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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과 떨거지들 천하를 얻다 >>>진승과 오광의 난이 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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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13. 10. 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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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과 떨거지들 천하를 얻다 

2013.10.0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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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중국 한()나라의 건국자 입니다. 또 동시에 중국역사상 평민출신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첫번째 인물이었습니다.

 

왜 그의 이야기를 하는가? 역사속의 유방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시대가 당면한 문제들을 풀 수 있는 힌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고조 유방 (B.C ? ~ B.C 195)

 

여러분이 역사적인 인물의 기록을 읽을때 마땅히 주의해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 역사적 기록을 남긴 사람의 편견이나 단견, 또는 승자의 역사조작은 물론이고 그 인물에 대한 '일반화'에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영국의 귀족이었던 필립 체스터필드는 '일반론을 주의하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 있어서도 정말 명언인데 예를 들면 영남사람은 거칠다든지, 호남사람은 잔꾀에 능하다든지 하는 것들이 모두 '일반론'의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같은 배에서 난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그 성격과 외모가 같지 않다는 것을 저는 두 자식을 기르면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하물며 한 고장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그 인간으로서의 성품과 특질은 같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역을 일반화하여 이야기하는것은 아주 어리석은 소견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점은 뭉뚱그려서 일반화된 특징들을 찾아내는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있는 차별화된 특별함을 읽어내는 것이야 말로 여러분의 안목을 신장시키는 힘이라는 점입니다. 일반론에 빠져버리면 우중(愚衆)이 되어버립니다.

 

 

 

1. 유방(劉邦) 그는 어떤 인물이었나?

 

유방이라는 이름은 훗날 그가 황제에 오른뒤에 붙여진 것입니다. 원래 그가 출신지인 패현(沛縣)에 살때에는 유씨네집 막내라는 의미로 유계(劉季)라고 불리웠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또한 사서에 이름이 없는것으로 보아 그의 집안은 평민 또는 천민의 집안입니다.

 



 

패현(沛縣)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 유방의 고향


 

 

그가 태어나고 또 훗날 소하,조참,번쾌등의 무리와 함께 거사하여 근거지로 삼았던 곳은 바로 패현(沛縣)인데 오늘날의 지도로 보면 북경과 상하이 사이에 있는 늪을 낀 평야에 있습니다.

 

패현은 교통의 요지로 오늘날에도 산동,강소,하남,안휘성의 4개성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인구는 적어서 120만가량 된다고 합니다(현재)

 

이곳은 교통의 요지이지만 늪지대라서 아마 유방의 시대에도 그리 큰 곳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서의 기록에 보면 사기 고조본기에는 유방에 대해서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혔다'라고 노골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색을 밝히는 호색한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기록들 때문에 별볼일 없는 놈이 천하를 얻었다는 식의 일반적인 묘사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목한 점은 이렇게 보잘것 없던 시절 유방의 배짱입니다.

 

그는 나이가 서른즈음이 되어서야 마을의 정장(亭長)이 되었는데 진나라 시대에는 10리마다 정()을 설치하고 이것을 열개묶어서 향이라고 하고 그위의 지방행정단위가 현()이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동장(洞長) 정도 될것 같습니다.

 

그런 보잘것 없는 직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내의 모든 하급관리들을 자기 밑의 사람처럼 대하고 부려먹었다고 하니까 배짱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일례로 그가 장인인 여문(呂文)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들어보면 역사적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여문은 패현에 잠시 피신온 유력자로 현령과 매우 가까워서 패현의 모든 유지들이 선물을 들고와서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그 선물(돈)을 수령하는 임무를 소하가 맡아서 했는데 돈의 액수가 천냥밑이면 대청아래에 앉도록 구분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방은 여문을 만나러와서 대청아래에 앉기 싫으니까 사례금 일만냥이라고 적어서 냈습니다.

 

엄청난 액수를 적어서 내니까 여문이 깜짝놀라서 어서 위로 올라오시라고 청했겠지요. 그때 소하는 익히 유방의 허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넌즈시 여문에게 "유계라는 사람은 큰소리만 치지 실속은 없습니다"라고 주의를 줍니다.

 

그런데 여문은 아랑곳하지않고 유방을 좋은자리에 앉히고 대접을 합니다. 또 유방또한 꺼리낌없이 그야말로 낯짝두껍게 귀빈행세를 했다고 합니다. 그 만남이후에 여문은 유방의 관상을 보고 그가 귀하게 될것임을 직감하고 현령의 청혼마저 물리쳤던 큰 딸(여치)을 유방에게 줍니다.

 

또 유방을 만나러온 기골장대한 청년을 보고 이또한 출세할 관상이라 여겨서 출신을 물어보니 개를 잡아서 고기를 파는 개백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둘째딸 (여수)을 개백정 번쾌에게 주어 유방과 동서지간을 삼습니다.


역사상 관상으로 뛰어난 사람이 많았는데, 저는 이 여문이라는 유방의 장인또한 그중 한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훗날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뒤에 일찍 죽는데 (B.C 195년) 그 뒤에 두딸은 천하를 호령하면서 여씨의 세상을 15년간 이어가게 됩니다.


 

 

여문의 맏딸인 여치와 유방의 관계는 그리 좋지않았는데 그것은 유방이 여색을 밝혔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둘째딸인 여수와 번쾌의 금슬은 매우 좋아서 번쾌는 여치의 아들이 황제가 되는것을 끝까지 돕습니다.


 

 

한마디로 여문은 이런 관계까지를 내다보고 둘째딸을 천민중의 천민인 개백정 번쾌에게 시집보냈다고 봐야 할것이니 그 안목이야말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방은 그러면 패기만 대단한 동네 불량배같은 인물이었는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방의 그릇을 알아 볼 수 있는 역사의 기록이 있는데 저는 유방의 마지막 유언에 주목을 합니다.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뒤에 유씨왕조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서 공신들을 차례차례 정리해 나갑니다. 마지막에 영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진했다가 화살을 맞아서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황후인 여치는 유방에게 그가 죽고 난뒤에는 나라를 누구에게 맡겨서 다스려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유방은 처음엔 소하, 그다음은 조참에게 맡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조참이 죽고나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또 여후가 묻자


"왕릉으로 하시오, 다만 왕릉은 고지식한 사람이니 진평으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시오. 진평은 머리가 좋은 자이니 모든걸 다 맡겨선 안되오, 그리고 주발은 태위(太尉)를 삼으시오 그가 훗날 유씨왕가의 기틀을 튼튼히 할것이오" 라고 말합니다.

"그다음은 누구로 해야되나요?" 라고 묻자 유방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도대체 얼마나 오래살려고 하는거요? 그 다음은 당신이 알바가 아니요" 라고 매듭을 짓습니다. 이 유언은 하나같이 다 맞아 떨어져서 유방이 죽고난뒤에 소하, 조참에 이어서 왕릉이 차례로 승상에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는데 황후인 여씨일가가 전횡하자 여치가 죽고나서 진평과 주발이 들고 일어나 여씨일족을 몰살하고 다시 유씨왕조를 바로 세웁니다.

 

어쩌면 유방은 아내인 여치가 자신의 일족인 유씨가문마저 핍박하고 전횡할것까지를 미리 내다보고 주발이 유씨일문을 다시 바로 세울것이라고 예언했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알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힘이 유방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방을 별볼일 없는 호색한이 아니라 사람을 볼 줄 아는 능력이 있었던 드문 인물로 평가하고, 또 그의 배짱과 패기는 그런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2. 시대가 호민(豪民)을 부른다

 

호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전글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http://druking.com/50106537986 -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을 말함

 

기원전 210년 가을 진시황이 죽습니다. 진나라는 그의 죽음이후 4년만에 멸망하게 되는데 그의 죽음으로 부터 비롯된 혼란은 초,한의 전쟁을 거쳐서 유방이 중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지게 되고 진시황의 죽음으로 부터 15년후 짧은 영광이후에 유방도 죽습니다.

 

그러니까 유방이 패현에서 봉기하여 천하를 쟁패하고 한나라를 세운뒤 죽음에 이르는 모든 사건들은 겨우 15년의 시간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유방의 봉기를 이야기하기전에 '진승과 오광'의 난을 이야기 해야만 합니다.

 

진승과 오광은 허난성의 농민으로 군대에 차출되어 900명의 다른 농민들과 함께 북변(北邊)으로 가는중에 큰 비가 내려서 기일에 맞출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진나라의 법에는 기일내에 도착하지 못한 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참형에 처하게 되어있으므로 이들은 모의하여 인솔하던 진나라의 대장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주변의 현을 모두 점령하고 전차700량, 기병1천, 보병 삼십여만의 대군으로 성장하여 진나라를 위협하게 됩니다.

 

이런 시대상황은 진시황의 가혹한 통치가 초래한 일종의 반작용으로 이들의 봉기는 진()지방을 점령하고 왕을 참칭한지 6개월만에 진압되어 버리지만 결국 진나라가 멸망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유방과 항우의 봉기에도 큰 기회를 제공합니다.

 

훗날 유방은 진승과 오광을 크게 제사지내고 기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유방이 진승과 오광을 단순한 최초의 반란자로 본것이 아니라, 혁명가로 대접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유방의 봉기에 대한 사서의 기록이나 여러 문헌에는 차이점들이 있고 주관이 많이 개입되어있어서 심지어 소하나 조참이 봉기당시에 유방과 그리 친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글까지 있으며, 유방이 진시황제의 릉을 지으러 가는 사역인원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여 일부가 도주하자 마을밖에 눌러앉아 산적(비적)이 되었다고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관점에서는 훗날 유방이 패현의 현령을 제거하고 패현의 수장(沛公)이 되는 과정에 대한 많은 의문을 제기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내린 제 결론은 조금 다릅니다.

 

이미 진나라 말기는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었고 군역과 사역제도 또한 그 규정이 지켜지지 않아서 일반민중의 반감이 지극히 높아져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유방은 동네 정장(亭長)으로서 현령에 의하여 함양까지 황릉을 짓는데 사역할 부역일꾼들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진시황이 죽은것이 B.C 210년 그리고 1년뒤인 B.C 209년에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납니다. 보통의 기록에서는 유방이 호송임무에 실패하고 도망쳐서 비적질을 하게 된것이 우연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났을때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서 각현의 현령들을 잡아죽인뒤 진승과 오광의 무리에 합세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마 패현도 비슷한 분위기가 유방의 호송이탈사건 즈음에 있었을 것입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유방으로서는 패현의 현령을 제거하고 혁명군의 리더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지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3. 젊은층을 볼모삼아 부모세대로 하여금 패현을 뒤집다


 

 


그런데 패현도 가혹한 징세, 군역, 사역에 시달린것은 마찬가지여서 원래 천민은 궁궐이나 황릉을 짓는 공사에 사역하는것이 면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나라 말기 이런 제도가 무너지면서 패현의 천민들을 황릉의 사역에 동원하는 명령이 내려왔고 그것을 통솔하여 함양으로 인력을 호송하는 임무가 정장이었던 유방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당시는 황릉의 사역을 간다는것은 거의 십중팔구 죽으러 가는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시절이라 사역으로 차출된 젊은 천민들의 불만과 공포,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유방으로서는 수백의 인원을 통솔하여 함양에 데려가는 임무에 성공하게 되면 민심을 잃게 될것이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진나라의 법을 어기게한다면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그 젊은이들은 유방을 따르는 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하와 조참. 번쾌같은 무리는 유방과 뜻을 같이하여 오랫동안 혁명을 준비해온 '호민(豪民)'으로 보는것이고 이들이 호송에 실패한것을 빙자하여 마을의 젊은이들을 규합해서 무리를 만든것은 단순히 살기위해서 비적질을 하려고 한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된 작업으로 봤습니다.

 

 

이런 내용을 어디서 확인할 수 있는가 하면 훗날 진승과 오광의 난이 패현에 까지 영향을 미치자 소하와 조참은 현령에게 유방을 불러서 마을 젊은이들을 통솔하게 하면 된다고 꼬십니다. 그러다가 현령의 의심을 사서 목숨을 잃을 처지가 되자 둘다 성벽을 넘어서 유방에게 줄행랑을 칩니다.

 

 

즉 현령에게 유방를 부르자고 제안을 한 자체가 어떤 '계획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몇몇기록에는 호송하다가 남은 인원이 10여명밖에 없었다고 주장 하는데 그뒤에 유방은 마을밖의 숲속(이 지역은 산이 없고 늪지대라 일종의 숲입니다)에서 수백명의 인원을 조련하여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수백명의 무리를 결성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패현의 성문을 닫아걸고 저항하는 현령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유방은 비단에 글을 써서 패현안의 민중에게 고합니다. 내용인 즉슨


 

 

이미 혁명의 불길이 패현근처까지 왔으니 진나라의 관리를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죽을것이다. 그러니 현령을 죽이고 성문을 열어서 반란에 합세하면 집과 가족을 모두 보존할 수 있을것이다 하는 내용입니다.


 

 

자 그런데 재미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죽는다 하는 대목입니다. 마을의 젊은 아들들은 사실 유방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고, 마을안에는 군역,사역이 면제된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애당초 현령이 성문을 닫아걸고 항쟁을 하려고 한들 부모와 자식이 서로 죽이는 살육이 벌어질 가능성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점을 알고 유방은 자식을 볼모로 부모들을 부추겨서 현령을 제거한 것입니다.

 

 


그뒤 유방은 패공에 올라 주변을 공략하고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초한지의 역사적 주인공이 되어서 결국 중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4.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計)

 

 

지금 우리사회는 부모와 자식세대가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그것을 이용하여 새누리당과 박근혜정권이 재집권했습니다.

 

 

그들이 부모세대를 현혹시키려고 내세웠던 것들은 모두 거짓공약이었지만 이미 대선의 결과는 나왔고 어쩔 수 없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국정원의 대선개입은 아직도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있고, 이 겨울에 세상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교한 거짓말을 일삼는 기득권세력들을 쓰러트리려면 어떤 계책을 써야만 할까요? 이런점에 소위 야당의 정치인들은 아무런 지혜가 없는듯 합니다.

 

저는 차도살인의계(借刀殺人之計: 남의 칼을 빌려서 적을 해치우는 수법)를 쓰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 방법은 모두 유방이 역사의 교훈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계책을 씀에 있어서 한가지 문제점은 문재인님을 비롯한 야당의 정치인들이 모두 도덕군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대선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편법을 쓰려고 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계책은 정치인이 써서는 안되고 호민(혁명가)이 써야 하는것입니다.

 

점점 보수화되어가고 있는 10대,20대의 젊은층은 이대로 두면 대한민국의 친일기득권이 앞으로 수백년 공고하게 권력을 다지는 전위부대로 성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을 볼모로 하여 50,60대의 부모세대를 움직여서 차도살인하는 계책을 내려고합니다.

 

그것은 듣고보면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사실은 두번의 대선에 거쳐서 새누리당정권 저들이 행해왔던 허황된 약속입니다. 즉 신혼부부에게는 집을 한채씩 갖도록 해주고, 대학에 가는 학생들에게는 학비걱정이 없도록 해주며 더불어 그들이 사회에 나왔을때 대부분 취업이 되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지금 10대, 20대의 자녀를 둔 부모들의 걱정이야 말로 어떻게 그 많은 학비를 조달할것이며 또 이들을 안정적으로 취업시켜서 시집,장가보낼것인가일 것입니다. 거기에 그들의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호민들은 시기가 오면 기업과 기업의 소유로 장악되어있는 학교재단을 손에 넣고 학생들의 학비를 면제해주고 졸업후 취업도 보장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인들이 하는 허풍같은 공약(空約)이 아니라 기업의 오너로서 학교재단의 소유자로서 하는 약속이기때문에 백배의 신뢰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체의 기업과 전체의 학교일 필요는 없습니다. 패현과 같은 작지만 의미있는 기업,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학교면 되는 것입니다. 그로하여금 학비의 면제와 취업의 보장을 약속하는것은 정치인이 거짓말을 하는것보다 훨씬 현실적입니다.

 

물론 그것은 유방이 한나라를 세울때에도 패현의 백성들은 모두 혜택을 받았지만 (면세) 한나라 전체의 백성이 모두 혜택을 입은 것은 아닌것과 마찬가지로 거사를 주도할때 내세운 약속이 모두에게 적용되리라고 볼 수 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호민들이 장악한 기업과 학교는 그 약속을 지키면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유방이 일으켰던 평민들의 거사와 같은 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약속들은 실제적으로 무능력한 10대와 20대를 고무해서 뭘 어째보자고 하는것이 아니라, 주식을 열주라도 사서 의결권을 모을 수 있는 부모세대의 힘을 규합하여 재벌기업의 오너 (패현의 현령)를 쓰러트리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인 것입니다

 

우중을 설득하여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것은 꿈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각성한 시민들은 대의(大義)를 따라서 설득할 수 있지만, 우중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이해관계에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명박과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대선때마다 부동산가격을 올려주겠다는둥, 등록금을 반값으로 해주겠다는둥 하는 거짓약속으로 지금까지 재미를 보아온 것입니다. 우중은 그말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이념적으로 호민의 대의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이같은 제안으로 젊은층을 손에 넣으면 그 부모세대는 반드시 움직여서 기득권을 타도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계책을 가지고도 왜 아직 움직이지 않는가?

 

이 시대의 호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강고한 기득권이 무너지는 사건, 바로 이 시대의 진승과 오광의 난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가을과 겨울에 걸쳐서 정치적 대변화가, 바로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날것이고 그것을 기회로 패현의 유방과 떨거지들은 세상을 바꿀 기회를 얻게 될것입니다.

 


유방과 떨거지들에게 필요한것은 진승과 오광의 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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