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022. 06. 07
변화가 있다. 벡터와 스칼라가 있다. 방향전환과 진행이 있다. 변화와 변화량이 있다. 힘과 운동이 있다. 토크와 마력이 있다.
화살의 머리와 꼬리가 있다. 둘은 하나다. 화살의 머리와 꼬리가 별도로 있는게 아니다. 화살은 하나다. 물고기의 머리가 변화의 방향을 정하면 꼬리가 변화를 진행시킨다. 머리가 벡터라면 꼬리는 스칼라다.
빛은 있고 어둠은 없다. 빛은 광자가 있지만 어둠은 암자가 없다. 우리는 명과 암이 둘 다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둘이 아닌 하나다. 하나의 스위치를 켜서 밝기를 조절한다. 밝기 조절 스위치와 어둡기 조절 스위치가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선은 있고 악은 없다. 악은 선의 실패다. 선의 원소와 악의 원소가 별도로 있는게 아니다. 인간의 사회성이 선이다. 선의 결핍이 악이다. 선이 강하면 악은 희미해지고 선이 약하면 악은 두드러진다. 선이 악을 결정하는 것이다. 악은 선을 결정하지 않는다.
손흥민의 필드골은 선이고 패널티킥 성공률은 악이다. 필드골을 많이 넣으면 악은 잊혀진다. 득점왕이 못되면 악이 도드라진다. 패널티킥 못 넣은게 아깝게 느껴진다. 많은 경우 악을 줄이기보다 선을 늘리는게 더 효율적이다.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게 아니라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은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주변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하인들에게는 친절했다. 히틀러에게 당신은 악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히틀러 주변에 없었다.
바람이 부는게 아니라 부는 그것이 바람이다. 바람이라는 것이 먼저 있고 어떤 이유로 그것이 부는 것이 아니라 부는 메커니즘이 먼저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바람이라고 명명한다.
진보는 있고 보수는 없다. 보수는 진보의 실패다. 이것저것 시도해보는게 진보이고 하다가 잘 안 되면 일단 되는 것 하나에만 집중하자는게 보수다. 보수가 민족주의에서 매국주의로 갈아타는 이유는 보수의 그 어떤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정권만 잡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 알맹이가 없으므로 시류에 편승하여 쉽게 입장을 바꾼다. 적장을 영입하여 대선후보로 내기도 한다.
진보는 벡터고 보수는 스칼라다. 진보는 벡터이므로 노선다툼이 있지만 보수는 스칼라이므로 내분이 없다.
자연의 어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또다른 어떤 이유로 변화하는게 아니라 어떤 변화의 메커니즘이 있고 그것이 한 곳에서 반복될 때 우리는 그것을 존재라고 여긴다.
정靜이 있고 그것이 운동하는게 아니라 동動의 메커니즘이 있고 그것이 제 자리에서 맴돌면 외부 관측자는 그것을 정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내부에 동動을 숨기고 있다. 과묵한 사람이 더 무서운 이유다.
우리는 상대적인 것을 일원론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화살은 두 방향이 아니라 한 방향을 가리킨다. 한 쪽만 바라보고 가면 되므로 편하다. 스트레스가 감소한다.
단점을 줄이고 동시에 장점을 늘리려면 힘들지만 장점을 늘려서 단점을 물타기하기는 쉽다.
내가 운전을 잘해야 하지만 상대방도 난폭운전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운전은 집중하면 되지만 상대방의 난폭운전은 내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화가 난다. 스트레스 받는 것이다. 비싼 외제차를 타면 다들 양보해준다. 남의 운전에 신경쓰지 말고 내 운전에만 집중하면 된다. 스트레스가 감소한다. 외제차의 비유는 이상하지만 일상에서 이와 유사한 경우는 매우 많다.
세상은 대칭이다. 전후, 좌우, 상하, 원근, 내외, 경중, 강약, 음양, 고저, 장단 무수하다. 적군이 두 방향에서 옥죄어 들어오면 일일이 대응하기가 힘들다. 대칭되는 둘이 사실은 하나임을 안다면 일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두 방향의 적을 한 방향으로 몰아서 해결한다. 편리하다.
이것저것 다 잘하는 엄친아가 되기는 힘들지만 많은 경우 한 가지 장점이 도드라지만 다른 것은 상쇄된다. 단점을 줄이는 데 드는 비용이 100이라면 장점을 늘리는 데 드는 비용은 10이다. 일은 몰아서 한 방향으로 풀어가야 한다.
크기는 있어도 작기는 없다. 길이는 있어도 짧이는 없다. 넓이는 있어도 좁이는 없다. 무게는 있어도 가볍게는 없다. 세상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여기에 관측자가 개입하면 두 방향으로 여겨진다. 관측자의 개입을 배제하고 객체 자체의 내부질서를 포착하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보인다. 모든 대칭된 둘은 관측자의 개입에 의한 착시다. 우리는 세상을 잘못 알고 있다.
경운기는 두 개의 클러치로 방향을 전환한다. 왼바퀴와 오른바퀴를 각각 조작해야 한다. 자동차는 핸들 하나로 해결한다. 모든 대칭 2는 서로 연동시켜 상부구조의 코어 1로 바꿀 수 있다. 단 상부구조로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 같은 층위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갤리선은 양 방향의 노로 방향을 전환한다. 노잡이들 간에 손발이 맞아야 한다. 누가 실수를 저지르면 작금의 민주당처럼 노가 엉켜서 고생하게 된다. 범선은 키 하나로 조작한다. 모든 2는 1로 바꿀 수 있다. 뭔가 두 방향에 조치하고 있다면 일머리를 모르는 사람이 일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 잘못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잘못에 힘들어 한다. 도둑이 내 집을 털었다면 그것은 도둑의 잘못이다. 멀쩡한 사람이 도둑으로 전락한 사실 자체가 실패다. 그것은 도둑의 실패이지 나의 실패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실패에 신경쓰지 말고 내 앞가림만 잘 하면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피해자가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사람에서 짐승으로 추락한 가해자가 괴로워해야 하는게 아닌가? 위험의 존재를 집단에 알려서 경고하려는 사회적 본능 때문에 쓸데없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도둑의 존재를 집단에 알리기만 하면 내 할일은 끝이다.
구조론은 대칭된 좌우를 코어로 묶어서 하나의 세트로 만든다. 한 번의 조작으로 둘을 해결한다. 다섯 개의 차원을 묶어서 한 방에 해결한다. 엄마곰을 잡으면 새끼곰은 따라온다. 근원을 해결하면 이후의 전개는 자동이다. 실마리를 잡으면 실꼬리는 자동이다. 바늘은 앞서가고 실은 따라온다. 우리는 바늘만 신경쓰면 된다.
깜깜한 밤길에 홀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자는 룸미러를 보지 않는다. 초보운전자는 룸미러를 주시하며 왜 후방에 아무 것도 안 보이지 하고 두려워 한다. 후방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는게 당연한데 말이다. 이미 지나온 길은 신경쓰지 말고 앞으로 갈 길만 보면 된다. 인간의 많은 실패가 이와 같다. 남의 걱정을 대신 걱정한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괴로워한다.
바둑은 내 집을 늘리고 상대방 집은 줄여야 한다. 내 집을 늘리면 상대방 집은 자연히 줄어 있다. 내 집만 신경쓰면 된다.
세상은 복잡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결과를 바라보기 때문이고 원인의 조작은 단순하다. 하나의 광원을 조작하여 스크린에 다양한 영상을 표현할 수 있다. 광원에서 광자가 나오고, 광자가 피사체와 충돌하고, 그림자가 스크린에 새겨진다. 광원>광자>피사체>그림자>스크린으로 갈수록 복잡해진다. 그저 스위치를 켜기만 하면 해결되는데 스크린에 붓으로 먹칠을 열심히 하는 식의 실패다.
민주당이 자빠진 것은 성비위로 단점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장점이 부족해서다. 달리는 자전거의 속도가 느려지면 당연히 자빠진다. 성찰하고 반성한다며 개혁의 속도를 늦추면 더 망한다.
세상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 둘이 맞물리면 외부에 대해서는 하나로 행세한다. 우리는 코어가 되는 하나에 조치하여 대칭된 둘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은 방향성의 부여다. 스칼라를 벡터로 바꾸고, 운동을 힘으로 바꾼다.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세상은 하나다. 뭔가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굳은 머리가 말랑말랑해져야 한다. 유연함을 얻어야 한다. 방향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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