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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론의 자부심

◆의사결정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23. 6. 1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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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의 자부심

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023. 06. 17

 

 

처음 한 사람이 옷을 입었고 이후 모든 사람이 옷을 입게 되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었다. 인간이 육체의 옷은 입었지만 정신의 옷은 입지 못하고 있다. 육체의 벌거숭이는 면했지만 정신의 벌거숭이는 면하지 못하고 있다.

    공자는 군자와 소인으로 갈랐다. 말을 하고 옷을 입었다고 해서 다 사람인 것은 아니다. 정신의 옷을 입어야 사람이라는 가르침이다. 구조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간극은 크다. 생각하는 기술을 익혀서 정신의 벌거숭이를 면해야 한다.

    구조론은 확실한 한 가지를 알게 한다. 그것은 당신이 벽을 등지고 서 있다는 사실이다. 등 뒤는 안전하다. 당신은 앞을 봐야 한다. 당신은 실마리를 잡았다. 실 뒤는 없다. 앞으로 풀어가야 한다. 당신은 정상에 서 있다. 더 올라갈 곳은 없다.

    막대기의 가운데를 잡으면 양쪽에서 흔들어대므로 피곤하다. 구조론은 한쪽 끝단을 잡고 한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것이다. 구조론은 기초와 토대와 근거와 단서와 방향성을 제공한다. 발판은 주어졌고 추진하는 힘은 당신이 만들어야 한다.

    옷은 자신을 방어하므로 의지가 된다. 말을 하면 동료에게 의지할 수 있다. 등 뒤에 벽이 있으면 의지가 된다. 정신의 옷을 입으면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간할 수 있으므로 의지가 된다.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면 자부심을 얻는다.




    비대칭성

    막대기의 가운데를 잡으면 양쪽에서 흔들어대므로 피곤해진다. 끄트머리를 잡아야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뱀의 머리를 잡아야 물리지 않는다.


    엉킨 실을 풀려면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실의 중간을 잡으면 풀어놓은 만큼 도로 엉킨다. 실의 중간은 좌우가 있다. 실의 머리는 좌우가 없다. 실마리는 비대칭성을 가진다.

    벽을 등지면 뒤가 없다. 정상에 오르면 위가 없다. 골키퍼는 뒤가 없다. 축구의 후방 빌드업은 골키퍼에게서 시작된다. 비대칭성에서 사유의 빌드업을 시작할 수 있다.

    건물의 기초는 아래가 없다. 건물은 위로 쌓아올릴 뿐 아래로 지어내려가지 않는다. 건축의 비대칭성을 우리는 기초라고도 하고 기본이라고도 한다. 기준이라고도 한다.

    처음 착수하는 것이 있다. 첫 단추를 꿰는 것이다. 단서端緖라고 한다. 오늘날 문명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단서를 잘못 잡았기 때문이다. 실마리를 잡고 풀어야 되는데 중간부터 풀기 때문이다. 뱀의 허리를 잡다가 물렸다.

    기본은 무엇인가? 기초는 무엇인가? 기준은 어디인가? 근거는 무엇인가? 단서는 무엇인가? 손잡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대칭성이다. 비대칭성은 뒤가 없다. 북극의 북쪽은 없다. 더 물러날 수 없는 곳에서 배수진을 치고 대반격작전은 시작된다.


    지식의 어미

    글을 쓰려면 백지가 준비되어야 한다. 백지에 아무 것도 씌어져 있지 않으므로 무엇이든 쓸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근원의 비대칭성이다.


    지식의 기초는 무엇인가? 원자론을 말할 수 있다. 원자는 쪼갤 수 없다. 그러므로 단서가 되고 기초가 된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쪼개진다. 원자가 쪼개지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그런 것은 없다.

    쪼갤 수 없는 것은 자궁이다. 원자는 자궁에서 합성된 아기다. 원자는 쪼개진다. 자궁은 쪼갤 수 없다. 자궁에서 아기가 나올 수는 있지만 아기가 자궁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비대칭성이야말로 모든 것의 기초가 되고, 기본이 되고, 기준이 되고, 근거가 되고 단서가 되고 실마리가 된다. 거기서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우주에 가득 들어찬 것은 변화다. 변화의 자궁은 에너지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어야 한다. 태초에 에너지가 있었다. 에너지는 움직인다. 움직이면 충돌하고, 충돌하면 간섭되고, 간섭되면 멈추고, 멈추면 형태가 만들어진다. 질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우주는 널리 이루어졌다.

    우리가 보는 사물의 형태는 에너지가 교착되어 나란해진 것이다. 에너지는 멈추지 않는다. 움직임이 나란할 때 관측자에게는 멈춘 것처럼 보일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움직임과 속으로 숨은 움직임이 있을 뿐 우주는 움직임으로 가득차 있다.




    구조를 보다

    세상은 구조로 설명되어야 한다. 구조는 존재의 자궁이다. 모든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다. 만유가 공유하는 의사결정의 플랫폼이다. 구조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성립하는 존재는 없다.


    구조는 대칭성과 비대칭성을 동시에 가진 것이다. 구조는 비대칭성의 활로 존재의 화살을 쏜다. 우리가 보는 것은 과녁에 맞은 화살이다. 그것을 쏘는 활은 찾지 않는 것이 인류문명의 맹점이다.

    원자는 에너지라는 활이 쏘아보낸 화살이다. 세상은 화살의 집합이 아니라 활쏘기의 복제다.

    화살은 제각각 다르지만 활은 같다. 백만 개의 화살이 하나의 활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무릇 지식이라는 것은 화살을 발견하고 그것을 쏘아보낸 활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름을 발견하고 그것을 복제한 같음을 추적하는 것이다.

    형제는 달라도 엄마는 같다. 존재의 엄마를 찾아가는 것이 지식이다. 그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추적하는 것이며 대칭성의 고리를 추적하여 비대칭성의 실마리에 도착했을 때 마침내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존재의 중간 연결고리는 대칭성을 가지고 최초 실마리는 비대칭성을 가진다. 우리가 아는 지식은 선과악, 흑과 백, 진보와 보수처럼 대칭성을 가진다. 모든 대칭되는 것은 중간 전달자다. 최초 결정자가 아니다. 존재의 자궁이 아니다. 어미가 아니다.

    대칭을 보고 무엇을 알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대칭은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대칭은 중간 연결고리에 불과하다. 최종 보스를 찾아야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대칭성에 이르러야 한다. 에너지의 통제권은 그곳에 있다.




    같음과 다름

    다름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름은 그냥 눈으로 보면 된다. 우주 안에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다르다고 말하면 된다. 최소한 장소와 시간은 다르기 때문이다.


    외부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외부는 눈으로 관찰하면 된다. 변화는 내부에서 결정된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모순이고 모순은 둘의 충돌에 의해 일어나며 충돌의 접점은 내부다.

    불변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불변은 눈으로 보면 된다. 변화에 내가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가 가만 있는 나를 흔들어대기 때문이다. 불변은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변화.. 인간을 흔들어 대므로 대응해야 한다.
    내부.. 변화의 경로는 충돌하는 둘 사이의 내부가 결정한다.
    같음.. 변화는 같음에서 다름으로 가는 일방향으로 일어난다.


    설명해야 하는 것은 변화다. 설명해야 하는 것은 내부다. 설명해야 하는 것은 같음이다. 이 세 가지에 공통되는 것은 비대칭성이다. 지식은 비대칭성을 아는 것이다. 변화의 일방향성을 아는 것이다.

    안정은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외부는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름은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다르기 때문이다.


    개와 고양이를 한 방에 두어도 새끼가 생기는 일은 없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외부는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안정은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는 내부를 찾고 같음을 찾고 변화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존재의 자궁이다. 구조를 알았다면 모든 것은 내 손 안에 있소이다 하고 큰소리 칠 수 있다. 적어도 이 범위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렇다면 벽을 등진 셈이다. 의지할 수 있다. 단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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