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그리고 漢陽(한양)
2011.3.10 호호당의 김태규님
내게 漢京識略(한경지략)이란 책이 있는데, 대학교 때 교양 차원에서 읽으라고 등록금에 포함시켜 강매(?)한 책 중에 한 권이다.
책 제목 중에 識(식)자를 여기서는 ‘식’이라 읽지 않고 ‘지’라 소리한다. 알 識이지만 기록하다는 의미로는 ‘지’라고 읽기 때문이다. 標識를 ‘표식’이라 하지 않고 ‘표지’라 읽는 것이 그것이다.
책 뒷면에 보면 출판사는 탐구당, 1974 년 초판 발행이라 되어있으니 참 오래 된 책이다. 대학생 당시 그다지 관심이 없어 읽지도 않았으나 세월이 가면서 실로 애지중지하는 사랑스런 책이 되었다. 당시 강매당한 것을 지금은 고맙게 여긴다.
며칠 전 집에서 이 책을 가지고 나와 다시 읽고 있다. 그간 수 십 번도 더 되풀이해서 읽은 친근한 책이다.
漢陽(한양)의 이모저모에 대해 저자는 간략하게 소개한다고 했지만, 실은 이런 종류의 책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 책밖에 없으니 대단한 책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늘은 서울과 관련된 얘기를 하고자 한다.
서울을 조선시대에는 漢陽(한양)이라 했다. 한양이란 漢水(한수), 즉 한강의 북쪽 양지바른 땅이란 뜻이다.
강의 경우에는 북쪽 땅을 양이라 하고 남쪽 땅을 음이라 하지만, 산의 경우는 그와 반대로 산의 북쪽을 山陰(산음)이라 하고 산의 남쪽을 山陽(산양)이라 한다.
이는 背山臨水(배산임수), 산을 북쪽으로 등지고 강을 남쪽에서 마주 하는 땅을 名勝(명승)으로 하는 풍수설의 영향이라 하겠다. 북한산을 등지고 한강을 남쪽에 두고 있는 서울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책을 보면 서울은 백제 초기의 수도였다가 고구려 장수왕이 점령한 뒤로 南平壤(남평양)이라 한 것을 보면, 서울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중요한 요충이자 인구도 많았던 것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다시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면서 漢陽郡(한양군)이라 했으니 한양의 명칭이 붙은 최초이다.
고려 시대에 들어 수도를 開城(개성)에 두었지만 한양으로 천도하자는 주장이 여러 번 있었던 것을 보면 서울 땅이 그만큼 한반도의 요충임을 다시금 알게 한다.
수도 이전은 언제나 정치적 사안으로서 권력투쟁의 산물이다. 고려 시대나 저번 노무현 정부 당시의 세종시 이전 건도 동일한 맥락이라 하겠다.
고려 숙종 때에도 풍수의 대가인 道詵(도선) 국사가 남긴 말이다 하면서 한양으로 천도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고, 이에 왕은 여진을 정벌한 윤관을 시켜 한양 땅을 놓고 도읍 이전 가능성을 조사한 보고를 올리게 한 적이 있다.
당시 또 고려 말의 공민왕 때에도 왕의 총애를 받던 승 보우가 讖書(참서)를 가지고 말하기를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 36 개 나라가 조공한다’고 주장해서 한양의 궁궐을 크게 수리한 적이 있다.
이처럼 이성계의 조선 건국 훨씬 이전부터 한양은 이미 유력한 도읍 후보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이성계는 나라를 새로 열고 참신한 기운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서 도읍 이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양 건은 너무나 뻔하고 식상하다 싶었는지 계룡산을 직접 가서 탐사도 했다.
하지만 결국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 두었으니, 어쩌면 계룡산은 처음부터 이성계의 심중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려사에는 한양, 오늘의 서울에 대해 아주 간략하고도 정확한 평가가 실려있다.
북쪽으로 화산을 의거하고, 北據華山(북거화산), 남쪽으로 한수에 다다르고, 南臨漢水(남림한수), 토지가 평탄하고, 土地平衍(토지평연), 백성들이 번화하다, 富庶繁華(부서번화).
여기서 華山(화산)은 북한산을 말하는데, 실로 더 이상의 묘사가 필요치 않는 서울의 모습이다.
사실 고려는 수도를 개성으로 정했지만 그것은 고려의 권력 기반이 그곳에 있었던 까닭이고 실은 한반도 전체를 놓고 보면 애초부터 객관적으로 서울 땅이야말로 더 없는 적격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한양에 터를 잡고 궁궐을 짓는 건을 놓고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니 무학 대사와 정도전의 경쟁에 관한 說話(설화)이다.
무학 대사는 처음에 인왕산을 등지고 白堊(백악)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해서 궁궐을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에 정도전이 ‘예로부터 제왕들은 모두 南向(남향)으로 앉아서 정사를 보았지 東向(동향)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반대했다는 것이다.
인왕산을 등지면 궁궐의 방향은 東向(동향)이 되는데 이렇게 방향을 잡은 적은 고금에 없었으니 정도전의 말이 극히 타당하다고 하겠지만 실은 무학과 정도전 사이에 그런 경합이 있었는지조차 불확실하다.
그리고 무학은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 년 뒤에 내 말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 했는데,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과연 그 말이 영험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런 설화를 전하고 있는 책은 五山說林(오산설림)이란 책인데, 이 책이 지어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일이라 신빙도가 떨어진다.
더 나아가서 무학 대사가 한양을 점지했다는 얘기 역시 역대로 한양은 언제나 가장 유력한 후보지였다는 점에서 그 또한 근거가 약한 얘기이다.
정리하면, 무학 대사가 이성계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 고승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양을 점지했다는 것이나 궁궐터를 잡을 때 개입하거나 방향을 동향으로 하자고 했다는 것은 사실 모두가 근거가 약한 전설이라 하겠다. 아마도 그냥 정신적인 사부였고, 좋은 자문역이지 않았나 싶다.
이처럼 서울은 대한민국의 중심이고 최고의 名勝(명승)이다.
그런데 한경지략을 읽다보면 울분이 치밀곤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
서울의 행정구역 명칭과 관련하여 실로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한양은 성곽도시로서 도성 내는 처음부터 계획도시였다.
그래서 행정구역의 명칭도 坊(방)으로 되어있었는데 이것이 어느 세월에 洞(동)으로 변해버렸으니 크게 잘못 되었다.
坊(방)이란 한자를 보면 땅 土(토)에 네모질 方(방)이 결합되어 있다. 이는 오늘 말로 사각형 블록을 의미한다. 계획도시에서 길이 동서로 그리고 남북으로 교차하다보면 자연히 그 사이는 네모난 형태로 될 것이 당연하다.
방이란 명칭은 중국 당나라 수도 長安(장안)이 계획도시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네모난 작은 행정구역을 坊(방)이라 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즉 방이란 하면 잘 설계된 계획도시의 행정구역을 뜻한다.
그러나 洞(동)은 문자 그대로 洞窟(동굴)의 머리글자이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洞(동)이란 명칭을 써오긴 했지만, 그것은 계획도시의 행정구역이 아니라 산과 산 사이에 개울이 흐르는 곳에 있기 마련인 마을이란 뜻이다.
따라서 수도 한양의 경우 도성 안은 기본적으로 坊(방)이란 명칭을 붙였지 洞(동)은 관례상 극히 일부에 제한되었다. 아니면 방 안에 있는 더 작은 명칭으로나 썼을 뿐이다.
한경지략을 읽다보면 ‘어느 건물은 어느 방에 있다’는 식으로 적혀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훈련도감은 여경방에 있고, 장생전은 북부 관광방에 있다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도성 안의 네모난 행정구역은 모두 방이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방이 사라지고 동이 되어버린 것이니 수도 한양을 동굴 도시로 격하시키고 말았음이 아닌가!
자료를 찾아보면 1910 년 한일 병합 이후, 한양을 ‘경성부’라 하고 또 1913 년에는 서울의 모든 소 행정구역을 일제히 洞(동)이라 개칭하면서 그렇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행정명칭을 동굴의 洞(동)을 쓰는 것은 심히 사리에 맞지 아니하고, 그 이면에는 은근히 격하하려는 생각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日帝(일제)가 그렇게 한 것은 그렇다고 하겠지만, 더 이상한 것은 해방이 된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이 동이라는 퇴행적인 명칭을 계속 사용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니 대도시인 서울에 여태껏 무슨 동굴 명칭을 쓰고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동굴이라 하니 나름 낭만적인 느낌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이라도 동이란 것을 떼어버리고 방이란 하면 떳떳하고 좋을 것을, 일제잔재를 씻어낸다더니 왜 이 좋지도 않고 창피하기만 한 洞(동)이란 명칭의 잔재는 그냥 두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이 글을 쓰다가 그래 한 번 해보자 싶어 서울시청에 건의를 인터넷으로 제출했다. 예전에도 다른 정부 부처에 건의한 적이 한 번 있었지만 당담자가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그만 두었다.)
한경지략을 읽다보면 재미난 것이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서울 충무로 지하철역 근처의 중국 필동은 조선 시대 南部(남부)-지금의 구청과 같다-가 있다 해서 部洞(부동)이라 했는데 부가 붓과 비슷해서 붓동이 되고 다시 한자가 筆洞(필동)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구 태평로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太平館(태평관) 있었기에 지어진 명칭이다. 또 홍제동은 중국 사신들이 서울로 들어오기 전에 여독을 풀기 위해 마련된 弘濟院(홍제원)이 있던 자리라서 그렇다.
경치 좋은 삼청동은 옛날 도교사원인 ‘삼청도관’이 있던 자리라서 붙여진 것이고, 삼청동 밑에 있는 팔판동은 여덟 판사가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만리동은 만리재 고개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나아가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반대하다가 감옥에도 갔던 ‘최만리’가 살았던 동네가 유래라 한다.
그리고 市廛(시전) 편도 아주 흥미롭다. 시전이란 시장을 말한다.
다양한 상점들이 있는데 품목마다 일종의 부가세라 할 수 있는 세율이 모두 다르게 정해져 있었다.
가령 면포를 파는 포전은 세금이 5 %, 종이를 파는 지전은 7 %, 담배를 파는 연초전은 5 %, 신발 가게는 2 %, 쌀을 파는 싸전은 성문 안은 3 %, 문 바깥은 2%, 서강 근처의 도선장 근처는 면세였는데, 당시로선 교통이 멀었기에 그랬던 모양인 것도 같고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 지도 모른다.
또 재미난 점은 돼지고기 가게 사람들은 國喪(국상)이 나면 탈을 쓰고 잡귀를 쫓는 일을 의무적으로 맡아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고기 가게는 이름을 매달 縣(현)을 써서 懸房(현방), 즉 고기를 매달아놓고 파는 가게라는 뜻인데, 도성 안팎에 모두 23 곳이 있었고, 성균관의 태학생들을 먹이는 일을 하는 奴僕(노복)들의 특권 사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한약재 상점들이 동대문 제기동에 있지만, 예전에는 을지로 1가와 2가인 구리개, 銅峴(동현)에 밀집해 있었다고 한다. 전에 을지로 입구에 있던 인삼판매점인 개성상회가 그 흔적이었다.
이 정도에서 맺을 까 한다.
어릴 적에 ‘학교가 책장사를 한다’며 투덜대던 기억이 오늘에 새롭다. 철 없던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다 보니 교정에 피던 라일락 그 향기가 문득 그리워진다. 봄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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