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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측이었던 대학생「천안문 경비는『야구』였다」 민주주의를 동경한 중국이 "천안문"을 통해 얻은 것

일본관련

by 21세기 나의조국 2019. 6. 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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権力側にいた大学生「天安門警備は『野球』だった」
現代中国のタブー、事件30年目に語られた「僕」の物語(前編)
2019.6.3 安田 峰俊



                권력측이었던 대학생「천안문 경비는『야구』였다」


                        현대중국의 금기、사건 30주년에 말하는「나」의 이야기(전편


                               2019.6.3  安田 峰俊(야스다 미네토시)   번역  오마니나


          「天安門事件の死者は1万人」 英公文書を公開

중국 베이징에서 민주화 운동이 군에 의해 무력탄압된 "천안문 사건"때에 군중에게 불태워진 약 20대의 장갑차(1989년 6월 4일 촬영).(c)AFP PHOTO/Manny CENETA[AFPBB News)



 일본열도가 버블경기에 들끓었던 1989년 4월.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학생들이 "변혁의 꿈"을 가슴에 안고, 천안문 광장으로 모였다. 약 1개월 후, 세계를 뒤흔든 대탄압의 무대가 될 것이라고는 모르고 ――. 사건으로부터 30년째인 올해(2019년), 천안문 사건에 연루된 60명 이상을 취재한 대형 르포르타주가 화제가 되고 있다. 이번에, 오오야 소이치 상을 수상한 논픽션 라이터 야스다 미네토시 씨가,  2011년부터 햇수로 8년을 바쳐 완성시킨『팔구육사(八九六四)』. 이 책에서, 사건 당사자의 생생한 증언을 2차에 걸쳐 전한다.(JBpress)


(※) 본고는 "팔구육사 "천안문 사건"은 다시 일어날까"(야스다 미네토시 지음, 카도카와 서점)의 일부를 발췌·재편집 한 것입니다.


쌍방을 이해할 수 있는 희귀한 존재


웨이얀슈(가명)사건 당시 19세, 모 경찰계 대학의 대학생, 취재 당시 44세, 투자회사 간부
 "사건" 당시의 소재지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의 교외
취재지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양마교 부근의 식당
취재일 : 2015년 4월


"그 봄의 천안문 광장은 축제였다네. 대학 수업은 전부 휴강이었지. 친구들과, 태양 아래서 밥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수다를 떨다 텐트나 버스 안에서 잠을 잔다. 지금과 비교해 오락이 적었던 시대에는, 그 정도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특히 18세, 19세의 학생이었으니까. 아무튼 그것이 흥미롭게 느껴져 찾아온 무리가 전체의 5할, 아니, 8할이었을 지도 몰라. 나 자신도 그랬다."


 아련한 눈으로 당시의 광장내부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만난 웨이얀슈(魏陽樹)씨다.


 그는 산시성 출신으로, 베이징 시내의 대학에 진학. 1학년인 19세에 "천안문 사건"을 맞았다. 사건 후인 1990년, 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한 후, 어느 재벌 산하의 대형상사에 취직. 일본에서의 생활은 20년 이상, 이윽고 친구 몇명과 투자회사를 차렸다. 취재 시점부터 1년 정도 전에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다.부인은 연하의 일본인 여성으로, 웨이 본인도 매우 유창한 일본어를 한다.


 나와 만난 장소도, 시내 동북부의 일본인 거리인 량마찬호(亮馬橋)의 식당이었다. 웨이얀수와는 몇 년 전에, 일본에서의 친구들과의 회식자리에서 한 차례 인사를 나눈 적이 있지만, 막상 연락을 취해 보니 그쪽은 기억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를 기억하고 있던 것은, 그때 만취했던 그가, 젊은 날 본 광장의 모습을 슬쩍 언급했었기 때문이다.


"시위대의 주장에 대한 공감대는・・・.  당시는 그게, 분명히 있었네. 당간부의 아들과 같은 특권계급이 아니라도, 공평한 기회를 주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광장에서 뜨겁게 말하는 다른 대학의 선배나 친구들이 너무 멋져 보여, 연설에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인 쯔아이린(柴玲)의 연설도 자신의 귀로 직접 들었다. 정말 감동한 적도 있었어"


 하지만, 웨이의 입장은 다소 복잡하기도 했다.


"천안문은, 한사람의 대학생으로서는 광장에 놀러 가는 입장이었지만, 당시 자신의 학교의 성격상, 시위대를 제압하는 측이기도 했거든 ――"


 그의 모교는, 천안문 광장에서 약 20킬로미터 정도 교외에 있었다. 경찰관료를 양성하는 대학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원래는 일반대학이었지만 1980년대 전반에 경찰양성용 대학으로 바뀐 경위가 있어, 교풍은 "정부"의 교육시설로는 상당히 자유로웠다. 하지만, 일단은 공안부의 하부기관이었다.


천안문 경비는 "야구"였다


 1989년 4월, 학생 시위대가 천안문 광장을 점거했다. 웨이안슈의 대학에서는 다른 학교처럼 학교단위의 시위대는 조직되지 않았지만, 그를 포함한 동급생들은 개인적 입장으로서, 이 "축제"에 대거 참여했다. 하지만 이윽고, 대학에서 이런 지시를 받았다.


"동급생들 수백 명과 함께, 제복을 입고 경비로 나가라는 지시를 받았지. 5월 4일에 아시아 개발은행 이사회총회가 베이징에서 열릴 때와, 5월 15일부터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방중했을 때였다"


 외교행사의 무대는, 학생들이 점거 중인 천안문 광장의 바로 옆 정부청사다. 시위 때문에 베이징 내의 경찰이 일손이 부족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저 서 있으면 좋을 만큼의 단순한 경비작업은, 경찰대학의 학생을 동원함으로써 보충하는 형태가 취해진 것이다.


"아시아 개발은행 때는, 우리들은 천안문 광장의 동쪽 담당. 서쪽에서 오는 학생 시위대를 막았다. 대략 1시간 정도로 끝났어. 고르바초프 때는 인민대회당의 서쪽에 있었다. 지금의 국가대극원이 있는 장소로, 당시는 공사현장이었다. 황무지에 차를 세워 놓았다"


 더구나, 웨이얀슈에게 시위 경비의 체험은, 개인의 입장에서 점거학생 편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재미있는"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운동은 그 5월 중순까지는 특별히 비장함이나 절박감이 없고, 특히 말단의 학생들은, 아직도 축제 분위기를 풍겼다. 군인과 중앙당교 교원들이 개인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하는 사례도 많았고, 당중앙은 일단 내버려 둔다고 해도, 말단의 치안관계자와 시위대의 관계는 그다지 대립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들면, 야구였다. 일단은 공격측, 같은 또래의 학생팀이 우리를 밀어붙였으므로, 우리들은 스크럼을 짜서 지킨다. 이번에는 우리 팀이 확 밀어붙이므로, 학생팀이 지킨다. 그래서 '오, 이겼다',해냈다' 같은 느낌"


 원래 당시까지의 중국에 있어서, 학생운동은(공공연히 당체제의 타도를 주장하지 않는 한)금기가 아니었다. 대학 진학률이 몇 퍼센트에 그쳤던 1980년대, 대학생은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 갈 엘리트 예비군이다. 미래를 책임지는 인텔리 청년들이 나라를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행위를 긍정적으로 간주하는 풍조는, 민관 모두에 존재했었다.


 천안문의 학생시위에 대해서도, 5월 중순까지는 당국측의 태도는 여전히 온건하고, 학생측도 공산당과 정부의 신뢰도가 남아 있었다. 경비측과의 충돌도 살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왜 권력측에 있는 것일까, 같은 곤란한 마인드는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고, 경찰대학의 학생으로서의 역할이 싫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운동회처럼, 비일상적인 장소에 있다는 것을 동급생들과 함께 즐거워했다. 아마 학생측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해"


 현장의 차원에서는, 당의 원로나 보수파의 분노는 알 리도  없다.야구의 공격 쪽도 수비 쪽도, 그들의 생각은 역시 편안한 마음이었다.


계란을 주다니 최고다!


 고르바초프의 경비에서 수일 후, 웨이얀슈와 동급생들은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다. 내가 자료를 확인하는 한, 아마도 5월 18일의 이야기다.


"학생들의 단식투쟁이 시작되면서, 물도 마시지 않겠다는 기세가 되었다. 하지만, 인파로 구급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였다. 천안문 광장 옆에 공안부가 있었는데, 학생대표가 와서 교통정리를 부탁했어"


 늘 그렇듯 경찰측의 인력부족으로, 이번에는 천안문 광장의 동쪽에서 교통정리를 하게 되었다. 베이징 시내에서는 100만명 규모의 시위가일어나,전국의 27성에서도 호응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등, 운동은 아직도 꿈틀대고 있었다.


"공안부 건물 안에 있는 현관으로 들어가 오른쪽 장소에, 영화관 같은 곳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자고, 밥을 먹었다. 식사는 죽과 만두와 계란 하나. 가끔 야채가 나왔다. 당시는 가난한 시절이었고, 나도 젊었기 때문에 이것을 변변치 않은 식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배부르게 되니까 그냥 좋았다. 리얀피야오(糧票:식량배급표.사실상 식량구입 전용통화였다)없이 공짜밥을 먹을 수 있다. 게다가 달걀을 주니 최고였다! "


 웨이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공안부에서 침식을 제공받는 자신에 대해 약간은 의식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개인으로서 광장에 있을 때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이때는 시위에 대한 정치적 토론은 아무도 하지 않았어. 광장에서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봤다거나, 그 친구는 시위 중에 여자친구가 생긴 모양이라거나, 재밌었다거나, 그런 얘기만 했었다"


 웨이 자신을 포함해, 시위대에게 동정심을 가진 경찰학교학생도 적지않아, 어느 누구도 운동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현장이 혼란스럽지 않게 질서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고, 위에서 그런 말을 들은 이상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에도 위화감은 없다. 여하튼, 폭력을 동반한 운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당시의 웨이와 같은 동료들의 생각은 그랬던 것 같다.


 한편, 아직도 사태를 안이하게 보았던 말단의 학생들이 모르는 장소에서, 정치는 태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18일 아침, 덩샤오핑 등 8명의 당 장로는 개혁파를 제외한 정부수반을 소집해 회의를 열고, 베이징 시내에서의 계엄령 발령을 결정. 이윽고 다가올 결정적인 파국을 향해, 첫 스위치가 눌러진 순간이었다.(후편에 계속)




                    민주주의를 동경한 중국이 "천안문"을 통해 얻은 것


                      현대중국의 금기, 사건 30년 만에 이야기된 "나"의 이야기 (후편)


            天安門事件から25年、北京中心部は厳戒態勢

중국 베이징(Beijing)에서, 천안문(Tiananmen)사건으로부터 25년이 되는 4일, 경계태세가 내려진 광장(Tiananmen Square)주변에 동원된 경찰관(2014년 6월 4일 촬영).(c)AFP/GOH CHAI HIN[AFPBB News)


 일본열도가 버블경기에 들끓었던 1989년 4월.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학생들이 "변혁의 꿈"을 가슴에 안고, 천안문 광장으로 모였다. 약 1개월 후, 세계를 뒤흔든 대탄압의 무대가 될 것이라고는 모르고 ――. 사건으로부터 30년째인 올해(2019년), 천안문 사건에 연루된 60명 이상을 취재한 대형 르포르타주가 화제가 되고 있다. 이번에, 오오야 소이치 상을 수상한 논픽션 라이터 야스다 미네토시 씨가,  2011년부터 햇수로 8년을 바쳐 완성시킨『팔구육사(八九六四)』. 이 책에서, 사건 당사자의 생생한 증언을 2차에 걸쳐 전한다.


전회에 이어 등장한 것은, 당시 천안문 광장에서 경비를 맡았던 웨이 씨.웨이씨가 말하는 천안문 사태 최대의 "공적"이란? (JBpress)


(※) 본고는 "팔구육사(8964, "천안문 사건"은 다시 일어날까"(야스다 미네토시 지음, 카도카와 서점)의 일부를 발췌·재편집 한 것입니다.


                                         


만약 "천안문"이 성공했다면


"최근, 베이징에서 또래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변호사니 사장이니, 전원이 지금의 사회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런데, 만약 천안문이 성공했더라면――. 공산당 정권이 없어졌더라면 중국은 괜찮았을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름대로 지적인 중국인 아저씨들이, 스스럼없는 동료들과 모이면 어김없이 천안문이 화제가 된다. 어떤 사상과 사회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사건이 청춘의 추억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결론으로서는 '괜찮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결론이 되었다.일본에서도 예가 있잖아? 시험삼아 민주당에게 정권을 내줬더니, 나라가 개판이 되었잖아. 중국의 경우는 더 심각해질 수 있다. 만약 당시의 학생들이 천하를 빼앗았다면, 다른 독재정권이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민주당(당시)의 얘기는 별개로 하고, 중국에 대한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다. 과거의 신해혁명도 국민혁명군의 북벌도 사회주의혁명도, 결과적으로는 원세개나 장개석이나 마오쩌둥을 새로운 독재자로서 대두시키는 발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천안문 사건 당시는 개혁개방정책이 막 시작되었을 뿐, 서방측의 단편적인 정보, 즉 좋은 면 밖에 보이지 않았다. 되돌아 보면 학생측도, 지금의 사람들보다 훨씬 시야가 좁았다"


 웨이얀슈는 "예를들어, 같은 시대의 일본의 시골중학생보다 훨씬 보는 세계가 좁았을 거야"라며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당시, 정부는 필사적으로 (외부세계의)정보가 들어오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어설프게 정보를 받아들여, 어설프게 이해했기 때문에, 외국을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런 일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천안문 사태의 진실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中国紙、天安門事件での政府の対応を擁護「政治的混乱への免疫力与えた」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민주화 시위에서, 천안문 광장에 모인 사람들(1989년 6월 2일 촬영).(c)CATHERINE HENRIETTE/AFP(AFPBB News)




택시를 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때 나는, 자동차의 조수석에 타고 싶었다"


 추가한 맥주가 들어와 대화가 잠시 중단된 뒤, 웨인얀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이카를 사는 것이 꿈이었나요?"


"아니요. 내 차를 가지고, 핸들을 잡는 다는 것은 꿈, 완전히 다른 이야기. 그 무렵의 나는 조수석에 타고 싶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신기하지요"라며 웃었다. "중국에서는 일본과 달리, 자동차의 가장 좋은 자리는 조수석이다. 중국인들은 택시를 탈 때, 뒷좌석보다 조수석에 더 앉으려고 하지. 조수석은 특별해. 내가 지금부터 가는 길의 가장 좋은 경치를 독점할 수 있는, 높은 사람이 타는 자리라는 생각이 있다"


"팔구육사"의 시대, 중국의 서민들은 핀찬챠(平板車)라는 세 바퀴짜리 리어커가 달린 자전거로 이동했었다. 택시비는 매우 비싸고 수도 적다. 운전수는 사람들로부터 "시부(선생님)"로 불리며, 젊은 여성이 이상적인 결혼상대로 원하는 직업의 넘버원이었다. 그런 사회에서 자동차의 조수석에 탈수 있는 것은, 상당한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뿐이었다.


"대학 1학년 때의 추억이 있다. 나는 시내의 중앙음악학원에 놀러 갔고, 돌아 오는 길에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더니, 중국인인데 외국인처럼 생긴 세련된 사람이, 세상에 손을 들더니 택시를 잡았다. 시원스레 올라타는 그의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택시를 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인생에서 1번이라도 좋으니 타고 보고 싶다고. 물론 앉는 곳은 조수석이다. 그런 상상만 해도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현대의 중국에서, 택시운전사는 저임금노동자의 상징이 되었다. 세련된 도시주민들은 매너나 안전성에 대한 불안감으로 택시를 그다지 타지 않고, 스마트폰앱으로 쉐어라이드(차량공유)를 하거나 자가용을 타거나, 심지어 부자이면 운전기사가 딸린 차로 이동한다. 이제는 투자회사의 고위층에 자리 잡은 웨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이 그것에 가까운 생활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4반세기후의 현재까지 그 광경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젊은 날의 그에게 택시의 조수석은 동경의 대상이었다.웨이는 그 당시의 추억을 계속 말해주었다.


 예를들어 1990년경, 근처에 막 생긴 KFC(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에 갔던 이야기다. 세트의 가격은, 숫자상으로는 현재와 거의 변하지 않는 20위안이 조금 넘었다. 다만, 당시의 중국인에게 그 금액은 대졸초임의 약 3분의 2정도에 상당했다.


"선배와 KFC에 먹으러 가게 된 전날 밤은, 너무나 기대가 되어 잠을 자지못했다. 당일, 나는 떨려서, 카운터에서 프라이드 치킨 두개와 비스킷 1개와 음료를 주문했다. 어떤 느낌이었는 지 지금도 모두 기억하고 있어. 내가 먹은 비스킷은 작고 동그란 빵같고, 표면이 바삭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고. 이런 히안한 음식이 이 세상에 있었나 했지――"


 현대의 중국인이라면 세살짜리 아이들도 먹는 흔하디 흔한 정크푸드다.


"중국은 달라졌다는 것이다. 천안문 사건 때에 모두가 정말 갖고 싶었던 것은, 당시의 상상을 훨씬 웃도는 수준으로 실현되고 말았다. 어느 나라의 어느 정권이, 단지 25년 동안에 이 정도의 발전을 이뤄낼 것 같은가? 따라서, 지금의 중국에서는 결코 학생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답이다"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나눈 맥주에 약간 게슴츠레해진 웨이의 기준에 비춰볼 때, 중국의 언론의 자유와 사회의 자유에 대해서도, 과거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가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 천안문 사건의 가장 큰 "공적"이라고도 말했다. 이렇게 화제가 마무리 되어, 나의 웨이에 대한 취재 시간은 끝이 났다.


대부분의 중국인이 이룬 "꿈" 앞에서는


 물론, 웨이의 이야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많다. 현대의 중국사회는 1980년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자유"일 지도 모르지만, 중국의 언론통제의 엄중함과 사회감시의 처절함은, 취재한 내가 무엇보다 절감하고 있다.


 또, 확실히 후진타오 시대까지의 중국사회에는, 권력기반이 약한 정권 하에서 국민은 뭐든지 하고 싶어 하는―― 일종의 "자유"가 있었지만, 그것도 시진핑이 권력을 잡자마자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 지도자가 교체될 뿐으로 사회의 개방성이 크게 오락가락하는 것은, 역시 중국의 정치체제가 전제적이고 강권적이기 때문이다.


 웨이가 말하는 경제발전에 대해서도, 중국의 성장에는 왜곡이 많다.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정책을 제창했을 때 "부자가 될 수 있는 자가 먼저 잘 되어 낙오한 자를 도우면 된다"고 호소했지만(先富論), 실제로는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발생했을 뿐, 낙오된 자는 돕지 않았다.


 물론 종합적으로 보면, 중국사회는 1989년 당시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풍요로워졌다. 이제는 자동차의 조수석이나 KFC의 비스킷은 빈곤층의 사람들에게도 먼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회전체의 행복도가 높은 지는 의문이다.


 모두가 "평등"에 가까웠던 "팔구육사"의 시대와 비교하면, 엄청난 격차로 인해 중국의 사회는 심각하게 분단되어, 계층을 달리하는 자들의 공통언어는 거의 소멸되어 있다. 무엇보다,  만약 개방성이 좋은 체제의 사회가 원래 중국에 존재했었다면, 경제발전은 더 빨리 시작되었을 것이다(참고로 KFC의 일본 최초 출점이 1970년이다).


 현대의 격차문제도 환경문제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라면 더 효과적인 해결의 가닥이 잡히지 않을까. 적어도 우리와 같은 서방측 사람이나, 공맹의 멤버같은 민주파 중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과거의 웨이가 보았던 광경과, 대부분의 중국인이 이룬 택시와 프라이드치킨의 꿈 앞에는--.즉 중국의 국내감각에 비추어 볼 때, 그다지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http://jbpress.ismedia.jp/articles/-/56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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