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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건에서 30년 "덩샤오핑의 승리"가 중국인에게 가져온 격변

일본관련

by 21세기 나의조국 2019. 6. 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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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安門事件から30年、「鄧小平の勝利」が中国人にもたらした激変
あの時もしも別の道がとられていたら… 
 2019年 6月 4日 近藤 大介『週刊現代』特別編集委員




         천안문 사건에서 30년 "덩샤오핑의 승리"가 중국인에게 가져온 격변


                                     그때 만약 다른 길이 택했다면... 
 
                           2019年 6月 4日 近藤 大介(곤도 다이스케)   번역   오마니나



 

현대 중국사의 오점


"30년 후"인 6월 4일의 아침을, 중국은 조용히 맞이했다.


"역사는 승자가 창조한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오늘 날의 중국은, 30년 전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하게 보내고 있다. 나는 지난 주에 중국에 다녀왔는데, "천안문 사건"은, 전혀 사람들의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화제가 된 것은, 도중에 들렀던 홍콩 뿐이었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올해 10월 1일에 건국 70주년을 맞이 하지만, 공산당 정권이 전복될 지도 모르는 위기에 빠졌던 것은, 1989년의 천안문 사건, 단 한번 밖에 없다.


1957년의 반우파 투쟁, 이듬해부터 시작된 대약진과 3년의 기근, 1966년부터 10년이 계속된 문화대혁명 등, 현대 중국사는 "비극"이 이어졌다.


하지만, 유능한 젊은이들이 다수 희생되고, 인민해방군이 물리력으로 진압하는 영상이 전세계에 유포되었다는 점에서, 천안문 사건은 현대중국사의 오점이 되는 비극이다. 중국당국은 사망자 수를 319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중국국외의 일부 연구자는, 1000명 이상 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천안문 사건의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시사통신의 기사에서 인용).


◇천안문 사건의 경과
 [1989년]
4월 15일: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사망
17일: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추모
19일 : 학생들, 중남해 · 신화문에 집결
22일: 공산당 중앙에 의한 후야오방의 추모식
26일: 인민일보 사설, 학생운동을 "동란"이라고 단정
27일: 사설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
5월 4일: "5.4운동" 70주년
13일: 광장에서 단식이 시작
15일 :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방중
17일 : 100만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
18일: 이붕 총리가 왕단, 우알카이시 씨 등 학생 지도자와 회견
19일:자오쯔양 총서기가 광장에서 단식농성 중인 학생을 설득
20일 : 베이징에 계엄령 시행
30일 : 광장에서 "민주의 여신"상 제막
6월 3일 밤 : 군이 무력제압으로 진군 시민과 충돌해, 다수의 사상자
4일 새벽 : 군, 광장을 무력제압, 광장의 학생은 철수
9일 : 덩샤오핑이 계엄부대를 위문


나 자신도, 천안문 사건이 없었다면 중국 연구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30주년이라는 의미에서, 조금 그 당시에 대해 쓰고자 한다.


      



그리고 비극은 일어났다


1989년 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뉴스잡지의 편집부에 들어갔다. 편집부에는, 당시에는 참신했던 CNN을 볼 수 있는 TV가 있어, 나는 배속된 첫 날부터, CNN이 내보내는 세계의 뉴스영상을 접했다. 그러자 상사로부터 "그렇게 흥미가 있으면, 전날 본 흥미로운 뉴스를, 매일 아침에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그 날부터, 편집부와, 옆에 있던 수면실을 거처로 삼아, 오로지 CNN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곧, "이변"이 일어났다. "세계의 모든 뉴스를 안방에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시작된 CNN이었지만, 하나의 뉴스 밖에 내보내지 않게 된 것이다. 그것이, 베이징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학생운동과, 그 후의 천안문 사건이었다.


그 동영상은 충격적이었다. 먼저,"100만명을 수용한다"고 얘기되던 천아눈 광장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처음 보았을 때는, 실례스럽고 미안하지만, 구걸하는 집단인 줄 알았다. 나와 같은 세대의 중국의 젊은이들이, 남녀 모두 너무 가난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도쿄는, 버블경제의 절정기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DB(디자이너스 브랜드)라는 세련된 옷이 유행하고 있었다. 나도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산 마이카를 타고 대학을 다녔고, 디스코에 가거나 비싼 와인을 마시거나 하면서, 전형적인 버블기의 청년생활을 보냈다.


따라서, 바다를 사이에 둔 동세대의 중국 젊은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한 광경으로 느껴졌다. 천안문 광장에서, CNN 기자가, 한 중국인 여대생을 상대로 마이크를 들이댔다.


"당신은 패션에 관심이 없나?"


그러자 그 여대생은, 눈을 치켜뜨며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옷은, 2벌 밖에 없어요. 지금 입고 있는 이 옷과, 빨고 있는 옷.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또 다른 케이스,  CNN 기자가 남학생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민주화 운동은 어떤 것인가?"


그 남학생도, 진지한 눈빛으로, 유창한 영어로 답했다.


"민주화운동은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이 천안문광장에서의 데모에, 인생의 모든 것은 걸고 있다. 그것은, 우리 조국의 운명과 미래를 건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조국에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 자리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져도 상관없다"


이런 느낌으로, CNN은 아침부터 밤까지, 중국의 모습을 방영하고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내 머릿 속에는, 하나의 질문이 커져 있었다. "동세대의 젊은이라고 하는데, 이 피아의 차이는 무엇일까?" 당시, 일본에서는 유행하기 시작한 옴 진리교는 아니지만, CNN이 연이어 방영하는 천안문의 영상에, 나는 어느덧 "세뇌"되었다.


그리고, 그 6월 3일 토요일 심야부터, 4일 일요일 새벽에 걸쳐 비극이 일어났다. 나는, 아무도 없는 잡지사의 편집부에서, 철야로 CNN을 보고 있었다.인민해방군의 전차가 톈안먼 광장으로 진입하면서, 젊은이들이 곳곳에 흩어졌다는 뉴스를, 기자들도 밤을 새워가며 보도했다.


다음 5일 낮에는, 천안문 광장 동쪽에 있는 베이징 호텔 앞의 장안거리에서, 와이셔츠 차림의 젊은이가 혼자 서서, 전차대열의 앞길을 막아선 영상이 흘러나왔다. 나중에 그 사진은 TIME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탱크맨"으로 불려, 천안문 사건을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다.하지만, 그 중국의 젊은이의 행방은, 지금도 묘연하다.


     


6월 9일, 인민 해방군에 출동명령을 내린 최고실력자, 덩 샤오핑이, 사령부에 간부들을 모아 격려하고, "반혁명 음모분자가 우리의 당과 국가의 전복을 획책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학생간부들을 일제히 적발해 천안문 사건은 종식되었다. 일부 간부들은, 은밀하게 국외로 탈출했다.


이 강경한 방식에 서방세계가 일제히 반발해, 중국은 한때, 서방국가들과 단교상태처럼 되고 만다. 그 해 11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어, 동유럽 국가들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1991년 연말에는, 마침내 사회주의의 "원조"인 소련까지 붕괴되었다.


덩샤오핑은 이겼다


1992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덩샤오핑은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자신이 만든 경제특구 선전 등을 시찰하고 "개혁개방을 가속하라!"고 호령했다. 이른바 "남순강화(南巡講話)"다.


이때부터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정치는 사회주의를 관철하되 경제는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특이한 시스템으로 변해갔다. 간단히 말해, "젊은 사람들이여,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면, 부자가 될 자유를 줄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나의 경우는, 자주 중국을 출입하면서, 드디어 1995년에 베이징 대학에 1년 간 유학할 기회를 얻었다. 유학지는, 아무래도 베이징대학이여야만 했다. 그것은, 1919년의 5.4운동에서 1989년의 천안문 사건까지, 역시 학생운동이라고 하면, 베이징 대학의 "삼각지"라고 불리는 작은 광장이 발화점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베이징 대학은, 5.4운동인 5월 4일을 개교 기념일로 하고 있다.


유학을 가보고 알았지만, 천안문 사건에서 6년이 지나자, 베이징대학의 학생들도 크게 바뀌었다. 입학식에는 신입생 부모들의 고급 외제차가 즐비하게 대학가에 세워져, 경악했던 것이다.


또 입학식 후에는, 신입생 환영행사로서, "항일전쟁승리 50주년" 국책영화 『7.7 사변』의 감상회가 열렸다. "학생의 적"은, 어느 사이에 공산당 정권에서 구일본군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가 끝나자, 약 3000명의 신입생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남학생이, 대학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세상에 그들은, 허베이 성에서 1년동안의 군사교련을 부과받은 것이다. 나중에 대학 관계자들로부터 물었더니, "베이징 대학생은 가장 먼저, 애국심을 길러라"는 덩샤오핑의 일성으로 그렇게 결정했다고 한다.


      


1년 동안, 베이징대학의 기숙사에서 지내며, 중국의 엘리트 대학생들과 함께 생활해봤던 나의 결론은, "덩샤오핑은 이겼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졸업 후에 미국으로 유학가 부자가 되려고만 생각했다. "천안문 사건? 그게 뭐야? 그것보다 소니의 워크맨 신제품이라든지, 토요타의 신차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줘."  "그들은 나에게, 그렇게 졸라 댔다.나에게 가끔 일본에서 잡지가 배달되거나 하면, 그런 광고 페이지를, 눈이 휘둥그레져 들여다 보았다.


천안문 사건 7주년인 1996년 6월 4일,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삼각지"에서 관찰했다. 몰래 학생들의 기념집회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맥이 빠져 버렸다. "삼각지"의 벽에는, "탁복(託福)으로 고득점을 올릴 수 있습니다!"라는 영어학원의 벽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탁복"이란 "토플(TOEFL)"의 음역으로, "복을 받다"라는 의미도 합쳐져, 중국인의 미국에 대한 동경을 영어학원의 광고에 담은 것이다.


어느 날, 간부의 아들이 "Windows 95"을 사가지고 와, 학생 기숙사 내에서 상자를 열었다. 금새 기숙사 내의 학생들이 몰려왔고, 나도 거기에 동참했다. 인터넷이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우리는 환성을 질렀다. 누구나 "Windows 95"의 "상자 안"에 있는 미국에 동경심을 가졌다.


나도 그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터넷이라는 것을 실제로 보았다. 학생들이 한 명씩, 보고 싶은 것을 검색해 보았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북조선이 보고 싶다"고 했더니, 곧 평양의 풍경이 화면에 나타나, 깜짝 놀랐다.


덩샤오핑의 완전승리


베이징대학의 유학, 마지막 날, 나는 실수 하나를 저지르고 말았다. 대학의 남문 앞 식당에서 중국인 학생들이 송별회를 열어주어, 나는 다음과 같이 인사했던 것이다.


"한 해 동안, 정말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도쿄에서 여러분들을 돌 볼 차례입니다. 꼭 가까운 시일 안에 도쿄에 놀러 오세요"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박수치는 대신, 똥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이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중국에는, 일반인용 여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증"이 도착하거나 하면, "특별히" 여권신청이 허용되었다. 그때문에, "해외여행이라니 나갈 수나 있겠냐"는 것이, 중국학생들의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작년에는 총 1억 4000만명의 중국인이 해외여행을 즐기고, 그 중 838만명은 일본을 방문했으므로, 격세지감이다.


중국에서 귀국한 후, 1년 간의 견문을 담은『 베이징 대학 3개국의 문화충격』(1998년 고단샤)이라는 책이, 나의 처녀작이 되었다. 첨언하자면, 이 책도 그 후, 중국정부의 개방도에 의해, 베이징대학 일본어 학과의 텍스트가 되거나, 발매금지 처분을 받거나 하면서, 부침을 맛보았다.


그 후, 도쿄에서, 일본에 온 우알카이시씨에게,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위구르인 출신으로 베이징사범대 학생이었던 그는, 천안문 사건 당시의 학생지도자 중의 한 명이었다. 사건 후, 프랑스로 망명해, 미국에서 공부한 뒤, 대만여성과 연결되어, 대만으로 거점을 옮겼다.



"그 당시에는 나도 젊었다.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을 앞에 두고 연설해보니, 자신이 마오쩌둥 주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만에서 사업을 성공시키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역시 덩샤오핑이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천안문 사건에 대해서는,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중국에서는 이 30년이라는 것,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 되어 있다.


2009년 가을, 베이징에서 "건국 60주년 기념전시회"가 열렸다. 당시, 일본계기업의 베이징 주재원으로 있던 나도, 그 전람회를 보러 갔다. 건국한 1949년부터 2009년까지를 1년마다 구분해, 매년 어떤 일이 있었는 지를 보도사진이나 자료로 돌아본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1989년의 전시장에 갔더니, 5월에 소련의 미하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방중해, 덩샤오핑과 굳게 악수하고 있는 대형 사진이 걸려있고 "중국과 소련이 완전히 밀월관계를 부활"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 밖에도 사진과 전시물이 몇 개인가 있었지만, 천안문 사건에 관한 것은, 통째로 빠져 있었다.


나는 쇼크를 받고, 다음날 아침, 근무처의 일본계 기업의 중국인 사원들 전원(즉 나 이외)을 모아서, 천안문 사건에 대해 질문해 보았다. 거의 전원이 "바린호우(八〇後)"라고 불리는, 천안문 사건이 일어난 1980년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더블 쇼크를 받았다. 우선 한 남성직원이, "오늘 아침에, 천안문 근처에서, 자전거 사고라도 났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다른 여성사원은 "지하철 1호선의 톈안먼 동역이거나, 서역에서 사고라도 났나요?"라고 한다. "전취덕(全聚徳:천안문 광장 근처에 본점이 있는  베이징 덕 요리점)에서 식중독 사건이라도?"라고 하는 남성사원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말을 바꿔, "리우스(六四 : 천안문 사건의 별칭)라고 말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자오쯔양 총서기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천안문 사건 때, 학생들을 동정해 천안문 광장에 들어가, 덩샤오핑의 분노를 사 해임된 공산당 총서기다. 그 후는 연금상태에 놓여졌다가, 2005년에 아무도 모르게 사망했다.


하지만 세상에, 당시 20대였던 그들은, 누구 하나, 자오의 이름 조차 몰랐다. 과연 나도 망연자실했다. 이것은 "덩샤오핑의 완전승리"다.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오늘 집에 가면, 부모님께 물어봐"라고만 하고 산회했다.


덩샤오핑은 계속 이길까


자오는 죽기 전에, 몰래 회상록을 테이프에 녹음했다. 그것은 손자의 장난감에 섞여 홍콩으로 옮겨졌고, 사후에『자오 극비 회상록』(번역은 2010년 광문사 간)으로 발표되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덩샤오핑이 생각하는 정치개혁은, 정치의 근대화와 민주화가 아니었다. 공산당의 일당지배를 유지하는 것이, 덩이 생각하는 개혁의 전제조건이었다. 개혁이란, 바로 공산당 일당지배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어야만 했다.


(중략)


국가의 근대화를 원한다면, 시장경제를 도입할 뿐 아니라, 정치체제로서 의회제 민주주의를 채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는 건전하며 현대적인 시장경제를 가질 수 없을 것이며, 현대적인 법치사회도 될 수 없다.>


미국 지식인의 견해를 소개한다. 미국의 아시아 연구의 1인자인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대저 '현대 중국의 아버지' 덩 샤오핑'(번역은 2013년 니혼게이자이 신문 출판사)에서, 천안문 사건에 대해, 이렇게 총괄하고 있다.


〈우리 연구자는, 인명의 중요성과 자유의 추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비극의 원인을 설명할 명확한 답을 찾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만약 다른 길이 택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중략)



중국인들 사이에, 개인의 자유확대나, 보다 자신들의 대표로서 걸맞은 정부를 갈망하는 마음이 뿌리깊게 남아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부패가 횡행하고, 공적이 아닌 개인의 이익 추구에 더 나서는 관리들에게, 대중은 신뢰를 보내지 않게 되었다. 보다 독립성이 높은 매체와 사법제도가 없으면, 부패를 억제하기 어렵다고 걱정하는 중국인이 많다.


그리고 많은 중국의 지도자들은, 덩샤오핑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대중으로부터의 지지 확대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옳았다고 믿는 만큼, 분명히 최후의 "만약"을 두려워 한다. ――만약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이에 발전의 페이스가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


보겔 교수가 방일했을 때,  이 부분의 표현에 대해 들어봤더니, 조금 생각한 다음에 이렇게 답했다.


"여러가지 생각이 있지만, 그 표현이, 아시아 연구자로서 내가 쓸 수 있는 최대치였다"


보겔 교수는, 한편으론 분명히 덩샤오핑을 존경하고 있으며, 이렇게 말했다.


"덩샤오핑 평전은, 나의 아시아 연구의 집대성으로서 썼다. 쓰는 대상은, 그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덩샤오핑은 어떤 문제에도 통했던 20세기의 비교할 데 없는 정치가였다"


덩샤오핑을 단순히 악한 만으로 취급할 수 없는 점에, 현대의 서방국가의 중국연구자들의 착잡함이 있다. 1976년의 마오쩌둥의 사후, 만약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중국은 어떻게 되어버렸을까를 생각하면, 입이 무거워져 버린다.


덩샤오핑은 앞으로도, "계속 이길 수" 있을까?


                                          https://gendai.ismedia.jp/articles/-/65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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