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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정말 문제가 많은 나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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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14. 8. 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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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막바지에 태어난 내게 어릴 적 중국은 나라라기보다는 '중공'이라는 적대단체의 성격이 강했다. 마오쩌둥 같은 인물에 대해 들었지만 그 이미지는 김일성과 다름없는 괴뢰 정부의 수장이었다.

그로부터 40여 년가량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이런 방식의 교육은 사라졌지만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여전하다. '중국기업' '중국 제품' '중국 관광객' 등 곳곳에서 부정적인 느낌이 잔존해 있다.

이런 느낌의 실체와 근원은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본다면 그 부정적 인식의 가장 확실한 근원은 중국의 한국 전쟁 참여일 것이다. '인해전술' 등 중공군의 느낌은 공포와 반발로 이어져 우리나라 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만들었다고 본다. 

 

또 미국이나 일본의 교육을 근간으로 자란 세대들은 중국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중국에 대한 생각에 깊숙이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흐름은 흔히 '워싱턴 컨센서스'로 불리는 미국식 경제 팽장주의에 맞물려 더욱 굳어졌다.


그렇다면 중화주의 실체는 무엇이고, 실제로 그렇게 공포스러운 것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그 중화주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중국에서 '중화'(中華)라는 개념은 명확한 실체를 갖고 있다. 근원적인 뜻은 중앙에 위치한 화하문명(華夏文明)을 의미한다. 화하문명은 염황시대부터 시작한 5000년 중국 역사의 발상지인 허난성과 샨시성 지역을 말하지만 광범위하게는 중국 전역을 포괄한다.

이 말을 공식화한 인물은 중국 근대학자이자 정치가인 량치차오(梁啓超)다. 그는 저작인 <동적월단>(東籍月旦)에서 이 말을 쓰기 시작했고, 정치가인 쑨원이 이 말을 공론화하면서 중국에 넓게 퍼지게 됐다. 실제로 중국 사람들은 이 말에 그런 인식을 갖고 있는데, 그 깊이는 그다지 깊지 않다. 오히려 중화는 중국에서 널리 애용되는 담배나 치약, 연필, 자동차의 브랜드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다음 생엔 중국인으로 태어나지 않겠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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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 라싸의 중국 해방 기념비 중국은 티벳인들의 중심 라싸를 점령한 후 신성한 호수 자리에 해방기념비를 세웠다. 그들이 말하는 해방이 티벳인들에게는 구속일 수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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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국인들에게 애국주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과정에서 중국인들이 보여준 정서는 그들에게 중화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도 보여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사례는 중국인들이 먼저 나섰다기 보다는 밖에서 보이는 중국에 대한 적대감에 중국인들이 반응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중화 패권주의가 빚었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중국은 지난 수년 사이에 G2국가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다. 주변국의 경계심도 이런 흐름 속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필자 이런 중국인들의 인식 변화를 곳곳에서 감지하고 있다. 그럼 이제 중국은 '중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패권주의' 국가의 형식을 보이게 되는 것일까.

사실 이런 걱정은 중국을 보던 이들에게 격세지감을 일으키게 한다. 그간 중국인들은 자긍심보다는 자국 문화에 대한 경계심이 적지 않았다. 그런 감정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이 대만에서 활동하던 문화 평론가 '보양'(柏楊, 1920~2008)이었다. 그는 '추악한 중국인'(醜陋的中國人)이라는 저작을 통해 통렬하게 중국인들이 가진 문제를 지적했다.

뿐만 아니었다. 홍콩 출신의 젊은 문화학자 종주캉(鍾祖康)도 2006년 <다시는 중국인으로 태어나지 않겠다>(來生不做中國人)라는 선정적인 제목의 책을 통해 중국인들의 민족성을 비판했다. 그는 홍콩 최고의 명문대인 중문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홍콩 반환을 만났고, 홍콩과 대만을 연결하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2003년 말 노르웨이인 아내를 만나서 이민을 간 후 지속적으로 중국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이 책도 그가 노르웨이에 체류하며 쓴 글이다. 책은 사실 중국인들이 가진 부정적인 모습들을 대부분 설명한다. 가래침을 뱉는 나쁜 습관에서부터 빈부격차 등 제도적 문제까지 언급한다.

개중에는 중국인의 백인숭배, 사적인 것은 있어도 공적인 것이 없는 습성(70쪽), 잔인한 형벌, 주변 민족에 대한 경시(120쪽) 등으로 광범위하다. 마지막에는 그가 지금 살고 있는 노르웨이와 비교해 중국인의 낙후성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이런 부정적인 면들의 총체는 그가 소개하는 한 누리꾼의 의견인 "다음 생애에 돼지로 태어날지언정 중국인으로는 태어나지 않겠다!"(22쪽)로 이어진다.

 


중국, 정말 문제가 많은 나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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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렬한 작품으로 중국인들의 문제를 지적했던 루쉰 '아큐정전', '약' 등의 소설을 통해 중국인들의 정신을 고치고자 했던 루쉰. 그의 고향 샤오싱은 근현대 혁명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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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중국인들은 정말 문제가 많은 민족일까. 이것 역시 하나의 편견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비판에 대해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중국인들의 문화적 특성을 오히려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는 중국이나 일본 등의 문화를 비평하는 책은 좀 많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족성을 비판하는 책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중국 일반인들에게 '자국'은 어떤 것일까. 중국에서 10년을 살았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중국인들과 대면하는 필자에게 '중국인'이라는 단어는 정말 거대한 미궁과도 같다. 루쉰 작품에서 만났던 아큐나 공을기 등 근대적 인물이나 딩링(丁玲)의 작품에서 만났던 혁명기 인물 등도 생각난다. 아울러 위화(余華)나 차오웬쉬앤(曹文軒)의 작품에서 만난 사람들도 떠오른다.

루쉰의 소설 <약>에는 혁명가가 처형된 피를 만두에 묻혀 자식에게 먹이는 사람부터 피를 팔아서 자식을 살리려는 부모도 있다. 자식 앞에서 모욕을 당하는 아버지도 있는데 이 모두 우리의 부모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들이 문학 속에서 만난 인물이라면 드라마를 통해 만났던 수많은 정치가들도 있다. 책으로 봤던 마오쩌둥이나 장쩌민 같은 정치가들도 있고, 실제로 대면했던 중국 정치계의 지도자들의 얼굴도 스쳐간다. 아울러 첫 여행길에 창지앙(長江)의 배 위에서 만났던 평범하고 정많은 사람들과 내 아이를 봐주던 아주머니를 포함해 수많은 중국인들에 대한 인상이 있다.

중국은 한족을 포함하면 56개 민족이 한 나라를 이루고 살아간다. 지금 중국 인구에서 한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순수한 한족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은 얼마나 될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또 한족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지역감정처럼 중국에는 엄청난 언어의 차이도 있고, 지역 감정도 다양하다. 지금은 매스컴이 발달해 보통화가 통하지만 북경어와 상하이어는 절반도 같지 않고, 광동어와 같은 부분은 5%도 되지 않는다. 자연환경도 천차만별이라 겨울에는 영하 40도의 헤이허(黑河)와 영상 25도의 하이난(海南)이 공존한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성격도 천차만별이다.

누구라도 한 나라의 민족성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필자가 중국에서 산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톈진의 한 거대신문에 '매일 거짓말하는 한국인'이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그 칼럼은 거짓말을 통해 위기를 모면한 <토끼전> 같은 전통문화를 존중하는 한국인들이 여전히 거짓말을 일삼는다는 식의 논리 비약이었다.

필자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단합해 이 칼럼에 대한 사과문을 받아낸 적이 있다. 그 칼럼을 쓴 이도 베이징대학 교수로 있는 저명한 문화평론가였다. 말도 안되는 논거로 한국인의 국민성을 폄하하는 일은 옳지 않다.

 


중국인이 영어를 배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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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들의 치욕적 역사를 살려놓은 웨이하이갑오전쟁기념관 갑오년을 전후로 청나라 북양해군은 일본에 패배하면서 바다의 실권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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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보양이나 종주캉의 글이 아무런 논거도 없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맞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중국인이라면 상당히 유념해 볼 부분도 많다. 특히 종주캉은 대만은 물론이고 티베트, 위구르의 독립을 말하는 것은 그가 무늬만 중국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의 글은 분명히 비평적 관점을 갖고 봐야 한다. 이런 필자의 관점은 중국이 세계 양대 강국으로 성장하는 경제력 등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자기 민족을 좀 더 깊게 비평하기 위해서는 자기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자기 민족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비평을 위한 비평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점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지금 거주하는 노르웨이와의 일방적인 비교다.

경제발전이 국민성의 발전이라는 관점은 상당히 위험하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이 세계 최대 경제국으로 성장한다면 중국 국민성도 1등이 됐다는 논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중국의 교통질서나 공공질서가 엉망인 것을 인정하지만 기차 질서와 같이 빠르게 성장하는 예외적인 부분도 있다.

공산당이 헤게모니를 갖고 있다지만, 중국은 과거 황제가 지배하던 시대와 다른 시대다. 고로 나라의 방향은 민의에 의해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위정자들은 언제나 그 민의를 통제하고 싶어서 안달을 한다. 중국은 인민들보다는 8000만 명에 달하는 공산당원의 입장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공산당도 결국 인민들 속에 녹여있는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민의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중국에 있는 갈수록 커가는 중화주의를 만나는 일도 어렵지 않다. 중국에 산지 5년쯤 지났을 때 필자는 한 중국 전문가에게 "중국 사람들이 왜 영어를 배우는지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그 분의 답은 이랬다.

"중국 사람들은 영어를 배워서 미국도 자기들의 영역으로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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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난다오 어촌의 출항배들 중국은 바다로 가는 길을 뚷어야하고, 어민들은 어장을 확보해야 한다. 한국과 인접한 산동성이나 남중국해의 어업 거점인 하이난은 갈등이 빈번한 항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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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위험한 말이지만 상당히 공감 가는 말이었다. 실제로 중국의 남중국해 진출은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의 반발을 받으면서 위험한 수위에 치닫고 있다. 베트남에 진출한 중국 기업들은 반중시위에 밀려 나오고 있지만, 바다에서의 영역확대로 인한 문제인 만큼 큰 반발도 하지 못하는 상태다. 또 빈번하게 일어나는 신장이나 시장의 테러 들도 중국이 가진 중화주의의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중국의 소프트파워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제자백가를 배출한 지적 뿌리가 있고, 경제대국이라는 강점이 있다. 속도야 줄겠지만 이런 추세가 10년만 진행된다면 중국은 한때 세계 GDP의 30%를 장악하던 대국으로 다시 부흥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국은 한국에게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됐다. 반면에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직은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인식의 차이가 갈등으로 표면화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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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종희와 현지 부호의 묘 명말청초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황종희의 초라한 묘와 입구에 있는 현지 부호의 화려한 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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