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 인근 고려영진의 정부 고려군들이 주둔했던 지역에서 이름이 유래한 고려영. 우리 선조의 마을은 동북은 물론이고 푸젠까지 있다 | |
ⓒ 조창완 |
지난 천년 동안 중국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은 나에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역사를 접하면서 나는 시간 차에 따라 중국 땅에 정착한 이들을 만났다. 이제는 아무런 흔적조차 없는 신라방, 지명만으로 남아있는 고려영(高麗營)이나 고려보(高麗堡) 같은 마을들을 만난다. 반면에 우리 말조차 잃었지만 중국에는 없는 성씨라 국적을 회복한 박씨촌(朴氏村)의 주민도 있다.
▲ 중국 조선족 자치주의 작업을 한 주덕해 기념비 주덕해는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조선족 자치주의 초기 작업을 했다. 문화, 교육의 터전을 닦았다 | |
ⓒ 조창완 |
한반도는 복잡한 정세, 중국도 마찬가지
▲ 백두산 산문 중국은 장백산으로 표시하고 있다. 한자 위에 한글로 표기한 것도 지워버렸다. 사진은 7년여전 상황이다. | |
ⓒ 조창완 |
이런 가운데 해방 당시 100만 명 가량이던 조선족 인구는 200만 명 가량으로 늘었다. 동북 뿐만 아니라 연해지방은 물론이고 네이멍구, 깐수 등 서북부 지역까지 넓게 분포했다. 조선족은 언어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문화를 유지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다. 또한 중국 정협 부주석을 지낸 조남기 장군을 비롯해, 소수민족 사업을 총괄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이덕수 주임(장관급), 중국 공군을 세운 인물 중에 하나인 이영래 공군 중장, 락스타 최건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거의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몸으로 중국에 돌아와 투병했지만, 2008년 8월 끝내 세상을 떠났다. 나 역시 뒤늦게 부음을 듣고, 그를 기리는 기사 한편 쓴 것이 고작이었다.
▲ 선양의 한국인 거리 서탑 선양은 동포들이 많이 있는 랴오닝의 중심도시로 일찍부터 한국 문화가 발달했다. | |
ⓒ 조창완 |
조선족, 교육수준이나 능력에서 탁월한 힘 보여
20여년의 시간은 중국 동포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들은 한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이나 유럽 등 어디를 가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보유하게 됐다. 가사 도우미나 식당, 막노동 판 세계에서 동포들을 만나는 일은 이제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 곁에 당당하게 자리한 젊은이들도 있다. '위대한 탄생'을 통해 부각된 백청강과 축구선수 백자건 등이 그들이다. 200만 밖에 안되는 소수민족 중 하나지만 조선족은 교육수준이나 능력에서도 중국에서 탁월한 힘을 보였다.
중국 동포 사회에서 그들을 묶을 수 있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는 분들을 봤다. 중앙민족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을 들이던 황유복 교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그렇다. 이들은 베이징 등 대도시에서 동포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 북한과 중국을 연결하는 압록강 철교 지금도 북중을 연결하는 곳으로 많은 애환이 있다 | |
ⓒ 조창완 |
중국이 미국보다 더 매력적인 이유 (0) | 2014.08.23 |
---|---|
中 인터넷기업의 변신을 주목하라 (0) | 2014.08.22 |
'경제전쟁' 앞둔 한국... 백범이 생각나는 이유 (0) | 2014.08.21 |
위안화 직거래, 초기 활성화에 성패 달렸다 (0) | 2014.08.19 |
중국 스마트폰 1위 오른 샤오미..한국선 호들갑, 중국선 오히려 차분 (0) | 2014.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