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전만 해도 신사동 가로수길은 건물 1층에 가게가 들어선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브랜드 하나가 건물 전체를 다 쓰는 통상가가 눈에 띄게 늘었다. 패션, 뷰티, 액세서리, 라이프스타일숍 등 통상가가 줄줄이 들어선 가로수길 전경. [이충우 기자]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한남오거리 인근에 위치한 연면적 545㎡인 지하 1층~지상 4층짜리 중소형 빌딩을 커피브랜드 폴바셋이 '통임차'했다. 불과 4~5개월 전만 해도 지하 1층과 지상 1층은 일반음식점, 2층은 부동산중개업소, 3층은 학원, 4층은 주택 등으로 각각 채워졌지만 지금은 모든 층에 원두향이 가득하다. 인근 중개업소 관계자는 "스타벅스도 자리를 탐냈지만 폴바셋이 계약서에 도장을 먼저 찍었다"며 "젊은 사람들 발길이 늘면서 인근 건물 가격도 오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이태원 경리단길, 마포구 연남동 등 요새 뜨는 뒷골목 상권에 진출하려는 기업들 발길이 빨라지고 있다. MCM 매일유업 SPC 등 브랜드 파워를 갖춘 기업들이 골목길 건물을 잇따라 사들이거나 통째로 임차하고 있다. CJ 신세계 플라잉타이거코펜하겐 등도 골목길 건물을 사들이기 위해 둘러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업체는 건물 전체를 쓰기를 선호해 '통상가'가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통상가란 한 임차인이 건물을 통째로 쓰는 것을 뜻한다.
유통업계 큰손인 A사는 뒷골목에서 커피숍과 중식·일식 레스토랑 등을 한 건물에 몽땅 넣기 위해 통상가를 찾고 있다. 중견 외식업체 B사도 인기가 검증된 개별 맛집을 한 건물에 모으기 위해 경리단길 등에서 자리를 찾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남동 '패션5'나 강남역 'SPC스퀘어'가 롤모델이다. 지하철 3호선 신사역 일대 가로수길 초입 인근부터 신사중·현대고로 닿는 메인 도로 700여 m를 걸어보면 자주와 원더플레이스 등 라이프스타일숍부터 에잇세컨즈 폴로랄프로렌 에블린 라코스테 H&M 포에버21 스킨푸드 스와치 등 패션·뷰티, 고디바 등 디저트 계열까지 두서너 건물 건너 통상가다. 이면도로에도 건물 전체를 쓰는 베이커리카페 등이 늘고 있다.
뜨는 길의 원조 격인 가로수길은 이미 통상가 세상이다. 가로수길에 연면적 1289㎡인 지하 1층~지상 6층 중소형 빌딩 2층에 있던 스타벅스는 최근 자리를 떠났다. 1층에 있던 안경점도 문을 닫았다. 건물을 통임대하기 위해 건물주가 임차인과 계약 조건 등을 협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새 임차인을 들이기 위해 층마다 텅 비었거나 전체를 가리고 리모델링 중인 건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태원 꼼데가르송길 뒤편에는 지난 9월 뷰티 멀티스토어인 벨포트가 3층짜리 건물을 통으로 임차했다. 다세대·다가구주택이 밀집한 경리단길과 성수동 서울숲길 이면도로에도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해 여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생겼다.
경리단길 인근 중개업소 관계자는 "부동산 가치 상승에 따른 시세차익도 거둘 수 있어 기업들이 건물을 사려 해도 건물주들이 값을 비싸게 부르거나 팔지 않고 직접 세를 주려고 해서 매매를 포기하고 임차하는 사례도 적잖다"고 전했다.
송진욱 JLL(존스랑라살르) 리테일 부장은 "상권 발달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식음료(F&B) 매장에 이어 의류 등 판매숍이 생기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법인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와 패션, 라이프스타일숍 매장 등이 차례로 진출한다"며 "상권이 성숙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한 건물에서 식사하고 커피 마시고 쇼핑하는 등 온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건물에 작은 '브랜드 타운'을 만들려는 시도가 늘면서 통상가 형태도 다양해진다는 진단이다. 백화점에 입점하던 브랜드들도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다. MCM은 청담동과 명동뿐 아니라 가로수길에서도 건물을 통으로 쓰고 있다. 스와로브스키와 스와치 등 외국 브랜드도 뒷골목 상권에 관심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캐릭터 브랜드 '라인프렌즈 스토어'는 롯데백화점 명동점과 현대백화점 판교점 등에 이어 가로수길에서 지하 1층~지하 2층을 다 쓰는 가게를 내고 이달 초 이태원에도 3층까지 건물을 거의 다 쓰는 매장을 열었다. 한마디로 '쇼핑=백화점' 공식이 흔들리고 있는 것.
김성순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한국지사 상무는 "2010년 이후 글로벌 SPA 브랜드들이 강남역, 가로수길, 홍대 등에 진출하면서 10·20대 젊은 층은 쇼핑을 위해 백화점을 찾지 않을 정도로 거리 상권에 익숙해졌다"며 "백화점 매출이 떨어지자 백화점 이외 유통 채널을 확보하는 데 적극적"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체험형 마케팅이 인기를 끌고 상품을 다양화하면서 공간에 대한 수요가 커진 것도 통상가가 늘어나는 이유다. 예컨대 라인프렌즈 스토어 지하 1층에는 캐릭터 쿠키 카페가 자리 잡았고 1층에는 각종 인형과 소품, 2층에는 캐릭터가 그려진 의류가 전시돼 있다. 가로수길 이면도로에서 3층짜리 건물을 다 쓰는 디저트 카페엔 치즈케이크만 20여 개 종류를 판다.
통상가가 늘면서 개인 자영업자들이 이면도로로 점점 밀려나고 거리 특색을 잃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염려도 고개를 들었다. 건물값과 임대료가 널뛰기하면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가로수길 대로변은 3.3㎡당 2억원, 세로수길도 덩달아 뛰면서 3.3㎡당 1억~1억5000만원까지 치솟았다. 경리단길 이면도로인 장진우골목길은 불과 1~2년 전만 해도 3.3㎡당 2500만~3000만원 선이었지만 지금은 4500만~5000만원대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지난 3분기 이태원 상가 임대료는 지난해 같은 분기보다 52% 뛰었고 홍대와 신사도 22.3%, 13.8% 올랐다. 서울 전체 상가 임대료는 같은 기간 0.7% 올랐다. 임채우 KB국민은행 부동산전문위원은 "경리단길 시세는 이제 무릎 정도"라며 "기업 진출 등으로 상권이 발달하면서 더 뛸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반면 가로수길이 세로수길로, 이태원이 경리단길과 해방촌길, 한강진길로, 홍대가 합정동 당인리길, 연남동 등으로 상권이 확장되는 효과가 크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브랜드 파워를 가진 기업이 통상가를 내면서 앵커시설로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마중물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양미아 세빌스코리아 전무는 "뒷골목 상권 건물은 소유자가 여러 명인 곳이 많아 생각보다 기업이 원하는 만큼 통매입 또는 임차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며 "상권은 가꾸기 나름인 만큼 건물주와 법인 개인 자영업자들이 눈앞의 이익에 매몰되기보다 장기적으로 상권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임영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