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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동포사회에 들어온 한국, '독'일까 '약' 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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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14. 8. 2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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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인근 고려영진의 정부 고려군들이 주둔했던 지역에서 이름이 유래한 고려영. 우리 선조의 마을은 동북은 물론이고 푸젠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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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천년 동안 중국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은 나에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역사를 접하면서 나는 시간 차에 따라 중국 땅에 정착한 이들을 만났다. 이제는 아무런 흔적조차 없는 신라방, 지명만으로 남아있는 고려영(高麗營)이나 고려보(高麗堡) 같은 마을들을 만난다. 반면에 우리 말조차 잃었지만 중국에는 없는 성씨라 국적을 회복한 박씨촌(朴氏村)의 주민도 있다.

 


하지만 중국 속에 가장 넓게 존재한 우리나라 사람은 흔히 '조선족'으로 불리는 '중국 동포'들이다. '중국 동포'들의 고향은 만주다. 만주는 고구려 이후 한민족이 거주하기 쉽지 않았다. 강희 7년인 1668년, 이곳이 청나라가 발생한 신성한 지역이라고 해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는 봉금령이 실시됐다. 청나라가 강성할 때는 출입조차 어려웠지만 대기근이 들었던 1869년 기사년 재해 이후 우리 민족들이 하나둘씩 만주로 생활 영역을 넓혔다.

 


이후 3년간 이곳에서 건너간 사람이 6만 명이고 그 가운데 함경북도에서 넘어간 사람이 2만6000명으로 전한다. 이후 우리 유민과 중국인들의 마찰을 막기 위해 간도(間島)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한민족의 만주 유입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더욱 빨라졌다. 수많은 이들이 일제의 치하에 들어간 우리 땅을 벗어나 만주 등 중국에 건너왔다.

 


당시에 일본은 GDP도 조선의 수십배였고, 치밀한 정보전을 통해 일거에 한반도를 장악했다. 뜻있는 이들은 초반기에 제거의 대상이 됐고, 그것을 아는 많은 이들이 중국을 해방의 근거지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만주사변(1931년)을 거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중일전쟁(1937년 7월) 이후에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1945년 해방은 만주에서 살아가던 많은 우리 민족에게 변화의 시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짐을 꾸려 고향에 내려갔지만 그에 못지 않은 이들이 동북에 남았다. 주로 많이 남은 이들은 대기근 이후에 이곳으로 건너온 이북 출신이었다. 이들은 휴경지와 같았던 이곳에 벼농사 등 새로운 생산기반을 만들어 나름대로 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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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조선족 자치주의 작업을 한 주덕해 기념비 주덕해는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조선족 자치주의 초기 작업을 했다. 문화, 교육의 터전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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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복잡한 정세, 중국도 마찬가지

 


해방 후 한반도는 복잡한 정세의 연속이었고,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공산화되기까지 복잡한 형세가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었다. 초대 연변조선족 자치주 주장을 지낸 주덕해(朱德海)다. 주덕해는 공산화 전부터 우리 민족 예술을 부흥시키는 문공단을 만드는 것을 비롯해 교육·언론·농업 등에서도 독자적인 기구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문공단은 후에 '연변가무단'이 됐고, 동북조선인민대학은 '연변대학'이 됐다.

 



당시 인구로 보거나 정치적 지형으로 보거나 자치구의 성립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21년부터 1982년까지 길림성에서 희생된 3만6천 명의 열사 가운데, 연변 열사가 1만4756명이고, 그 가운데서도 1만3843명이 조선족이었다. 무려 93.8%다. 조선족의 숫자가 당시에 100여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족 자치구의 성립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국 혁명 열사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인 주덕해 주장이 문화대혁명에 후베이성으로 피신했다가 비극적으로 숨을 거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 현대사도 만신창이였다. 대약진으로 인한 기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포함된 문화대혁명 등은 조선족 사회에도 큰 시련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총을 들고 무장투쟁을 한 유일한 소수민족이었다. 그만큼 조선족 사회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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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산문 중국은 장백산으로 표시하고 있다. 한자 위에 한글로 표기한 것도 지워버렸다. 사진은 7년여전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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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해방 당시 100만 명 가량이던 조선족 인구는 200만 명 가량으로 늘었다. 동북 뿐만 아니라 연해지방은 물론이고 네이멍구, 깐수 등 서북부 지역까지 넓게 분포했다. 조선족은 언어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문화를 유지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다. 또한 중국 정협 부주석을 지낸 조남기 장군을 비롯해, 소수민족 사업을 총괄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이덕수 주임(장관급), 중국 공군을 세운 인물 중에 하나인 이영래 공군 중장, 락스타 최건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이런 동포사회에 가장 큰 격랑은 1992년 한중수교였다. 한중수교로 우리 기업의 중국 진출이 봇물을 이루자 한국어와 중국어가 능숙한 동포들의 쓰임이 많아졌다. 대도시로의 급속한 이주가 시작됐다. 친척 방문 등의 방식으로 한국으로도 급속한 인구 유입이 진행됐다.

 



200만 명의 동포 대부분이 동북3성에 거주했는데, 20여년만에 그 인구는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부모가 떠난 자리를 조부모가 대신하는 조손가정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한국어를 가르치던 조선족 학교도 급속히 폐교되어 갔다. 중국 내 문맹률이 가장 낮았고, 교육과 과학쪽을 주도하던 동포의 세력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취재 중에 만난 중국 동포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중국 공산당학교 교수를 지낸 최용수 교수가 바로 그분이다. 최 교수를 만난 것은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KBS 스페셜)의 현지 코디네이션을 맡으면서다. 취재진은 최 교수님을 인터뷰했고, 개인적으로 '한락연'에 관심을 가져보라는 말과 최 교수님이 정리한 '한락연' 회고집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2008년 귀국 후 시간을 두고 연락을 했다가, 최용수 교수의 부음을 들었다. 통화를 하는 사모님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최 교수의 죽음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고, 평상시 그가 심혈을 모아서 수집했던 자료에 관심을 갖던 한국인이 하나도 찾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장례를 치렀다는 소식 때문이다. 최  교수는 아픈 몸을 이끌고 한국 답사단의 옌안(延安) 답사에 동행해 주었고, 결국 한국에서 강연하다가 쓰러졌다.

 

 

거의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몸으로 중국에 돌아와 투병했지만, 2008년 8월 끝내 세상을 떠났다. 나 역시 뒤늦게 부음을 듣고, 그를 기리는 기사 한편 쓴 것이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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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양의 한국인 거리 서탑 선양은 동포들이 많이 있는 랴오닝의 중심도시로 일찍부터 한국 문화가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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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교육수준이나 능력에서 탁월한 힘 보여


 

20여년의 시간은 중국 동포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들은 한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이나 유럽 등 어디를 가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보유하게 됐다. 가사 도우미나 식당, 막노동 판 세계에서 동포들을 만나는 일은 이제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 곁에 당당하게 자리한 젊은이들도 있다. '위대한 탄생'을 통해 부각된 백청강과 축구선수 백자건 등이 그들이다. 200만 밖에 안되는 소수민족 중 하나지만 조선족은 교육수준이나 능력에서도 중국에서 탁월한 힘을 보였다.

 


중국 동포들의 삶은 현대판 디아스포라라 할 만큼 역동적이었다. 특히 지난 20년간은 그 변화가 너무 컸다. 200만 명의 중국 동포가 살기에 중국은 너무 크다. 때문에 지금은 모두 섬처럼 살면서 한족 문화에 편입되어 가고 있다.

 

 

중국 동포 사회에서 그들을 묶을 수 있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는 분들을 봤다. 중앙민족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을 들이던 황유복 교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그렇다. 이들은 베이징 등 대도시에서 동포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중국의 각 지역은 물론이고, 세계로 흩어진 그들은 모으기는 쉽지 않다. 만약 한국이 오기전에 중국 정치나 경제, 문화, 과학 등에서 중국 동포들의 역량이 온전히 남아있다면 지금 중국 동포가 차지하는 위상과는 확연하게 다를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한중 수교 이후 중국 동포사회에 들어온 한국이라는 인자가 '독'인지 '약'인지를 섣부르게 판단내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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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과 중국을 연결하는 압록강 철교 지금도 북중을 연결하는 곳으로 많은 애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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