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로 날아든 철판, 의연하게 승객 지킨 버스 기사
[중국 속에서 15년 ⑭] 2102년, 댜오위다오, 황옌다오 영토 분쟁 본격 대두
오마이뉴스 2014.03.20 15:28 최종 업데이트 2014.03.20 18:17 조창완(chogaci)
2012년, 정초부터 중국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벌어졌다. 1월 3일 오전 9시30분 일본 오키나와현 이시가키(石垣)시의 시의원 4명이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의 가장 큰 섬인 댜오위타이에 상륙한 것이다.
중국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외교부 홍레이 대변인은 "나는 댜오위다오와 부속도서가 예전부터 중국의 고유영토며 중국은 이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주권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재차 밝힌다"며 영토주권의 차원에서 수호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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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 외국 정상이 오거나 주요한 회의가 열린다. 6자회담도 대부분 이곳에서 열린다 |
ⓒ 조어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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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에게 댜오위타이는 너무 익숙한 말이다. 중국에서 외국사절을 영접하는 대표적인 국빈관의 이름으로 베이징 서부에 자리한 국가의 주요시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의 명칭은 댜오위다오에 있는 섬에서 따온 것이라기 보다는 주문왕을 도와 패업을 이룬 강태공이 낚시를 했다는 장소에서 유래됐다고 보는 게 더 맞다.
또 전국시대 도가의 창시자인 장주(庄周)가 낚시를 했다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측면이 있지만, 일단 명칭이 같은 이상 중국 국민들이 이 사건으로 느끼는 감정은 남달랐다.
댜오위다오를 두고 사건이 일어난 것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 해가 남달랐던 것은 이런 명칭이 주는 파장도 컸던 게 사실이다. 이후에도 중일간의 분쟁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다.
일본은 섬 한 곳을 국유재산에 등록했고, 4월에는 일본 관방장관이 이곳의 국유화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여름에는 중국이 이곳 인근에서 실탄 훈련을 실시했으며, 8월에는 중국 25개 대도시에서 반일 시위가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됐다.
9월에는 80개 도시로까지 반일시위가 확산되고, 일본제품 불매운동이나 일본산 차에 대한 노골적 공격도 일어났다. 9월에는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평화적 해결 가능성을 말했지만 일본과 대만 순시선이 해상에서 물대포 공격을 주고 받는 등 충돌이 벌어졌다.
댜오위다오는 일본 오키나와 서남쪽 400킬로미터, 중국 동쪽 350킬로미터, 대만 북동쪽 190킬로미터에 위치한 6.32평방킬로미터의 크지 않은 섬과 암초로 되어 있는 지역이다. 하지만 단순한 섬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섬을 소요하는 국가는 인근 해상경계선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나라의 국제전략에서 더 없이 중요하다.
일본과 미국은 해안선 확대 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양 진출을 제어할 수 있는 전략적 가치에 대해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의 외화 대부분을 일본에게 제어당하는 상황에서 필수적으로 얻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 섬은 일본에게 치명적인 문제를 안길 수 있다. 우선 이 섬의 문제 뿐만 아니라 원래 유구국으로 불렸던 오키나와 지역의 영토문제로까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구국은 중국의 왕조들은 물론이고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와 교류하던 독립국가였다.
명대에도 책봉국으로 중국과 깊은 인연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시대부터 일본의 침입을 받기 시작하다가 1879년 일본으로 강제 병합되어 멸망했다.
이 시기는 일본이 명확하게 제국주의적인 의지를 가진 시기로 국제 평화의 측면에서 보자면 오키나와는 다시 유구국으로 독립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럴 경우 일본은 물론이고 이곳을 주요 전략기지로 쓰는 미국조차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중국도 이런 역사적 상황을 간과할 수 없었다. 특히 동중국해에 광범위하게 퍼진 심해자원을 확보하고, 대양으로 나가는 길을 열기 위해서 드물게 일반인들의 반일시위를 묵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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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성반월 현상 달이 일식으로 반밖에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위쪽에 금성과 목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 |
ⓒ 중국천문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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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신기로운 현상 관측된 2014년
2월 26일에는 하늘의 신기로운 현상인 쌍성반월(雙星半月)이 중국 전역에서 관측됐다. 달이 일식으로 반밖에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위쪽에 금성과 목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외에도 4월 16일 토성충일(土星沖日 토성, 지구, 태양이 일직선으로 배치되는 것), 월편식(月偏食 6월4일), 금성릉일(金星凌日 6월6일), 월식(月食 11월28일), 목성합충(木星合沖 12월3일)이 계속 관측 돼 천체 망원경 업계를 기쁘게 했다. 이런 현상은 새로운 지도자인 시진핑 시대를 예고하는 징조 같아서 복잡한 감정을 오가게 했지만 큰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앞서 중국과 일본의 댜오위다오 문제가 화두였다면 이번에는 필리핀과 해상 영토 분쟁이 화두가 됐다. 4월 10일 12척의 중국어선이 황옌다오(黃岩島 필리핀명 파나타그 암초) 시후(潟湖)에서 조업을 했는데, 필리핀 해경이 저지하자 중국 군함이 접근하면서 문제가 일어났다. 중국과 필리핀의 영토분쟁은 일본이나 미국 등과의 복잡한 정서를 동반하고 있어 지속적으로 문제 소지를 안고 있다.
5월 29일 아침 24명의 승객을 태우고 항저우에서 우시(無錫)로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에 길이 30센치짜리 철판이 날아들었다. 철판은 47살의 운전사 우빈씨의 복부를 통해 들어와 간을 파괴했다. 승객들은 거의 감지하지 못했는데 우빈씨는 차를 안전하게 몰아 길가로 주차하고 혼절했다.
인근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는 6월 1일 사망했다. 그의 의연한 자세가 버스내 CCTV카메라로 찍혔고, 이것을 본 중국인들은 감동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중국인들에게는 큰 감동이었다. 마침 이해 8월15일은 레이펑'(雷鋒) 서거 50주년이어서 그의 행동은 레이펑에 비견되곤 했다.
레이펑(1940~1962)은 빈농 출신으로 7살 때 고아가 되었다. 이후 아동단, 소년선봉대, 공산주의청년단을 거쳐 1960년에는 군에 입대해 1962년 8월 교통사고로 스무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의 일기장이 공개되면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일기장에 적힌 내용은 근검절약의 습관을 비롯해 봉사와 희생정신이 가득했다. "녹슬지 않는 못이 되어 조국을 위해 봉사하겠다" 등의 문구는 그로 인해 유명해졌다.
이듬해 3월 마오쩌둥(毛澤東)은 '레이펑 동지를 따라 배우자'(向雷鋒同志學習)라는 교시를 내렸다. 중국 정부도 매년 3월 5일을 '레이펑 학습일'로 지정하는 등 중국 내에서 영웅으로 만들었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1959년 주석직을 사임했던 시기여서 주도권을 장악할 어떤 꺼리를 만들 만한 구실이 필요했는데, 레이펑이 우상화에 적합한 인물로 판단된 것이다. 목적을 떠나서 이후 레이펑은 중국에서 희생 정신의 대명사가 됐다.
승객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차를 지킨 우빈씨의 사례는 현대판 레이펑으로 추앙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때문에 이 사건은 그해 내내 회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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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민해방군 홍콩빌딩 일국양제를 표방한 만큼 중국은 홍콩의 체제에 대한 간섭을 배제하고, 군대를 통해 홍콩을 관리하는 상징적 건물이다 |
ⓒ 조창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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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주석, 홍콩 반환식에 참여한 이유
2012년은 1997년 7월1일 홍콩이 반환된 지 15년이 된 해였다. 이해 행사에는 후진타오 주석이 참석했다. 홍콩을 반환할 때 중국의 약속은 일국양제를 통해 홍콩이 향후에도 자본주의 국가와 같은 제도적 상황을 유지할 것을 천명했다. 지속적으로 정보나 경찰력을 강화했지만 홍콩은 자유로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이때까지 홍콩 남부의 번화가인 센트럴에서는 파룽궁 관련 항의시위가 가능할 정도였다. 반환 이후 홍콩인들의 가장 큰 걱정은 사회주의 통치도 있었지만 홍콩이 가진 금융, 물류 등의 기능을 본토에 빼앗기는 것이었다.
홍콩이 가진 물류는 선전 등으로, 금융은 상하이 등으로 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홍콩은 중국 대륙의 자본이나 유학생들이 세계로 가는 허브 기능이 강화되면서 경제발전 속도 등에 큰 문제가 일지 않았다.
이런 홍콩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후진타오 주석의 홍콩 반환식 참여했던 것이었다. 아울러 이해를 마지막으로 주석직을 마치는 입장에서 홍콩에 대한 존중의 의미에 따른 방문이기도 했다.
9월 28일 중공중앙정치국 회의가 열려 18차 전국대표대회의 일정과 참석 당원 명단 2270명을 발표했다. 후진타오에 이은 차기 지도자 확정 작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전문직 공무원으로 들어와서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일을 해가는 방법도 나름 익혔다. 그런 가운데 두가지 일을 중점적으로 했다. 하나는 내가 집중적으로 투자유치를 하는 중국의 눈으로 새만금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인민일보 등에 부탁해 새만금에 관한 특집기사를 싣고, 중국사회과학원에 중국의 관점에서 새만금의 가치를 평가하는 연구 용역을 진행했다. 국내 연구 용역에 비해서도 턱없이 낮은 비용이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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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만금 이야기 여행의 안내도 만이와 금이가 월영선생의 안내로 새만금 지역과 역사적 인연이 깊은 인물들을 만나는 극으로 꾸몄다 |
ⓒ 조창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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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가지 가장 역점적으로 추진한 일은 새만금 이야기들을 정리하는 스토리텔링이었다. 새만금에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흩어져 있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를 믿고 도와주던 김용만 산업본부장(현재 전라북도 민생일자리본부장), 전북일보 조상진 논설위원 등과 같이 메인으로 세울 이야기를 선정하고 각기 자료를 정리했다.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장생 약을 찾아 떠났던 서복이 들른 선유도, 중국에서도 필명을 떨친 최치원,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추앙받는 김교각 스님 등의 출항지, 중국에서 고려도경을 쓴 서긍이 김부식 등의 영접을 받던 군산진, 백강전투와 죽막동 유적등 일본과의 교류, 중국 친구 이원의 도움으로 화약을 발명해 진포(지금의 군산)에서 왜구를 물리쳐 동아시아 바다에 평화를 가져온 최무선 등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다행히 대부분 중국과 연관이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나는 어린 남매가 최치원 선생의 정령인 안내자의 도움으로 이 역사 인물을 만나러 다니는 만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내 주 업무인 투자유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을 공무원 조직에서 수행하는 일은 쉽지도 않지만 평가를 받기도 쉽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이런 경계를 인정하면 그 순간 나는 정주하는 정착민이 된다는 생각으로 경계를 넘어설 때 같이할 우군을 모아서 만들어낸 좋은 결과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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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수수밭의 작가 모옌 이 해 본토작가로는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
ⓒ 중국작가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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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1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중국 작가 모옌(莫言)이 발표됐다. 까오싱젠이 먼저 받았지만 재불작가였기 때문에 본토에서는 첫 수상자를 배출한 셈이다. 모옌(莫言)은 1955년 산동성 까오미에서 태어났다. 장이모의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이기도 한 모옌은 당국의 금지된 소재에 대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통해서 중국 본토에 있으면서 참여적 성향이 강한 작가에게 주는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의 대표작 '개구리'는 1970년부터 시작된 계획생육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훗날 군인이 된 커터우에게는 자랑스러운 고모 완신이있다. 산부인과 의사인 완신은 처음에는 지역 아이들을 받아내는 뛰어난 의사였지만 정부가 한 자녀만 낳게하는 계획생육을 시작하자 고집스럽게 그 정책을 수행하는 공무원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심지어 8개월 된 조카 며느리(커터우의 부인)의 낙태 수술을 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 에로스의 상징에서 타나타노트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는 상황이다.
중국인들에게 아이는 모든 인생의 상징인 만큼 그녀가 받는 고통도 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리하게 조카에게 아이를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등 중국 당대를 건너면서 고통스럽게 변모하는 기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 당대 정책에서 가장 큰 곡절을 가진 독생자녀 제도 등 중국인들의 인구 문제를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시각장애인 변호사로 독생자녀 제도에 저항하는 산동성 인권변호사 천광청(陳光誠)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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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공산당 신1기 상무위원 중국 공산당 신1기는 예전보다 2명 줄어든 7명으로 상무위원을 두었다 |
ⓒ 중국상무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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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6일에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가 재선됐다. 다른 헤게모니 국가인 중국의 새 지도부 선출 절차는 예정대로 11월 8일에 시작됐다. 보통 10월 중순에 열렸는데 한달여나 늦은 일정이었다.
세계 언론은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양자 권력 포기론 등 갖가지 소식을 전하기에 바빴다. 새로운 상무위원에 들어갈 명단에 대한 추측들도 쏟아졌다. 상무위원의 수도 다시 9명으로 늘린다는 말과 7명으로 그냥 둔다는 말이 오갔다. 드디어 11월 15일 새로운 상무위원회 위원 인사 시간이 돌아왔다.
예정대로 시진핑이 처음으로 회의장에 들어와 권력 승계자가 됐다는 것을 말해줬다. 아울러 이전과 달리 곧바로 총서기 직은 물론이고 중앙군사위주석도 이어받는 다고 전해졌다. 후진타오는 낮지만 강한 톤으로 다음 상무위원을 불렀다.
국무원 총리 리커창(李克强), 전인대 상무위원장 장더지앙(張德江), 정협 주석 위정셩(兪正聲), 중앙서기처 서기 류윈산(劉云山),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왕치산(王岐山), 부총리 장가오리(張高麗)가 호명과 함께 주석단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끝났다. 왕양과 리위앤차오는 물론이고 보시라이 등도 명단에 빠졌다.
12월 19일 한국 대선에서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51.2%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역시 같은 달에 치러진 일본 총선에서 자민당이 승리해 아베 신조(安倍 晋三)가 총리를 맡게 됐다. 모두 근대 한중일 정치사에 흔적을 남긴 정치가들의 자식들이었다. 본격적인 동아시아의 2대째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