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 정곡을 찌르는 단어
언젠가부터 “존재감”이란 단어가 유행했다. 찾아보니 드라마에 나온 배우가 워낙 돋보이는 바람에 “미친 존재감을 과시하다”, 이런 식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모양인데, 그러다보니 이젠 흔하게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가 되었다.
조직 안에서의 존재감, 존재감을 높이는 방법, 저는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등등 흔히 만나게 된다.
유행어가 다 그렇지만 어법상으론 딱히 옳다 생각되진 않지만 그게 무슨 상관, 다 알아먹고 잘 통용되면 그것으로서 언어는 제 소임을 다한다.
존재감이란 단어를 대하면서 감탄한다, 사람들은 잘도 사물의 본질을 짚어낸다. 존재감, 무척 중요한 단어임이 분명하다.
나 호호당은 사람의 운세 순환에 있어 오래 전부터 존재감에 대해 社會化(사회화)란 단어를 사용해왔다. 소시얼라이즈(socialize)!
이 대목에서 사회화되었다는 것은 사회적 명망이 있거나 사회적 비중을 얻은 사람을 뜻한다. 대표적으론 유명 인사나 셀럽, 그리고 公人(공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지만 속한 조직이나 다양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존재감이 있거나 비중이 있는 사람 또한 여기에 속한다.
운명 순환에 있어서의 존재감
운명 순환에 있어 어떤 사람이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때가 있는데 그 때는 60년 순환에 있어 秋分(추분)의 때이다.
한 해의 순환에 있어 추분은 9월 22일 경인데 이를 60년으로 해보면 입춘 바닥으로부터 30년하고도 7.5년이 경과한 시기이다.
추분이 바로 존재감이 부각되는 때이다.
예를 들면 손흥민 선수는 올 해 2022년이 추분의 때이다. 그 이전에 이미 대단한 선수였지만 올 해 프리미어 리그에서 득점왕이 되면서 이른바 ‘월드 클래스’에 들어섰다. 물론 어떤 축구선수는 추분의 운에 우리나라 프로축구인 K-리그의 1군 선수가 되기도 한다.
이 경우 손흥민과 그 선수는 자질의 차이, 즉 命(명)의 차이라 보면 된다. 흔히 하는 말로 클래스가 다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가면서 참으로 헷갈리게 만드는 것 또한 바로 그런 차이라 하겠다. 옛말로 하면 저마다의 分數(분수), 즉 저마다의 한계와 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분수란 것을 깨닫기란 참으로 어려워서 큰 실수를 하거나 낭패를 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다시 돌아와서 존재감에 대해 얘기해보자.
존재감은 60년 순환에 있어 秋分(추분)으로서 존재감이 확고해지고 冬至(동지)가 되면 시들해지기 시작해서 春分(춘분)이 되면 소멸한다. 그리고 다시 夏至(하지)가 되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네 지점의 간격은 15년이 된다.
우리나라 국운을 예로 들어
이게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우리 대한민국의 지나온 자취를 통해 알아보자.
우리나라는 1964년이 60년 순환에 있어 입춘 바닥이었다. 당시 우리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1972년 壬子(임자)년은 우리 국운의 춘분이었으니 당시 월남전으로 곤욕을 겪던 미국은 주한미군마저 전원 철수하고자 했다. 신생의 대한민국은 당시 미국에게 있어 전혀 영양가가 없는 미미한 후진의 최빈곤국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1987년 丁卯(정묘)년 국운의 夏至(하지)에 이르러 우리는 신흥 제조 강국으로서 발돋움하기 시작했으며 민주화도 동시에 이행했다. 자신감 즉 존재감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15년이 흘러 2002년 壬午(임오)년, 미국은 우리나라를 대우해주기 시작했고 자본시장으로 대거 미국 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에게 있어 이제 대한민국이란 존재가 쓸모가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게 바로 국운의 秋分(추분)이었다. 이 무렵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고 동시에 한일 월드컵 4강에까지 진출한 것 역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데 있어 크게 기여했다. 그 바람에 “한류 바람”도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7년 丁酉(정유)년, 서서히 우리 대한민국의 존재감이 시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기 시작했다. 미국 또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주한미군의 비용을 놓고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해왔으며 중국은 최근 논란이 된 이른바 삼불일한(三不一限)을 내세우면서 우리를 압박해왔다. 더불어 이웃 일본과도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런 면에서 2017년은 우리 주변의 四强(사강),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가 모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우리 대한민국의 존재감이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금년부터 시작해서 10년간 내리막길을 탈 것이다. 그리고 2032년 또 한 번의 春分(춘분)을 맞이하면 참으로 진퇴양난의 窮地(궁지)로 내몰린 채 국제사회 속에서의 존재감이 최저로 떨어질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972년 수준으로 되돌아간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처럼 개인이든 나라든 존재감은 춘분으로서 바닥을 치고 하지로서 되살아나며 추분에 이르러 확고해진다. 그리고 다시 동지가 되면 서서히 퇴조해간다. 이는 바닷가의 밀물과 썰물의 이치와도 같다.
존재감, 신조어이다. 하지만 正鵠(정곡)을 찌르고 있다.
살아있어도 존재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최근엔 외출이 적은 편이지만 나 호호당은 작업실이 강남역 인근이다. 강의 역시 근처에서 한다. 그러다 보니 늘 많은 젊은이들을 오며가며 보게 된다.
저 많은 젊은이들 중에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거나 존재감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니는 경우도 많겠지? 하고 스스로 자문해볼 때가 많다. 강남역 일대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기본적으로 비싼 곳이 아닌 까닭이다. 고급 식당이나 카페는 별로 없다. 그저 몇 만원만 있으면 데이트를 하고 즐길 수 있는 장소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내 앞을 그리고 옆을 스쳐가는 저 젊은이들 중에 그나마 몇 만원의 데이트 비용을 마련하느라 마음 상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젊은이들도 많을 터인데 하는 생각.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지금 존재감이 없는 젊은이라면 아예 강남역 근처에 나올 생각도 못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돈이 없으면 여친 혹은 남친도 없을 것이니 그냥 동네에서 아니면 어느 후미진 구석에서 풀 죽어 지내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젊은이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시각에도 삶이 고단하고 고달파서 그리고 외로워서 혼자 소주 한 병 앞에 두고 먼 하늘을 바라보거나 아니면 하루 종일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잠깐 정신을 차리면 더 외로워져서 다시 일에 몰두하는 중년 그리고 노년의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나!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이 시각 현재 대한민국 5천만 사람 중에 1/4인 1250만 명은 살아있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오랜 만에 글을 쓴다. 동영상 만드느라 바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실 최근 몸이 불편한 것이 더 크다. 늙는 것이 그냥 늙는 것이 아니라 몸도 힘들어져가는 과정이란 것을 새삼 알게 된다.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에 나온 노랫말이 생각난다.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아무도 내 맘을 보려하지 않고/ 아무도”
누구도 내 맘을 보려하지 않는다는 건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숨을 쉬고 살아있어도 존재감을 내뿜고 있지 않으니 그 맘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잘 나가고 있는 사람은 주변에서 더 잘 나가는 사람의 맘을 보려고 할 뿐이고 보통의 사람은 주변에서 존재감이 있는 사람의 맘을 알고자 할 뿐이다. 모두가 잘 되려고 하는 마음이니 주변에 영양가 없는 사람의 맘속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거기에 눈길을 주고 짬을 내줄 여유가 없다. 자칫하면 시간 낭비 돈 낭비가 될까봐 두렵다. 그게 보통의 우리들이다.
잘 산다는 것이란
그러니 정신 차리자.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여유도 있어야겠지만 바로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이들도 빼놓지 말고 작은 관심이라도 기울여야 하겠다. 그래야 사는 게 사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잘 사는 길이라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