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전화 사용자, 3년 만에 12억 명 돌파 이유
[중국 속에서 15년 ⑫] 2010년, 상하이 엑스포로 경제규모 2위로 등급
오마이뉴스 2014.03.18 10:30 최종 업데이트 2014.03.18 10:30 조창완(chogaci)
2010년을 맞는 중국은 다시 분주했다. 이해 6월부터 상하이에서 세계 최대의 전시행사인 엑스포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올림픽이 문화·체육의 거봉이라면 엑스포는 중국이 앞세우는 경제의 올림픽이었다. 머잖아 서서히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G1으로 성장할 거라 예측하는 이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었다. 엑스포는 그런 중국 경제를 자랑하는 자리였다.
중국에서 이런 행사로 가장 유명한 기존 행사는 캔톤페어로 불리는 '광저우수출입교역회'다. 매년 봄·가을 두 번 열리는 이 전시회는 반 년부터 일 년 후 세계시장에서 유통될 물건이나 유행을 파악할 수 있는 확실한 바로미터였다.
8000만 명의 관람객을 목표로 경제 엑스포 준비
광저우가 두 번의 행사로 말한다면 저지앙성 이우(義烏)는 매일 벌어지는 세계 소상품의 전시장이었다. 저지앙, 안후이, 푸젠 등 과거부터 상업이 흥성한 지역의 중간에 있는 이우는 이미 1만 명 가량의 한국인이 정주하면서 사업 아이템을 찾을 만큼 갖가지 물건이 흥성한 곳이었다. 중국 대상으로 수십 년간 사업하다가 재미를 못 본 한 대학 선배도 이곳에서 아이템을 찾아내 한국에 수입해 수백억 원을 벌었다고 한다.
이미 이런 자신감을 가졌으니 엑스포 행사를 유치해도 별다른 부담이 없었다. 이들은 8000만 명의 관람객 목표를 세우고 호기있게 행사를 준비했다. 황푸강의 남북으로 행사장을 만들고, 행사를 준비했다.
1월 21일에는 국가통계국이 전해 경제 성적을 발표했다. 국내총생산은 33만5353억위안(한화 6000조 원 가량)으로 전년대비 8.7% 성장한 수치였다. 세계 금융위기로 인한 어려움을 생각하면 만족할 만한 수치였다. 또한 이 수치는 중국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내수경제 진작이 서서히 정착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가는 사실상 원년이 잘 정착했음을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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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질주 왕푸징 백화점 안에 있는 전시 모습. 스포츠 산업도 급속한 성장세를 보였다 |
ⓒ 조창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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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중국 남자축구대표팀이 동아시아축구대회 4강전에서 한국팀을 3:0으로 이겼다. A매치에서 32년 동안 이기지 못해 붙여진 '공한증'(恐韓症)을 떨쳤다. 허정무호는 중국에 유독 강했던 이동국 선수를 비롯해 이근호, 구자철 선수 등을 내세웠지만, 유하이, 가오린, 덩주오시앙 선수에 골을 내주면서 긴 우월감을 떨쳐야 했다.
하지만 중국의 이 승리의 기쁨은 지속하지는 못했다. 중국 남자축구 대표팀은 2012년 올림픽은 물론이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예선전에서 맥없이 무너지면서 여전히 종이호랑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3월 26일 한국에서 천안함 사건이 벌어졌다. 한반도의 긴장은 중국에는 가장 큰 위협요소 중 하나인 만큼 사건에 대한 대처는 쉽지 않았다. 중국으로서는 관련 내용을 미사일에 대한 폭침이 아니라 "배의 뒤에서 원인 불명의 폭발이 발생해 침몰"했다고 보도했다.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뒤인 5월 28일에는 원자바오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서는 원 총리의 입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한 중국의 입장이 나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원 총리는 "누구도 비호하지 않겠다"는 애매한 답변으로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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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하이 엑스포 중국관 중국관은 너무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예약도 하늘에 별따기 였다. 필자 역시 겉으로만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
ⓒ 조창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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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상하이 엑스포가 시작됐다. 이에 맞추어 나는 <오감만족 상하이>를 출간했다. 10년여 동안에 낸 12번째 중국 관련서였다. 지하철에 맞추어 상하이를 코스별로 여행할 수 있게 했고, 상하이 인근인 항저우나 황산 등까지 동선에 맞추어낸 여행 책이었다.
1999년 상하이 체육관에서 열린 축구경기를 취재하러 간 후 이런저런 일로 일 년에 서너 번씩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일 주일여를 더 취재해 낸 책이었다. 대학 시절 접한 PC통신 하이텔에서 서평을 쓰기 시작했고, 사회의 첫발을 글을 쓰는 기자로 시작했다. 이후에는 펜뿐만 아니라 카메라나 동영상의 촬영 편집까지 다양한 활동을 했었다.
2010년 7월에는 중국 총생산액이 일본을 제치고 2위가 됐다. 구매력 평가기준으로 봤을 때 1인당 GDP는 세계 99위였지만, 아세안과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등 체질도 급속히 개선되고 있었다.
이동전화 사용자, 3년 만에 12억 명 돌파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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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거리에서 이동전화를 이용하는 이들 중국 이동전화 인구 증가세는 상상을 초월한다. 아울러 콘텐츠 산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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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는 핸드폰 실명제가 정식으로 시행됐다. 중국 핸드폰 시스템은 한국과 달리 단말기에 고유한 번호가 부여되는 CDMA 방식이 아닌 유럽식 GSM 방식을 채택했다. 그 때문에 싸게는 1만~2만 원짜리 핸드폰을 살 수 있었다. 또한, 유심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핸드폰 통화가 가능했다.
이런 속도로 증가한 이동전화 사용자는 2013년에 12억 명을 돌파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에서는 민감한 정보가 유통되는 이동전화를 정부가 통제하기 쉽지 않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때부터 중국 정부는 이동전화 실명제를 실시한 것이다.
다양한 갈등 요소를 막기 위해 중국 정부는 안전에 관해 치밀한 국가다. 국내 정보를 중심으로 한 총괄적으로 정보를 관장하는 국가안전부나 국제정보를 관장하는 통전부가 양대 산맥으로 미국이나 러시아에 버금가는 정보망을 가동하고 있다.
나는 그해 여름에는 사무실을 서울 여의도로 옮겼다. 기존에 하던 사업도 있었지만, <인민일보> 한국 대표처 사업국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2008년 가을부터 하던 한신대학교 외래교수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대학에서 내가 강의한 분야는 '중국 테마여행 플래닝'과 '다큐제작 실무'였다.
사실 창의력이 바탕이 되야 하는 만큼 나는 기획서나 블로그 운영 등을 바탕으로 학생들을 평가했고, 학기 중반에는 학생들과 맥주 한 잔하는 재미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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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어 2호 발사 장면 이 위성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위성 시대에 들어갔다 |
ⓒ 중국위성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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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에는 중국의 달 탐사위성인 '창어(嫦娥) 2호'가 시창(西昌)위성발사센터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이 위성의 목적은 달 선회비행으로 2기로 예정된 착륙을 위한 전 단계였다. 3기 공정은 달 표면 물질을 채취해 복귀하는 것이었다.
1969년 미국이 달 착륙에 성공한 이후 어느 나라도 진행하지 않았던 달 프로젝트를 2020년까지 목표로 추진하는 것은 중국의 과학기술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자, 우주시대 개척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1월 5일 새벽에는 타이위앤(太原) 위성발사센터에서 장정로켓을 추진체로 중국의 두 번째 기상 위성 '펑윈(風云) 3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중국의 우주 계획은 이후에도 지속해서 추진되어 2013년 12월 14일에는 '창어 3호'에 실려 우주로 온 옥토끼호가 달 표면에 착륙에 성공해 미국, 소련에 이은 달 착륙국가가 됐다. 옥토끼호는 큰 기온 차로 인해 2주일 만인 27일 '굿나잇 인류여, 굿나잇 인류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긴 휴면에 들어갔지만 100% 중국산이라는 점에서 중국인들에게는 큰 자부심으로 남았다.
또 다른 우주계획으로 2011년 9월 우주정거장인 톈궁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했고, 2013년 6월 23일에는 톈궁 1호와 선저우10호가 도킹에 성공해 본격적인 우주 정거장 시대를 열기도 했다.
11월 23일에는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났다. 명백한 무력행사여서 한반도 상황이 다시 급속히 냉각됐다. 26일에는 인민일보 계열의 국제시사신문인 <환치우스바오(환구시보)>가 북한을 맹비난하는 사설을 실었다.
"북한은 사실상 독약을 마신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런 식으로 계속 간다면 미래가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정치적으로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교착 사태에 빠진 북핵 6자 회담을 조기에 추진하기로 하고, 분주히 움직였다.
포격 사건을 전후해 나는 다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나라일터를 통해 새만금군산경제자유구역청에서 중국 관련 전문 인력을 뽑는다는 공고를 봤다. 제법 높은 직급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응시했는데, 의외로 합격했다.
내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진 분야는 투자 유치보다는 관광객 유치 등 곧바로 결과를 낼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경제청은 그 분야보다는 투자유치 본연의 역할을 중시해 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내 첫 역할은 새만금을 방문한 톈진 빈해신구 간부들의 통역과 안내였다. 이때 방문단의 가장 높은 직위는 쉬따통 상무위 주임이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중국 최대 경제특구인 빈해신구의 서열 5위 정도의 위치였다. 그 자리를 통역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한마디다.
"먼저 친구가 됩시다."
교류나 실질적인 일을 하기 전에 더 친해지자는 이 말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이 말을 제목으로 칼럼을 쓰기도 했다.
결혼 후 제대로 된 월급을 받은 아내, 함박웃음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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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톈진 빈하이신구의 번화한 모습 베이징, 톈진을 잇는 중국 최대의 경제특구로 성장했다 |
ⓒ 중국빈해신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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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부족한 중국어 실력으로 통역했지만, 그는 새만금과 우리 쪽 사람들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지속해서 교류가 이루어져 다음에는 새만금경제청과 빈해신구 간에 우호협력을 맺기도 했다.
발전 속도나 규모에서 차이가 있을지라도 상호 간에 신뢰가 생기면 협력을 해주는 중국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모를 확인하는 계기여서 뿌듯한 경험이기도 했다. 새만금경제청에서 내가 맡은 일은 중국 투자유치와 교류였다.
중국에서 투자유치를 할 때는 매립은 물론이고, 도로 등 기반시설을 모두 구축한 단계를 1단계로 파악하는데, 새만금은 대부분 지역이 매립조차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을 대상으로 투자유치를 하는 일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나는 개발의 시간에 맞추어 투자유치 전략을 수립하는 등 장기적인 실행을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 물론 관광객 유치나 스토리텔링 등도 포함된 계획이었다.
나를 타고난 노마드라고 생각했던 많은 이들이 나의 공무원 행을 걱정했다. 하지만 공무원 사회가 가진 틀 안에서 내가 가진 창의적 욕구를 펼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일도 흥미를 갖게 됐다. 결혼 후 처음 받아본 제대로 된 월급에 아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