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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사후 중국..상왕(上王)정치 퇴장·시진핑 독주 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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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14. 9. 2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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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사후 중국..상왕(上王)정치 퇴장·시진핑 독주 탄력

매경이코노미 | 입력 2014.09.22 09:23

 

 

 

올해로 88세를 맞이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의 병세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지병인 방광암이 급속도로 악화돼 생명 유지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 베이징 정가의 지배적 판단이다.

 



장쩌민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그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중국의 최고 지도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장쩌민이라는 존재가 사라졌을 때 중국 내에서 나타날 현실 정치에서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이유가 더 크다.

 


↑ 중국 3세대 최고 권력자였던 장쩌민 전 국가주석 병세가 악화되자 사후 권력구도에 중국 정치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매경DB>

 

 

장쩌민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으로부터 중국을 이어받은 최고지도자였다. 그가 중국 국가주석을 공식 역임한 기간은 1993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이지만 중국을 실제로 통치한 기간은 무려 16년에 달한다. 1989년 톈안먼 사태자오쯔양 당 총서기가 실각한 이후 덩샤오핑이 내세운 후계자가 바로 장쩌민이었다. 그는 2003년 후진타오에게 국가주석직을 물려준 뒤에도 2005년까지 2년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더 유지했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 지병 악화에 상하이방 계파·원로정치 막 내려 시진핑 주석 1인 지배체제 강화

 


장쩌민은 자신을 추종하는 정치 그룹을 키우면서 세력을 다졌다. 중국 최대 정치 계파로 평가받는 이른바 '상하이방'이다.

 

상하이에서 멀지 않은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난 장쩌민은 상하이 교통대학 전기학과 출신으로 학창 시절부터 상하이 학생운동권의 핵심 인물로 두각을 나타냈다. 졸업 후에는 정통 기술관료로 착실히 성장했다. 그가 정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5년 상하이 시장에 발탁된 이후다.

 

덩샤오핑의 적극적인 천거가 주효했다. 이어 1989년 당 총서기에 오른 데 이어 1990년 4월에는 당 중앙군사위 주석까지 꿰차는 등 덩샤오핑이 설계한 후계 구도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실현됐다.

 


마오쩌둥을 넘볼 정도로 권력 기반을 다지고 있는 시진핑 국가주석도 상하이방에 속한다. 기본적으로는 혁명 원로 자제 그룹인 태자당이지만, 그 역시 상하이 인근 저장성에서 관료를 지낸 뒤 상하이 당서기를 맡은 것을 계기로 중앙으로 전격 발탁됐다. 시 주석이 2007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됐을 때 그를 밀어준 것도 상하이방이었다.

 


상무위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사법 처리 절차를 밟고 있는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 겸 당 중앙정법위 서기도 상하이방의 일원으로 장쩌민의 최측근이다. 최근 장쩌민 병세가 급속히 악화된 배경에 저우융캉의 실각이 자리 잡고 있다는 소식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

 



장쩌민의 사망은 상하이방에 엄청난 타격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장쩌민 없는 상하이방은 날개 잃은 새와 다름없다. 더구나 시 주석은 계파보다 정치 이력을 더 중시한다. 지방 관료 시절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들을 중앙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근무했던
푸젠성과 저장성, 상하이시 등에서 직접 겪었던 인물을 중용하는 편이다. 계파정치보다는 측근정치에 의지하는 셈이다.

 


계파정치가 수그러들면서 원로정치도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 중국 전·현직 지도부가 매년 여름이면 허베이성 휴양지 베이다이허에 모여서 개최하던 '베이다이허 회의'가 올해는 약식으로 개최된 것도 원로정치의 쇠퇴가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베이징 정가의 한 소식통은 "원로정치의 폐해를 가장 뼈저리게 경험한 후진타오가 국가주석직을 물려준 이후 스스로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원로정치 퇴조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베이징 = 정혁훈 특파원 moneyju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74호(09.17~09.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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