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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客(논객)의 시대 빨리 저물고 論主(논주)의 시대여 어서 오라

◆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2. 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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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客(논객)의 시대 빨리 저물고 論主(논주)의 시대여 어서 오라

2011.1.30 호호당의 김태규님

 

 

길에서 몇 마디 주어들은 것을 다시 길에서 떠들어댄다는 말이 있다. 다름 아닌 孔子(공자)님이 남긴 말씀, 道聽塗說(도청도설)이 그것이다. 道(도)와 塗(도) 모두 길이란 뜻이니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다가 된다.

 

공자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 걸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는 무려 2500 년 전 사람이고 주위를 둘러보면 지금도 사람들은 길에서 듣고 길에서 떠들어대는 것을 보니 인간은 변함이 없고 또 변할 까닭도 없다.

 

다만 듣고 또 말하는 장소가 예전에는 길이었고 오늘날에는 인터넷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메신저 그리고 트위터나 페이스 북으로 말이다.

 

民主化(민주화)란 무엇보다도 마음껏 수다를 떨 수 있고 내키는 대로 流言蜚語(유언비어)를 만들고 흘려도 되는 사회제도가 아닌가 싶다. 얼마 전 법원의 판결도 그렇게 나온 것을 보니 더욱 그렇다.

 

난 유언비어라는 말을 싫어한다. 뭐 내가 신중하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세 번째 글자 蜚(비)가 ‘바퀴벌레’를 뜻하는 한자인 까닭이다. (난 바퀴벌레를 엄청 싫어한다.) 다시 流言蜚語(유언비어)란 말을 살펴보자. 정처 없이 흘러 다니는 말이 流言(유언)이고, 蜚語(비어)는 바퀴벌레끼리 주고받는 대화라는 뜻이다.

 

수입산 쇠고기 먹으면 머리에 구멍이 난다는 겁나는 말이 도화선이 되어 2008 년 온 나라가 난장판이 되었었다. 당시 나는 광화문 광장 근처를 지나다가 고함을 치며 돌아다니는 군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했다.

 

쇠고기가 사실 별 탈이 없을 것이라는 거 뻔히 알면서도 그저 주는 것 없이 밉기만 한 ‘쥐박이’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눈앞의 현실이 얼마나 싫으면 저토록 난장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눈앞의 현실이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우리 내부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어서 익명이 되고 가명이 되기만 하면 사람이 저처럼 될 수 있는 것일까? 성난 목소리의 그들을 바라보면서 내 머릿속은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 ‘이명준’은 廣場(광장)을 소망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말하고 또 서로의 생각을 인내하면서 들어주고 마침내 소통할 수 있는 진정한 廣場(광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다가 남지나해에 몸을 던졌다.

 

1960 년에 발표된 소설 ‘광장’에서 최인훈 씨가 갈망했던 그 ‘광장’은 2008 년 아름답게 꾸며진 광화문 광장에서도 여전히 不在(부재)하고 있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말하고 속내를 다 시원히 끄집어내려면 그 많은 말들을 들어주는 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忍耐(인내)가 필요하다.

 

입장과 정보, 식견과 경험이 다른 사람들이 광장에서 한꺼번에 소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천명이라면 그들 각각 한마디씩만 말을 해도 천 마디 말이 될 것이니 그걸 또 누군가는 들어주어야 한다.

 

누군가는 ‘길거리 민주주의’를 구현하자고 했지만 사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주장하는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너는 일단 침묵하고 내 말부터 들어라 하면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면서 자기 말부터 들어주지 않으면 소통이 안 된다 하면 그건 또 무슨 소통인지 참 알 도리가 없지 않은가?

 

대화를 싸움 또는 배틀(battle)이라 여기는 것이 오늘의 시대정신이다. 그러다보니 말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명예를 싣는 論主(논주)는 없고 아니면 말고 식의 論客(논객)들만이 말을 하는 세상이다.

 

논객들의 말은 내용을 떠나 우선 銳利(예리)하고 날카롭다. 일단 찌르고 먼저 쑤시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이 상대의 가슴 속에 상처를 크게 남기면 남길수록 잘 했다 여기고 승리했다 여기는 것 같다. 아군의 박수 소리 들려오니 거기에 도취되어 상대방을 어떻게 해놓았는지는 생각도 들지 않나 보다.

 

요즘 세태는 분석이 예리하고 날카로우면 그것을 두고 잘 한다는 풍조가 주를 이룬 지 오래이다. 비판받는 상대방이 그 예리하고 날카로운 비판에 얼마나 傷心(상심)하게 될 것인지는 차후의 문제인 세상이다.

 

모두들 집에서 아내가 끓여준 찌개에 대해서는 간이 맞지 않고 맛이 없어도 한 마디 말도 못하는 양반들이 어쩌다 토론이나 대화에 나서기만 하면 그토록 무섭고 흉흉한 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건 또 약과에 지나지 않는다, 익명이나 가명만 보장되면 예리나 날카로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대를 원천에서부터 부정하고 저주를 아낌없이 퍼부어댄다,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말은 魔力(마력)을 지녔다. 그 마력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정도로 강하다. 날아오는 주먹이나 칼날은 몸으로 피할 수가 있지만 귀로 들어오는 말을 미처 막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말은 날카롭고 독하며 상대의 말은 개무시할 수 있는 논객,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의 그런 논객을 인터넷 워리어, 즉 戰士(전사)라고 하는 세상이다.

 

그런 일에 중독이 된 사람들은 그를 그저 UFC 종합 격투기 게임 정도로 즐기는 것 같은 세상이다. 로마 시대 검투사간의 결투를 즐기고 황제가 마지막에 엄지를 거꾸로 하면 패한 검투사를 殺處分(살처분)하는 것이 대중오락이었던 것과 지금의 세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민주화가 된 세상이다. 역사의 분명 발전이라 치자. 하지만 좀 부드러운 민주주의 좀 하면 안 되겠니? 소프트 앤 마일드 데모크라시 좀 해보면 어떻겠니? 파리 바게트에 가면 부드러운 생크림 바른 빵도 많더구만.

 

사나운 論客(논객)의 시대여 어서 가기를, 부드럽고 진지한 論主(논주)의 시대여 어서 오기를. 조용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진지하게 소통하는 시대여, 최인훈의 광장, 이명준의 광장이 열리는 날이 어서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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