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통은 어쩔 수가 없다
전생에 죄가 많아 이 고생을 하는구나,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처럼 가혹한 벌을 받는가? 이런 말들을 할 때가 있다. 이는 불교의 영향이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에선 살면서 받는 고통에 나름의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시련과 고통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으며 이에 보다 더 많은 반성과 회개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의미부여와 해석은 이른바 고등종교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속 신앙을 비롯해서 전 세계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줄여 말하면 아파트 개발할 때 수 백 년 된 신령한 나무를 함부로 베고자 나서는 이는 없다.
삶이 기본적으로 투쟁이기에 고통 또한 기본이다.
우리가 살면서 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은 무수히 다양하다. 산다는 게 평생에 걸친 투쟁이고 따라서 고통을 받게 될 원인과 계기 또한 무수히 많다. 내 욕심 차리느라 누군가에게 알게 모르게 미안한 행동을 하게 되는 삶이다. 삶은 투쟁이 기본이니 고통 또한 기본이고 또 당연하다.
고통이 어차피 주어질 수밖에 없다면 남는 건 그 고통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느냐 또는 堪耐(감내)하느냐이다.
당신이 보통의 종교적인 사람이라면 懺悔(참회)하거나 반성, 또는 회개함으로써 고통을 받아들일 것이다. 때론 자신이 믿는 신에게 “저는 억울합니다, 아무 죄가 없습니다” 하고 강력하게 탄원하고 호소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정말로 억울한 일이라면 신은 나중에 당신의 억울한 고통에 대해 나름 더 큰 보상을 내릴 것이란 기대를 하기도 한다.
당신이 무속적 믿음을 가졌다면 고사를 하거나 살풀이의 해원 또는 씻김굿을 통해 신을 달래거나 망자를 위로함으로써 이후의 편안함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약간 더 투쟁적인 사람이라면 고통을 야기한 내 주변과 환경 나아가서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주변 사람들을 규합해서 고발하거나 싸워서 바꾸고자 할 것이다. 이게 가장 현대적인 방식이긴 하다. 여기에 특히 기독교적인 믿음까지 있다면 진보의 鬪士(투사)가 될 가능성도 있다.
힌두인들이 제시한 기막힌 해결책, 카르마
불교적 신앙을 가졌다면 투사가 되긴 어렵다. 불교는 힌두교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성립된 구원의 종교이기에 그렇다, 힌두교는 고통의 원인에 대해 이른바 카르마 즉 業(업)이란 개념과 더불어 윤회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지금 고통을 받는 것은 이생 어쩌면 前生(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다, 따라서 군소리 없이 받아들여라, 그리고 이번 생에서라도 반성하면서 찍-소리 하지 않고 인내하며 살 것 같으면 다음 생엔 좀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날 수 있다, 이게 바로 힌두교에서 제시하는 해법, 영혼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윤회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카르마의 因果律(인과율)이다.
그러니 불교 또한 業障(업장)을 지었기에 이생에선 업장소멸에 집중하라고 가르친다. 업장 소멸을 통해 그간의 나쁜 업이 극히 희미해질 경우 이생에서 바로 해탈과 열반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니 불교를 가진 자는 별로 투쟁적이지 않다.
사실 고대의 儒敎(유교)라는 것 역시 하늘의 이치를 주장하면서 잘못을 저지르면 하늘이 노하고 벌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신유교가 등장하면서 하늘보다는 修身(수신), 즉 스스로를 엄격하게 관리하라는 쪽으로 비중을 옮겼을 뿐이다.
아무튼 모든 종교와 가르침은 함부로 타파하기 힘든 나름의 치밀한 논리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무조건적인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논리는 지극히 정교하다. 종교 쪽에서 볼 때 역사상 가장 天才(천재)가 아닐까 싶다.
다만 천재 싯다르타의 가르침 역시 힌두교를 배경으로 한 탓에 시작부터 하나의 커다란 비약이 있으니 죽으면 또 태어나고 또 죽기를 반복하는 윤회를 전제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윤회를 전제하는 것은 싯다르타의 억지 주장이라기보다는 당시 힌두교가 둘러싼 역사적 배경 탓이다. 그리고 싯다르타가 가르친 것은 그 윤회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날 것이냐 하는 방법론인데 그건 정말 탁월하기 짝이 없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이란 결국 이번 생에 고통스런 삶의 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번 생으로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다시는 윤회라고 하는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생 많았어, 네가 제대로 도를 닦았다면 이번 생으로 마치고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아, 땡이야!
그런데 문제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이란 게 욕망을 송두리째 否定(부정)하는 것이니 그를 따라서 실천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그게 너무나도 어려운 나머지 결국 대승불교라고 하는 약간은 시도해볼 만한 쉬운 불교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운명의 법칙을 알아내었지만
나 호호당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선 아무 할 말이 없다,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에 굴러가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대해 그 운동의 법칙을 철저하고도 과학적으로 규명했다. 이로서 기존에 존재하는 여러 잡다한 운명술과 운명학들, 기존의 사주명리학이라든가 서양의 점성술 등과 같은 것은 멀지 않아 한 때 있었던 ‘썰’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향후 백 년이 채 되지 않아서 나 호호당이란 호기심 많은 사람이 발견하고 남기고 간 “자연순환운명학”을 토대로 좀 더 정교한 이론들이 글로벌 차원에서 발전되어 나올 것이라 본다. 미국이나 영국 친구들이 파고들면 큰 발전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자연순환운명학의 관점에서 볼 때도 삶의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운이라면 그런대로 편안하고 무사하면서 때론 기쁜 일도 있지만 그 와중에도 자잘한 고통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힘든 운엔 우울하고 힘들고 고통스런 일들이 더 많지만 그 또한 와중에 작은 기쁨들과 즐거움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삶과 운명의 수레바퀴 또한 고통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참으로 희한하다. 투쟁의 연속이기에 고통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신기하게도 그걸 견디게 해주는 힘과 보상 또는 위안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나 호호당 이제 67년을 조금 더 살았다. 현 시점에서 생각해볼 때 삶이란 두 번 경험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얻는다. 다시 또 태어나 살고 싶진 않다는 것이고 이번 생으로서 충분하다는 얘기이다.
꽤나 전에 살아갈 핑계와 구실로서 목표와 명분을 세웠기에 90까지 살아볼 작정이다. 그러나 이미 나 호호당의 삶은 거의 다 산거나 마찬가지라 여긴다. 20년 조금 더 살겠다는 것이지만 그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고 아울러 과거 20년을 되돌아볼 때 그건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는 인상만 남으니 앞으로의 20년 또한 그렇게 금방 지나갈 것이라 여긴다. 휘리릭- 하고.
우리 스스로가 고통을 만들어낸다
살아있는 한 살아가는 한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스스로가 고통을 만들어낸다. 하느님이나 신이 있어 고통을 내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살려면 주어진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주변으로부터 무언가 영양가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가져와야 하기에 그게 바로 고통의 근본원인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잉여가치와 착취”를 지적했지만 사실 그건 정도의 차이일 뿐이고 우리 모두 매일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고통의 원인이 된다.
태어난 아기는 부모가 가진 번식의 본능을 무기로 부모로부터 착취를 하고 그로서 살아가고 성장한다. 부모의 등골을 우려내는 게 바로 아기들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걸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결혼을 피하고 또 결혼했어도 출산을 꺼려한다. 아기에게 착취당할 자원을 본인들이 누리겠다는 새로운 행태이다. 이게 잘하는 것인지 아닌지 그건 시간이 흘러봐야 알 것이다.
어떤 면에서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이다
어떤 면에서 그리고 내 생각으론 죽음 그리고 소멸이야말로 진정한 救援(구원)이다. 존재하지 않게 되면 존재함으로써 받게 되는 그 어떠한 속박이나 침입, 갈취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싯다르타는 살아서 모든 카르마를 털어내고 가야만 진정한 열반에 들어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된다, 즉 윤회로부터 벗어난다고 가르쳤지만 솔직히 과학적으로 볼 때 윤회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없다. 근거 없는 것을 믿는다는 건 그 자체로서 도박이고 베팅이다.
이에 싯다르타가 말한 구원이란 것 역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 그리고 세상에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약속인데 사실 깨달음을 얻지 않고 죽어도 다시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넉넉히 있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은가? 하는 얘기이다.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을 영접하고 살다가 죽으면 하느님의 나라로 간다고 하지만 그 역시 전혀 증거가 없다.
하느님을 믿든 싯다르타의 약속을 믿든 아니면 믿지 않든 죽으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하니 구원은 이미 약속되어 있고 예정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윤회가 진실이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 놈은 내장을 싹 지운 초기화된 컴퓨터와 같아서 그 놈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은가.
이 쯤 되면 지금 내가 하는 얘기는 사실 카라마조프의 형제란 소설에 나오는 둘째 아들 ‘이반’의 생각과 같아질 위험성도 있다. 철저한 무신론적 합리주의자인 그는 결국 다 죽기 마련이다, 영혼이나 不死(불사)는 없다, 따라서 사는 동안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非(비)도덕주의가 그것이다.
나 호호당은 오래 전 저 소설을 읽었을 당시 이반이 보여준 행태와 생각에 대해 꽤나 고민했으나 결코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한 번 사는 거 잘 살고 잘 즐기면 장땡이란 저 생각, 엄밀히 말하면 그게 정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 충격으로부터 지금도 자유롭지가 않다.
하지만 무신론적 합리주의와 도덕적 자유주의에 빠져들긴 아무래도 쉽게 내키지가 않는다. 머리는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머리와는 조금 다른 무엇, 즉 마음에선 그건 아니야! 라고 일러주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보고 따져들고도 싶지만 이미 너무 많이 살았다는 생각, 그냥 이대로 살다 가지 뭐! 하는 생각이 앞선다. 삶은 이미 관행이 되었으니 말이다.
개멋진 프리드리히 니체
싯다르타의 제자인 쇼펜하우어는 인생이란 살아볼 가치가 없는 것이라 인정했고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스승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순순히 수긍하기 싫었던 니체는 힘들지언정 수동태로서의 삶은 싫어, 난 스스로 내 삶을 정할 거야 하고 하면서 “권력에의 의지”를 주장했다.
니체가 멋지긴 하다, 정말 개멋지다, 아우라가 쩐다. 마음껏 나를 패봐라, 난 맞을게, 하지만 삶의 고통 앞에 무릎을 꿇거나 회개하는 일 따윈 절대 없을 거야 하고 바락바락 악을 쓴 니체. 독한 놈!
하지만 우리 모두 어중띠기이다. 나 호호당 역시 끝까지 어중띠기로 살 작정이다. 긴가민가 혹시나 하면서 끝까지 애매한 채로 밀고 갈 작정이다.
어중띠기로 살아볼 밖에
고통이란 것 최대한 피해볼 작정이고 그러면서도 욕망을 눈치껏 부려볼 작정이다. 숭고한 욕망이든 비열한 욕망이든 욕망은 결국 욕망일 뿐이지만 내 속에 있는 양심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기준에 따라 욕망을 부릴 생각이다. 그러다가 고통을 받게 되면 후회도 하고 자책도 해가면서 살아갈 것이다. 결국 죽음이란 구원이 발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다.
최근 몸이 여기저기 좀 아픈 곳들이 생겨서 불편하다. 노화에 따르는 고통이다. 생전 가지 않던 병원에도 어쩔 수 없이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동영상 찍느라 氣(기)도 많이 빨린다.
동영상을 만드는 까닭
그 바람에 글이 많이 뜸해졌다. 사실 동영상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라 깊이를 줄 수가 없다. 말을 시작하자마자 마무리를 해야 한다. 사실 동영상을 하게 된 건 노화 때문이다.
일단 짧은 영상으로 구독자 수를 좀 늘려놓은 다음에 깊이 있는 진지한 얘기를 해보기 위함이다. 짧은 것을 보시든 긴 것을 보시든 선택하게 할 생각이다. 아예 처음부터 진지하고 긴 시간의 얘기를 동영상으로 한다는 것은 너무 시청자가 없을 것 같아서 이런 방식을 택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나 호호당이 오랜 연구를 통해 알아낸 것들이 꽤나 많은데 그걸 글로 옮기자니 힘이 들고 그나마 동영상으로 남겨 놓으면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오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 동영상을 한다.
물론 그 빛을 본다는 것이 나 호호당의 영달이나 이익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런 것은 넘어선 지 오래이다. 큰 눈에서 보면 그건 인류의 공동 자산일 수 있기에 그렇다.
그래도 아무튼 길어도 일주일 간격으로 글을 올릴 생각이고 그렇게 노력할 것이다. 독자들의 성원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