받아야만 강해지고 산의 연봉에 서고 풍랑의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을 줄 때 그러니까 사랑을 공급할 때 진실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거 말장난하는 것이 아니다.)
봄날이다, 사랑을 주기 좋은 계절이다. 이 글도 여러분에게 드리는 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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