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이코노미 노승욱 입력 2016.08.22. 09:32
중국 스마트폰 업계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삼성전자, 애플, 샤오미, 화웨이 등 그간 스마트폰 시장을 주름잡던 주요 기업들을 제치고 이름도 생소한 ‘오포(Oppo)’, ‘비보(Vivo)’란 회사가 선두권을 차지했다. 두 회사가 중국 IT·유통전문기업 BBK그룹(步步高·부부가오, 정식 명칭은 ‘부부가오상업체인주식유한책임공사’)의 자회사인 ‘형제 기업’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BBK그룹의 정체에 대한 업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 2분기 중국 스마트폰 업계 1위는 화웨이였다. 점유율 20.8%로 오포(12.7%)와 비보(10.6%)를 제쳤다. 그러나 오포와 비보가 BBK그룹의 자회사로 사실상 한 회사인 점을 감안하면 두 회사 합산 점유율(23.3%)이 화웨이보다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가장 최근 기록인 6월 한 달간 판매량만 놓고 보면 오포가 22.9%를 기록, 화웨이(17.4%)를 2위로 밀어내고 단독 1위로 올라선다. 이어 비보(12%)가 3위, 애플(9%) 4위, 삼성(6.8%)과 샤오미(6.8%)는 공동 5위를 기록했다.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선 후발주자로 분류되는 오포와 비보가 세계적인 기업들을 모두 따돌린 것이다. 세계 시장에서도 오포와 비보는 합산 점유율 10.8%를 기록, 삼성(21.4%)과 애플(11.2%)에 이어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오포와 비보를 낳은 BBK그룹은 도대체 어떤 회사일까.
BBK그룹 창업자는 돤융핑 BBK그룹 회장(段永平·55)이다. 중국 장시(江西)성 난창 출신인 그는 저장대 무선전신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 전자관공장에 배치된 이후 인민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6년간 샤오바왕(小覇王·학습용 컴퓨터 생산업체)에서 CEO로 일하며 억만장자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돤 회장은 1995년 BBK그룹을 창업한다. BBK그룹은 DVD플레이어·MP3플레이어 등을 만드는 IT사업부와 마트, 백화점, 쇼핑몰, 온라인 쇼핑몰 등 유통사업부를 두 축으로 성장 가도를 달린다.
창업 초기 후난성 지역에서 가장 큰 물류센터를 보유하게 된 BBK그룹은 이를 기반으로 유통 사업을 먼저 발전시켰다. BBK그룹 유통 사업의 중심축인 마트 부문에선 1995년 1호점을 개장한 이래 지난 2014년까지 중국 전역에 약 160개 지점을 설립했다. 백화점과 쇼핑몰도 후난성, 광시성, 쓰촨성, 충칭 등에 약 43개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2014년 기준).
후난성 최고 유통기업이 된 BBK그룹은 중국 전체 유통업계에서도 손꼽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 5월 중국체인경영협회(CCFA)가 발표한 ‘중국 100대 유통체인 기업 리스트’에 따르면, BBK그룹은 지난해 총 577개 유통점에서 310억위안(약 5조7200억원) 매출을 올려 전체 유통기업 중 18위에 올랐다. 전년 대비 매출 성장률은 14.7%, 유통점 증가율은 9.9%를 기록했다.
IT부문에선 BBK전자를 통해 비디오와 오디오 기기를 생산했다. 2001년에는 해외 시장을 겨냥한 MP3플레이어 브랜드 오포를 설립했다. BBK전자와 오포는 뛰어난 음향 기술로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는다. 이후 오포는 BBK그룹 창립 멤버 가운데 한 명인 토니 첸이 2004년 별도 회사로 독립시켰고, 2008년 첫 번째 휴대폰을 출시했다. 이즈음 돤융핑 회장은 특별한 사건으로 일약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2006년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과의 점심 경매를 62만100달러(약 6억2000만원)를 내고 낙찰받은 주인공이 된 것이다.
2011년에 오포는 비보와 함께 스마트폰 제조사로 변신을 꾀한다. 비보는 프리미엄 시장을, 오포는 중저가 시장을 노린 이원화 전략이다. 그러나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오포와 비보는 1~2년 전만 해도 중국 스마트폰 시장의 2세대 업체로 알려졌을 뿐이다.
프리미엄 제품이 대세던 2010년대 초반에는 삼성과 애플이, 가성비 높은 중저가 제품이 인기를 끈 2010년대 중반에는 샤오미와 화웨이가 중원을 장악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후발주자인 오포와 비보가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마케팅의 힘이다. 오포와 비보는 타깃층을 세분화해 소비자들의 충성도를 높여갔다. 비보는 20~40대 남성층, 오포는 학생층과 20~30대 여성을 주 고객층으로 각각 설정하고 이에 맞는 제품을 전략적으로 출시했다.
광고도 대대적으로 했다. 슈퍼주니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송중기 등 당대 톱스타들을 기용하며 화제를 모았다. 또 온라인 판매를 고집하는 샤오미의 ‘신비주의’와 달리 오프라인 매장 위주로 마케팅을 진행했다. 판매 마진도 경쟁사보다 2배 이상 줘 영업사원들이 앞다퉈 오포와 비보 제품을 팔도록 만들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소비자들은 또래나 주변 사람들이 많이 쓰는 제품을 따라서 쓰는 경향이 있다. 오포와 비보는 대대적인 스타 마케팅을 통해 자사 제품이 많은 사람들이 쓰는 ‘대세 브랜드’라고 각인시켰다. 특히 오포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디자인으로 여성 소비자에게 인기를 모았다”고 설명했다.
둘째는 차별화 전략이다. 오포와 비보는 중국 스마트폰 업체임에도 가성비로 승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가격의 경쟁 제품보다 전반적인 성능이 떨어진다는 평이다. 그럼에도 오포와 비보는 항상 독특한 기능으로 소비자 눈길을 사로잡았다.
예를 들어 비보는 ‘음악 전문 스마트폰’으로 포지셔닝했다. 오디오 전문기업인 모회사 BBK전자의 노하우를 십분 활용한 전략이다. 브랜드 로고에 ‘Hi-Fi&Smart’라는 메시지가 명시돼 있을 정도다. 배은준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비보의 첫 번째 스마트폰 ‘X1’은 고품질 오디오 부품을 적용했다. 스마트폰과 함께 제공되는 이어폰도 젠하이저 등 오디오 전문 브랜드의 이어폰을 선택할 수 있었다. IT 전문매체 인가젯(Engadget)이 ‘오디오 마니아를 위한 스마트폰’으로 평가했을 정도”라고 설명한다.
오포는 2012년 세계 최초로 500만화소 전면 카메라를 탑재한 ‘Ulike2’를 출시했다. 당시만 해도 전면 카메라에 500만화소를 적용하는 것은 파격적인 시도였다. 타깃층인 여성들이 셀카를 자주 찍는다는 데 착안했다. ‘셀카 전문가’로도 불리는 F1 스마트폰은 전면 카메라 옆에 셀카용 플래시까지 장착했다.
2014년 출시한 ‘R9’은 심지어 1600만화소 전면 카메라를 달기도 했다. 후면 카메라(1300만화소)보다 화소 수가 높았다. R9은 강력한 셀프 카메라 기능과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출시 하루 만에 18만대, 나흘 만에 40만대가 팔려나갔다. 후속작인 ‘R5’는 스마트폰 렌즈 부위를 제외한 몸체 두께가 4.85㎜에 불과해 ‘세상에서 가장 얇은 초슬림 스마트폰’이라 불렸다. 비록 너무 얇게 만든 탓에 배터리 용량도 부족해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오포는 참신하다’는 이미지를 심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오포와 비보도 약점은 있다. 이는 ‘부부가오’라는, 회사 철학이 담긴 사명에 숨어 있다. 부부가오는 ‘걸음’을 뜻하는 ‘보(步)’ 자 2개에 높을 고(高)를 썼다. 즉 ‘천천히 걸어서 올라간다’ ‘서두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배은준 책임연구원은 “오프라인 매장을 중심으로 영업을 하다 보니 성장이 더딘 편이다. 온라인 중심으로 움직인 샤오미가 설립 초기에 스마트폰 수백만 대를 팔았던 것과 대조된다. 물론 천천히 다져가며 성장한다는 부부가오 전략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지만 해외 시장 개척에 있어선 느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포와 비보 외에도 BBK그룹은 또 다른 비밀병기가 있다. 바로 ‘원플러스’다. 오포의 마케팅 담당 임원이었던 피트 라우가 퇴사해 만든 스마트폰 제조사다. 오포와 비보가 400~500달러대 안팎의 중가 시장에 포지셔닝했다면, 원플러스는 샤오미처럼 온라인 위주 마케팅으로 가성비를 추구하며 300달러대 이하 저가 시장에 집중한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 LG, 화웨이 등은 한 기업이 같은 브랜드로 고가폰과 중저가폰 시장을 같이 공략한다. 반면 BBK그룹은 오포, 비보, 원플러스 세 회사를 통해 각 브랜드 특성에 맞는 고객층에 집중하는 ‘기업분할 전략’을 쓴다. 각 시장에서 더 전문적인 이미지를 쌓고 경쟁사의 특허 침해 공격도 피해가려는 의도”라며 “이런 시장 세분화 전략이 향후 스마트폰 시장의 새로운 경쟁 모델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승욱 기자 inye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71호 (2016.08.17~08.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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