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조광조, 김종직 등 조선 유학을 선도해온 이들은 왕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방식을 설계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이런 이념이 흔들릴 때는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 같은 정권 바꾸기까지 심심치 않게 일어났으니 왕 역시 신하들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 의문을 제기했던 루산회의 1959년 지앙시성 루산회의에서 대약진 운동에 의문을 제기했던 펑더화이는 이 회의로 비극적인 결론을 맞아야 했다 | |
ⓒ 조창완 |
반면에 중국의 황제는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 권위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중국사를 보면 수많은 이들에 간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례가 부지기수다. 그럼 신해혁명과 공산혁명을 치뤘던 당대는 어떨까.
당대 가장 복잡한 인물은 보시라이다. 태자당으로만 본다면 그의 부친 보이보는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보다 더 높은 인물이다. 거기에 잘 생긴 외모와 탁월한 두뇌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중국 당대 정치가 경고한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가 건드린 비늘은 중국 정권 전달의 흐름을 막지 말라는 것이었다.
▲ 건강을 과시하며 창지앙을 헤험치는 마오쩌둥 1966년 당시 76세였던 마오쩌둥이 건강을 과시하기 위해 창지앙을 헤험치는 모습. 이해로부터 문혁이 시작됐고, 10년후에 마오는 영면했다. | |
ⓒ 중국정부망 |
이런 분위기는 당대의 이야기는 아니다. 마오쩌둥은 정치적 위기였던 1955년부터 1976년까지 10차례 넘게 우한(武漢)에서 창지앙을 수영해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마지막 수영 도하가 1966년 7월 16일로 당시 나이가 76세였으니 그의 노력이 어지간했음을 알 수 있다.
개혁개방의 과정에서 스스로가 희생양이었다는 피해의식이 있었던 덩이 스스로 가해자가 되었던 만큼 중국사에서 이해와 평가는 복잡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다른 교민 매체가 톈안먼 사태에 관한 사실만을 실었다는 이유로 폐간되고, 관계자들이 조사를 받은 것을 보면서 이런 사실을 더욱 깊게 확인했다.
▲ 경제위기로 인해 짓다가 만 한 대기업의 건물 이 문제를 제기했다가 필자가 일하던 신문사 관계자들은 불안에 떨었다 | |
ⓒ 조창완 |
하지만 저널리스트로 갈등을 외면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었다. 나는 중국이 가장 예민해하는 부분을 제외한 것들은 가장 민감하게 건들었다. 한국에 대한 부정적 칼럼을 실은 중국 대형 신문사와 싸웠다. 권력층의 비호를 받는 우리 대기업의 문제도 기사화했다.
같이 가는 이들은 불안해 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중국이 역린만 아니라면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영역도 신문에서 방송까지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해 갔다. 다행히 2008년 귀국 때까지 중국과 한번도 갈등을 만든 적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과 같이 성장해가는 이웃나라 친구라는 점은 분명히 잊지 않았다. 비판적인 글도 많았지만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이 중국에 관해서 소개했고, 때로는 그런 문제를 짚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역사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쉽게 예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기에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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