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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1. 2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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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日(휴일)의 自問自答(자문자답)

2011.1.22 호호당의 김태규님

 

 

토요일이면 나는 늦은 ‘아점’을 먹은 뒤 정오가 조금 지난 무렵에 작업실로 나온다. 헝클어진 책상 앞에 앉으며 엄지발가락으로 컴퓨터 전원을 올린다. 증시 트레이딩과 글쓰기, 그림 그리기, 사람 만나기, 주간의 번잡한 일들이 끝났으니 그저 한글 워드를 화면에 올려놓은 채, 빈 화면과 대화를 시작한다.

 

방형의 글쓰기 화면은 마치 하얀 종이와 같다. 빈 원고지일 수도 있고, 붓이 닿지 않은 그림 종이이기도 하다. 글은 자판으로 그리는 그림이고, 그림은 붓과 색으로 칠하는 글이기도 하다. 빈 모니터를 한참 바라보다 자리를 옮겨 현관 쪽의 방에 펼쳐놓은 화선지 앞에 서기도 한다. 붓을 매만지다가 흥이 일지 않으면 다시 모니터 앞에 돌아와 앉는다.

 

그리곤 담배를 한 대 빼물곤 한다. 공기 속으로 번져가는 연기를 응시하다가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시선이 가면 우뚝 선 붉은 벽돌의 교보빌딩과 만나게 된다.

 

바벨 탑, 혹은 지구라트,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잠시 巨石(거석)숭배자가 되었다가 다시 빌딩 위의 푸른 겨울하늘을 보며 上天(상천)을 숭배한다.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신다. 들이마시고 내쉬니 이는 氣功(기공)체조이다, 功力(공력)이야 쌓일 리 없겠지만. 나는 이 토요일 오후 내 작업실에서의 시간을 몹시도 즐기는 것이다.

 

인터넷을 보니 박완서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한다. 늘 하던 대로 그분의 생년월일을 알아보고 그 분의 운명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올해 가실 수도 있는 때이구나, 하지만 2-3 년 더 머물다 가셔도 되셨을 터인데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은 속으로 슬픔이 많은 까닭이었으리라는 생각에 잠시 哀悼(애도)의 시간을 가져본다. 가신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처 다 풀어놓을 수 없었던 슬픔에 대하여 잠깐이나마 기도를 올린다.

 

아침 화장실에서 읽은 老子(노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여리고 연하다’는 말, 뻣뻣하고 단단한 것은 모두 죽은 것이라는 對句(대구)와 함께. 늘 대하다보니 외우다시피한 글귀지만 또 늘 새롭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강인하고 굳세다. 강인하고 굳센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老子(노자)의 말대로라면 그건 좋은 것이 아니다. 그건 죽은 것에 가깝다.

 

어느 말이 옳은 것일까 하는 의문을 늘 가지고 산다. 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아마도 수백 번도 더 그랬을 것이고 그때마다 약간씩은 다른 결론을 내린다.

 

갓 태어난 아기는 여리고 연하다. 그러니 여리고 연한 것이 더 좋고 살아있는 것이란 말이 실로 옳다. 하지만 아기는 돌보지 않으면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 여리고 연한 것이 꼭 옳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나이가 들고 이런저런 시련을 겪은 이는 굳세고 강인하다. 누군가의 돌봄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강인하고 굳센 것은 좋고 옳은 것이다.

 

하지만 굳세고 강인한 것은 고생을 겪었다는 것이니 그게 또 그다지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강인하고 굳셈이 지나치면 억척스럽고 또 모질어지니 그렇다. 누가 당신더러 어쩜 그렇게 모지고 억척이냐고 말한다면 당신 마음이 좋겠는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는 말, 애국가에 들어있는 말이다. 落落長松(낙락장송)이 그것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오랜 세월의 風霜(풍상)을 겪어 표면은 거칠고 굳세다. 하지만 마침내 살아남아 남쪽의 따듯한 햇빛을 받으며 의젓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남산 저 소나무, 길게 가지를 드리운 저 소나무는 굳센 소나무인가 아니면 속은 여전히 여리고 생기로운 소나무인가?

 

오늘의 내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에 오늘의 대답은 바로 이거다. 우리는 비록 풍상을 겪으며 굳세고 강인해질 지라도 속은 어디까지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여리고 부드러워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모진 상황에서 슬기롭게 대처함이 마땅하지만 속은 어디까지나 有情(유정)하고 柔情(유정)해야지, 강팍하고 뻣뻣해지면 그건 살아도 죽은 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대여 아기처럼 天眞(천진)하고 爛漫(난만)하시게나, 하지만 토끼가 굴을 세 개 지니고 여우가 바람 속에서 냄새를 맡듯 그대도 슬기롭고 영리하시게나.

 

세월 속에서 꺾이지 아니하고 마침내 양지바른 남산 언덕에 우뚝 서서 무성한 가지를 落落(낙락)하게 드리운 長松(장송) 되시게나. 그리하여 여름날 당신의 그늘에 아이가 찾아들면 함께 천년의 童話(동화)를 나누시게나.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야 한다. 당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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