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봉길 의거 후 김구선생은 지아싱에서 피신 생활을 하면서 항저우 등지를 다녔다. 지아싱 정부는 이를 기려 김구 피난처를 기념공원으로 조성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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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보면 동아시아 난제 해법 보인다
▲ 충칭 한국 임시정부 해방을 맞았던 충칭 옌화디의 임시정부 구지. 정부와 기업이 힘을 모아 기념관을 만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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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선생은 임시정부의 초대 정무국장을 맡았다. 지금도 초라한 모습으로 명맥만을 유지하는 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3·1만세운동 이후 이곳에 모여들어 임정을 만들었던 이들은 너무나 궁핍한 생활과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운 조국의 현실에 하나둘씩 변심해서 이곳을 떠났다.
▲ 상하이 루쉰공원 윤봉길 의거 기념비 상하이 루쉰공원(원명은 홍코우 공원) 내에 있는 윤봉길 의사 의거터. 내부에는 윤의사의 호를 따서 만든 매정 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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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옌안 항일군정학교 충칭 임시정부시기부터는 좌우가 연합해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다. '아리랑의 노래'를 쓴 김산이 물리 등을 가르쳤던 연안 항일군정학교는 많은 독립투사가 공부했던 곳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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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임시정부는 일본을 피해 중국 곳곳으로 피신해야 했다. 초반기에는 임시정부 사무실은 지아싱과 항저우를 전전했다. 김구 선생도 지아싱과 하이옌 재청별서 등을 움직이면서 피신생활을 했다. 지아싱 메이완지에에 있는 김구 피난처와 하이옌의 재청별서, 항저우 후비엔춘은 한국이 국제적 위상이 커지면서 관련 기념관이 만들어졌다.
▲ 이곳에서 김구선생과 이청천 등이 회의를 하다가 이운한의 저격을 받고, 죽음 직전까지 다달았다. 후난성 정부는 이곳에 임시정부 기념지를 만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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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요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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