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중국 '꽌시'에 대한 지독한 오해와 편견

중국관련

by 21세기 나의조국 2014. 6. 20. 09:20

본문

중국 '꽌시'에 대한 지독한 오해와 편견

[중국 속에서 15년 30- 사람①] 자칫하면 '감옥'이 될 수도
오마이뉴스 2014.06.20 11:36 최종 업데이트 2014.06.20 16:49 조창완(chogaci)

 

 

 

2013년 12월, 나는 CBS 라디오 '손숙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에 4차례에 걸쳐 중국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첫방송 시간을 시작했을 때 진행자인 손숙씨는 예정에 없던 오프닝으로 나를 당황하게 했다.

 


"생활 밀착형 중국 전문가 조창완씨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인상도 중국 분 같으세요"(손숙)
"오래 계서서 그런 것 같아요. 아닌가요?"(한대수)
"사실은 10년 정도 중국에 살고, 지금도 중국에 자주 갑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따라 체형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조창완)

 



기사 관련 사진
▲ 손숙 한대수 님과 함께 13년 12월 cbs에서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진행한 후 사회자분들과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나에게 중국사람 같다는 말은 어찌보면 당혹스러운 이야기인데, 사실 이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그다지 생경하지 않다. 15년 전 중국 땅을 밟으면서 시작된 소중한 인연을 시작으로 지금도 중국 관련 일로 살아가는 나에게 중국인 닮았다는 말은 그다지 불리한 소재는 아니다.

 


실제로 중국인들을 만날 때, 내 생김도 그렇고 중국어도 하기 때문에 그들은 더 쉽고 친근하게 나에게 다가온다. 이런 상황뿐만이 아니다. 처음 중국에 도착해 옆사람과 트인 공간에서 '큰일'(대변)을 봐야하는 상황도 바로 적응했으니, 개인적으로 중국에서 별로 거리낄 것이 별로 없다.

 


거기에 중국 음식에 대한 가림도 별로 없고, 중국 술도 좋아하니 어지간한 사람들은 한 번 만나면 곧잘 친해져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말을 던지곤한다.

 


"조창완씨는 중국에서 중요하다는 꽌시(關係)도 좋겠어요. 중국서는 뭐 하나를 해도 꽌시가 있어야 한다면서요?"
"꽌시요. 어떤 꽌실까요. 목숨을 같이 나누는 깊은 꽌시라면 저는 아마도 한 명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저런 연을 찾거나 일이 필요한 곳의 사람을 찾아 추진하는 그런 정도의 꽌시라면 많겠죠."

 


중국의 인적 네트워크, '꽌시'

 


지난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조정래 선생의 소설에서는 유독 꽌시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소설 속 주인공인 전대광이라는 인물도 중국에서 꽌시를 잘 활용해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상하이의 유력한 세관 쪽 고위공무원인 샹신원의 가정과 좋은 꽌시를 맺은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 꽌시 역시 마지막에 샹신원의 배신으로 연결되듯 목숨까지 연결되는 진정한 꽌시는 아니다. 앞에서 말한 합리적 인적 네트워크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하면 된다.

 


얕건 깊건 중국에서의 인적 네트워크는 상당히 중요하다. 때로는 한 사람의 운명을 때로는 한 시대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조금은 과장된 면이 있지만 홍순언(洪純彦 1530~1598)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으로 도탄에 빠졌던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불과 2개월 만에 한양이 함락되자 조선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한다. 당시 명나라 역시 국력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원군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때 원군을 부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 홍순언이다.

 

홍순언이 젊은 시절 명나라로 사신으로 갔다가 기녀로 만난 여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자신의 돈을 털어주었다. 이 여인은 장사를 치르고 예부상서 석성(石星)의 후실이 되었는데, 그녀가 홍순언의 상황을 알고 힘을 써주어 파병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기사 관련 사진
▲ '아리랑'의 김산 등이 강의하기도 했던 항일군정대학 중국 혁명의 성지 옌안에 있는 항일군정대학, 이곳에는 김산 등 많은 한국인 혁명가들이 중국과 협력에 일제를 대항하고자 찾았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이런 인적 네트워크는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되던 시기에도 되풀이 된다.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열렸던 연합군 승리 이후 처리에 대한 회의에는 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중화민국 장제스 등 세 명의 총통이 참석했다.

 


일본과의 전쟁과 승리 이후를 이야기한 이 회의에서 "현재 한국민이 노예 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라는 특별 조항을 넣는다. 한국과 관계 없었던 이 회의에서 이런 조항이 들어가는 데는 루스벨트와 장제스의 한국과의 인연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루스벨트가 한국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 참모에게 지시해 구해 읽은 서적은 님웨일즈가 1941년 뉴욕에서 출간한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였다. 한국 사람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중국에서 행했던 고난의 투쟁을 담은 이 책은 루스벨트에게 한국과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장제스도 마찬가지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있었던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기념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이 사망하고, 해군총사령관인 노무라 중장이 실명하는 등 중국을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장제스는 "3억 중국 인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면서 이후 한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그 이후 네트워크로 인해 카이로회담에서 이런 특별조항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관계와 이후의 결과들은 그저 막연한 인적 네트워크가 아닌 끊임없는 노력과 진심을 통해서 지속된다.

 


한중간 '꽌시'는 어떤 모습?

 


그럼 한중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1992년을 전후로한 시기부터 지금까지의 중국 속, 혹은 한중간 인적 네트워크는 어떤 모습일까. 

 


과거 만난 한 선배는 1991년의 중국에 대해 그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1992년 9월28일 있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과 양상쿤(楊尙昆 1907~1998) 당시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실무팀에서 일했었다.

 


너무나 노골적인 감시, 당시 칙칙했던 베이징의 분위기 등은 그분의 중국에 대한 첫 인상을 안 좋게했다. 특히 정상회담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팀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던 부분은 곤혹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상상이 간다. 돌이켜보면 그 때는 막 대사관이 설치되고 한-중수교의 첫발을 내딛던 시절이었다. 여전히 '죽의 장막'이었던 중국과 변변한 인사도 하지 못했던 때였다. 당연히 서로는 서로를 몰랐고, 그저 의례적인 일을 진행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기사 관련 사진
▲ 베이징 땨오위타이 1호 국빈관 우리나라 대통령들도 중국을 방문하면 보통 이곳에서 숙박한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나는 꽌시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가 이해하는 꽌시와 중국에서 실제로 통용되는 꽌시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우선 꽌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디까지의 친분을 꽌시라고 말할 수 있는 가에 대한 느낌과 실제도 엄연하게 존재한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서 꽌시를 말한다면 내가 상대방과 꽌시가 있다는 말은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각오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중은 1992년에 정식수교를 했으니 2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셈이다. 이 시간 속에 최상위권에서 일반 서민들까지 수많은 교류가 있었다. 영향력 있는 꽌시는 정치권이나 기업 등 한-중교류의 핵심이나 실질을 좌우하는 이들이다.

 

이런 가운데 한-중간에 자신의 목숨까지 나눌 수 있는 꽌시를 맺은 이들이 얼마나 될까. 단언컨대 이런 사람이 열 손가락을 넘어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 또, 그 층이 중국의 핵심지도자인 상무위원급, 아니 그보다 낮은 중앙위원급까지도 미쳐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앞 세대 지도자인 후진타오 주석만 하더라도 한국에 오면 꼭 찾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한 이세기 전 통일부 장관(한중친선협회 회장)이나 김한규 21세기한중교류협회 회장 등은 바쁜 일정에도 만찬에 초대하거나 선물을 전해 주었다.

 


하지만 현 지도부인 시진핑 주석으로 가면 이런 인적 네트워크가 약화된다. 이세기 전 장관이나 박준영 전남지사 등은 시진핑 주석이 저지앙성 당서기 시절부터 인연을 갖고 있지만 이전에 만났던 지도자들보다는 인연이 깊지 않다. 앞 지도자 세대만 해도 스포츠 교류나 경제 교류에서 깊은 관계가 있었지만 이번 지도부는 그런 교류가 상대적으로 적다.

 


현재 활동하는 7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한국에 대해서 나름대로 인식하는 이는 리커창 총리 정도밖에 없다. 리총리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랴오닝성 당서기로 있었는데, 그 때 STX가 따리엔 장싱다오에 대규모 조선소 투자를 결정했다. 이 때문에 당시 서기였던 리총리의 위상도 급격히 올라갔다.

 


'꽌시'에 대한 오해와 편견

 


꽌시의 가장 큰 매력은 물보라와 같아서 자신과 꽌시를 가진 이들의 꽌시가 곧바로 자신의 꽌시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즉 A가 B와 꽌시가 있다면 B의 친구였던 C도 A의 꽌시 영역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 유력한 이와 꽌시를 맺었다는 것의 의미는 무한의 가치를 가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꽌시에 가진 오해와 편견도 상당하다. 필자도 중국의 관료들과 만나서 술을 할 때는 호쾌하게 마시는 편이라 금방 그들과 친해진다. 그러면 곧바로 우리의 사이는 펑요우(朋友)가 된다. 좀 더 친해지면 나이를 따져서 꺼꺼(哥哥)나 디디(弟弟)가 된다.

 

이 정도 되면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 때 부탁을 할 수 있다. 이때 상대방의 능력에 넘어서는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또 나쁘게 말한다면 뇌물을 주려는 경향도 생긴다.

 


사이에 대한 잘못된 이해나 행동은 결국 자신을 옥죄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사실 중국에서 꽌시는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자신을 안에 가두는 감옥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사 관련 사진
▲ 중국 신화속 인물 신농씨가 만들었다는 솥 중국은 이런 솥이 의미하는 것처럼 모든 사상과 문화가 혼융되어 있는 나라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중국과 한국의 사상의 근원은 크게 차이가 없다. 원시종교사회는 유불선 등 사상을 받아들여서 각 나라에 맞게 정착했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은 거대한 문화의 솥(鼎)에 유불선은 물론이고 공산주의, 기독교 등 서양 사상까지 받아들여서 끓이고 있는 스타일인데,

 

한국은 한 솥에는 한 메뉴만 넣는다는 차이가 있다. 즉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는 불교를, 조선에는 유교를, 지금은 기독교 등 한 메뉴만 넣고 끓이려는 특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엄밀하게 보면 사람관계에서도 반영된다. 순간적인 부와 명예가 중국사람들의 심연을 파고 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칫 스스로는 꽌시라고 접근했다가 상대방이 거부감이 들면 있었던 친분마저도 망칠 수 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충심(衷心)을 다하는 것이다. 관포지교나 백아절현 등 수많은 우정에 관한 성어들이 있는 것은 중국에서 역시 우정과 사람관계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준다.

 


앞서 말한 그분들의 시대와 지금 한중간 사람들의 만남은 큰 차이가 있다. 오해와 편견 부분도 많이 풀렸다. 반면에 한국인이 중국을 보거나 중국인이 한국을 보는 호감도는 오히려 나빠진 구석이 있다.

 

그 부분은 언론의 부정적 보도 등도 있지만 사람과 사람의 교류도 그리 모범적이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 문제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의 교류에 있어서도 오해를 풀고, 좀 더 충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