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022. 04. 13
사이코패스들은 피둥피둥 잘 사는데 우리는 왜 마음을 다치고 힘들게 사는가? 인생에 얻을 것은 도구와 기술뿐이다. 어린이가 자신이 손에 칼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필경 찔린다. 내가 손에 칼을 쥐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칼솜씨를 연마해야 다치지 않는다.
인간은 원래 생각을 안 하는 동물이다. 생각 비슷한 것을 하지만 대개 느낌을 찾는 것이다. 뭔가 느껴보려고 하고 그 느낌을 의미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동물의 본능이다. 의미를 찾는다면서 느낌을 찾는다. 느낌을 찾으려 하므로 그 칼에 찔리고 마는 것이다.
고수는 느낌이 없다. 무사는 갑옷을 입어도 잠옷처럼 편하며, 가수는 마이크를 쥐어도 떨지 않으며, 요리사는 식도를 쥐어도 펜처럼 가볍다. 목수는 연장을 쥐어도 그것을 자기 신체의 일부로 여긴다. 느낌이 오면 안 된다. 느낌은 가짜다. 느낌을 찾으려 하면 안 된다.
어린이가 아니고 어른이 되려면, 하층민이 아니고 지식인이 되려면, 당하는 사람이 아니고 행하는 사람이 되려면, 부족민이 아니고 부족장이 되려면 호르몬을 바꾸어야 한다. 손에 쥔 도구가 없이 막연히 느낌에 의지하는 어린이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
무슨 생각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개소리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거짓말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다. 인간은 호르몬에 반응하는 동물이다. 호르몬을 바꾸어야 한다. 환경이 바뀌면 호르몬이 바뀐다. 상호작용이 바뀌면 호르몬이 바뀐다. 만남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할 수 없다. 호르몬이 안 나오는 사이코패스는 어쩔 수 없다. 호르몬이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찌질이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이 호르몬에 중독되면 방법이 없다. 정선 카지노에 붙잡혀 있는 사람은 호르몬 중독이 심하여 뇌세포가 파괴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세상은 딱 세 가지만 신경 쓰면 된다. 첫째는 대상이고, 둘째는 도구, 셋째는 도구를 다루는 기술이다. 농부라면 밭이 대상이고 운전사라면 차가 대상이다. 좋은 밭을 골라야 된다. 좋은 차를 구해야 한다. 밭이 잘못되면 밭을 팔면 되고 차가 고장나면 수리하면 된다.
밭이 멀쩡하고 차가 좋은데 일이 안 풀리면 도구가 좋지 않다. 도구를 개선하면 된다. 지식이 도구다. 공부를 하면 된다. 친구가 도구다. 친구를 사귀면 된다. 옷이 도구다. 옷을 잘 입으면 된다. 문제는 자해다. 퇴행행동을 하는 것이다. 도구는 너와 나 사이에 있다.
너와 나의 사이를 연결하는 도구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퇴행행동이다. 내 팔을 잘라버리면? 다른 사람이 대신 옷을 입혀준다. 좋잖아. 인간은 퇴행하는 방법으로 도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이 방법은 평생에 딱 한 번만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이 함정이다.
팔을 자르고 다음은 다리를 자를 것인가? 구덩이에 빠져 있으면 엄마가 와서 구해준다. 구원받으니 좋구나. 일부러 구덩이에 빠진다. 다음부터는 누구도 구해주지 않는다. 어린이라면? 그래도 구해준다. 구함을 받는 어린이의 전략을 어른까지 유지하려는게 퇴행행동이다.
도구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퇴행행동을 버리고 내가 도구의 사용기술을 익혀서 한 걸음 전진하는게 진보주의다. 산다는건 단순하다. 환경을 선택하고 도구로 연결하고 그 도구를 장악하면 된다. 선악이니 정의니 도덕이니 행복이니 하는건 초딩들이 응석 부리는 소리다.
세상이 개판인 것은 대개 세상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다. 내가 잘했는데도 세상이 잘못되면 내가 높여놓은 좋은 확률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고 그 확률은 상호작용구조 속에 용해되어 있다가 나중에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내가 그 대가를 못 받아도 상관없다.
기술자는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면 된다. 내가 좋은 집을 지었는데 건축주가 그 집에 입주하지 않으면? 잊어버리면 된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좋은 집을 알아보지 못하는 집주인의 안목이 잘못된 것이다. 명품은 임자를 찾아가야 하지만 가끔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된다.
우리가 냉담한 기술자의 자세, 건축가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거기에 선악이 없고 정의도 없다. 도구가 잘못이면 도구를 개선해야 한다. 목수는 좋은 대패를 가져야 하고 학자는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밭에 적응하고 도구를 개선하는 과정이다.
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남 탓은 미성숙하기 때문이다. 도구를 내 쪽으로 잡아당기려는 퇴행행동이다. 내가 어떻다는 부분은 고려할 필요가 없고 남들이 잘했건 잘못했건 그것은 역시 대상의 문제다. 남이 나를 해쳤다면 그 사람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다.
누가 나를 해쳤다면 그 사람은 범죄자가 된 것이며, 범죄자가 되는 순간 호르몬이 바뀌고 낙인이 떨어진다. 전과기록은 잘하면 사면될 수 있지만 범죄자의 호르몬은 사면되지 않는다. 함정에 빠진 것이다. 나를 해친 사람이 제 발로 수렁에 뛰어든 거지 내가 잘못한건 아니다.
문제는 자신을 쪼이는 닭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매를 맞다 보면 자신을 쪼이는 닭으로 규정하고 매 맞는 환경에 적응하는 호르몬을 생산하게 된다. 닭장에서 쪼이는 닭으로 규정되면 이유 없이 닭들에게 쪼이게 된다. 쪼이는 닭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힘센닭에 붙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가고 사찰에 가서 힘센닭 하느님을 찾는 이유다. 만사는 호르몬에 달린 것이며 범죄자의 호르몬이 나오면 범죄자가 되고, 쪼이는 닭의 호르몬이 나오면 쪼이는 닭이 되고, 쪼는 닭 호르몬이 나오면 공연히 남을 쪼아대는 깡패닭이 된다.
두목 호르몬이 나오면 리더가 되고, 족장 호르몬이 나와야 어른이 되는 것이며 그래야 남탓병을 고치고, 퇴행본능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회복하고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자연인이 되어 산속에서 산다 해도 마음은 천하와 연결될 수 있다. 호르몬을 관리하기 나름이다.
‘나’라는 단어를 버려야 한다. 강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햇볕이 쪼이고 존재는 그 흐름 가운데 있다. 내가 소집되었는가? 내가 호출되었는가? 내가 부름 받았는가? 내가 대표성을 얻었는가? 내가 의사결정을 해야하는가? 나라는 존재는 부름을 받은 순간에 성립한다.
임무를 획득하는 순간, 집단을 대표하는 순간, 주어진 역할을 하는 순간, 의사결정의 순간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며 그 외에는 지푸라기 인형에 불과하다. 큰 집단에 소속되어 대표성을 얻고 임무를 부여받아 자존감을 획득하고 호르몬을 바꾸어 천하인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목수는 그냥 집을 짓고 인간은 그냥 사회를 짓는다. 좋은 집이 지어지면 그뿐, 좋은 사회가 지어지면 그뿐, 나라는 것은 존재가 없다. 내가 있다고 주장하며 남과 비교하며 남이 나를 해코지 했다고 주장하며 초딩의 어리광모드를 유지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할 수 없다.
그게 지렛대를 만들려는 행동이다. 심하면 자해한다. 지렛대를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그 지렛대가 없기 때문이다. 너와 나를 연결하는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숟가락이 없으니 내 손을 잘라버린다. 남이 떠먹여 주길 바라고. 다음에는 다리를 자른다. 그러다가 이 손 저 손이 다 잘린 사람이 안철수다.
미성숙한 사람의 치기 어린 동물행동을 버리고 천하인의 허허로운 마음을 얻을 일이다. 그래도 안 되면 확률의 바다에 숨어야 한다. 세상은 상호작용이고 상호작용은 입구와 출구만 중요하고 나머지는 생략이다.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고 모두 상호작용의 상자 안에서 용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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