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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적 진화를 달성하는 방법들 -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사고(思考)>>

영어회화

by 21세기 나의조국 2013. 1. 2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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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적 진화를 달성하는 방법들 -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사고(思考)

2013.01.2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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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의 경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B.F 스키너교수 - 심리학자


 

 

네트워크 또는 공동체를 통해서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은 종종 어려움에 부딪혀 왔습니다. 이상적인 공동체 또는 심리학적 이상사회를 이야기했던 B.F 스키너교수(1904~1990)의 '월덴 투(Walden two)'라는 책이 있습니다.

 

서구사회에서 다루었던 이상적 공동체의 구조는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사회주의적 협력관계에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의료보장제도같은 사회주의 제도를 도입해서 시행하고 있고, 여러분도 그 제도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유토피아적 관점으로 치부되었고 실상 현실에서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이 꿈꾸었던 네트워크는 잘 작동하지 않았을까요?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문제를 풀어나가다 보면 우리 인류가 발전시켜온 자본주의라는 제도에 대한 이해가 따라오게되고 그리고 현존하는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해법에 도달하게 됩니다.

 

 

 

<DNA 속에서 해법을 찾다>

 

우리민족이 가지고 있는 DNA속에 그 해법이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인종, 민족들보다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네트워크의 시대에 적합한 특성과 행동양식들을 우리민족이 예로부터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제,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공동체를 만들었던 초창기에, 영국에 사시던 회원한분이 한국으로 찾아오셨더랬습니다. 휴가를 내어서 찾아오셨는데 여성회원분이었기때문에 영국인인 남편분도 같이 오셨습니다.

 

우리의 번개모임에 참여하신뒤에 동양적인 사상이나 신비주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남편분이 해주신 이야기가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영국에는 이런형태의 모임, 번개모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들었을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럴리가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히려 민주적인 사회에서 더 많은 회합과 자연스러운 대화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이 이야기했던 우리만의 독특한 모임의 정체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영국뿐만이 아니라 서구사회 전체에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양식이었다는것을 말입니다.

 

서구인들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쉽게 설명하면 아날로그 방식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봅시다. 현대 금융시장에서 가장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는 투자방법인 '펀드투자'를 생각해 봅시다.

 

다수의 사람들이 자금을 모아서 한사람에게 위탁하여 투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이들은 서로간에 소통을 하면서 전체 펀드를 만들어 내는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펀드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와 또는 그것을 중개하는 회사와 1:1의 계약관계를 통해서 전체자금을 형성합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형태의 네트워크적 소통이라는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개인주의가 발달된 문화안에서 살면서 그러한 방식의 결합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일대일의 소통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하나의 개인이 모여서 다수를 이루었더라도 그안에서의 소통방식은 철저하게 개인적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문화안에서 '펀드'방식의 투자는 성공적이지 못한 모델이 됩니다.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1:1 계약의 방식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펀드투자에 대해서 관찰하고 스스로 판단을 내린뒤에 진행을 하지 않습니다.

 

주로 남들이 하니까, 주변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그 흐름에 편승합니다. 이것을 금융시장이나 기법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매우 큰 오해입니다.

 

자 한가지 예를 더 들어봅시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볼 수 있었던 '계모임'이라는 주부들의 자금조달방식, 공동투자방식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부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위해서 은행을 통하지않고 일종의 자본공동체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자금을 사용할 순서를 정하고 이자를 부담하며 매달 함께모여서 그 자금을 갹출하여 한사람에게 전달합니다.

 

이 역할을 중개하는것은 '계주'라는 모임의 장이지만, 계주가 회원 개개인과 독립적인 계약관계를 갖는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법이 어떻게 규정을 하든간에 그것은 서구적개념의 계약과는 크게 달라보입니다.

 

왜냐면 계약을 정하는 행위, 자금을 갹출하는 행위가 회원 각자에 의해서 매달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그들이 계주에게 돈을 송금하고 그것을 계주가 한사람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계모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한달에 한번 직접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이 바로 서구적 관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계원들은 각자가 계원모두의 사정을 알고 있게되고 상황에 따라서는 순번을 바꿔주는 아량을 베풀기도 합니다.

 

이것이 특정하고 고정적인 계약에 의해서 이뤄진 순번이라면 그런방식으로 수정되는것은 어려울것입니다. 그러나 서로간에 소통하는 네트워크로 이뤄져있는 계모임은 그런 순발력을 발휘합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흔히 행했던 '계모임'이라는것은 여자들이 모여서 수다나 떨면서 시간낭비하는 구시대적 자본조달방식, 투자방식이 아니라 우리문화권에 맞는 가장 적합한 시스템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본적으로 회원각자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독특합니다.

 

은행이나 증권회사, 계주의 신용도를 가지고 그러한 투자가 이뤄지는것이 아니라 회원각자의 신용의 합, 회원들사이에 존재하는 굳은 신뢰가 그 시스템을 지키고 작동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물론 지금도 계모임이 최선의 투자방식이라는 주장을 하려는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협력관계 -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

 



 

 

제가 2009년에 경제적 공진화 모임이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이 공동체 전체를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적대적 M&A라는것을 제시했을때, 우리의 시스템에 맞는 새로운 협력관계를 만들어내려고 했습니다.

 

회원모두는 각자가 거래하는 다양한 증권회사를 통하여 개별의 계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임의 회주로서는 알 필요도 없고 관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가 융통할 수 있는 자본의 범위내에서만 주식을 사는 '투자'를 직접 실행합니다. 펀드처럼 어떤 기관, 개인에 맡겨서 펀드매니저 한사람이 투자행위를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회원각자가 투자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투자자금은 어떤 형태로든 개인소유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만 이러한 투자에 필요한것은 어떤 기업에 투자할것인가? 또 어느때에 투자할것인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렇게 투자해서 모은 주식의 의결권을 맡기고 그 의결권을 통해서 적대적 M&A를 실행할 '조직'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에 회원각자가 참여하게 됩니다. 마치 매달 돈을 갹출하고 대화하면서 공동의 투자방식을 만들어가는 계모임처럼 이들은 서로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공동체 전체가 진행하는 일들에 대해서 낱낱이 알게 됩니다. 또 그렇게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투자의 최종수익에 대해서 그들 각자는 공정한 배분을 받습니다. 여기서 공정하다는 것은 많이 낸만큼 많이 돌려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작동방식은 강력한 신뢰와 적극적인 행동을 필요로 하기때문에 금전의 크고 작음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만약 신뢰가 유지되지않거나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 커다란 공동체는 목적을 이뤄낼 수 없게 됩니다.

 

계모임이 효과적이었던것은 많아야 십수명의 인원이 소통하는 형태였기 때문입니다. 그 숫자가 늘어나면 소통을 하는데 들어가는 노력도 비례해서 커집니다. 그리고 여러 연구결과들 처럼 150명에서 250명정도의 사이즈가 되면 더이상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세포들 처럼 여기에서 진화가 필요해집니다.

 

각각의 세포들은 뭉쳐서 하나의 기관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관들은 어떤 목적을 이루도록 공동으로 노력하게 됩니다. 즉 신체의 원활한 생존을 위해서 협력합니다.

 

하나 하나의 개인들은 세포와 같고, 그들이 뭉쳐서 커뮤니케이션을 완벽하게 소통시킬 수 있는 단위는 150~250명이 뭉친 소사회 또는 하나의 마을, 인체에서는 뇌나 간이나 위장같은 하나의 기관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수의 소사회, 마을들이 뭉쳐서 그보다 훨씬 큰 사회전체, 국가전체를 콘트롤 하는 목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사회나 국가안에 존재하는 구성원 전부를 포용하는 조직이 아닙니다.

 

 

 

<네트워크적 결합을 위한조건 - 자아에 대한 집착을 희석시키는것>

 

5년째 이런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시도를 해오면서 느낀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공동체가 본격적으로 운용될때부터 인지하고 지켜왔던 부분도 있고 그후에 알게된 것들도 있습니다.

 

 

 

혈연-지연-학연은 네트워크적 공동체의 가장 큰 적이다

 

혈연은 나의 가족, 핏줄로 구성원이 이뤄져있는 가족공동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족 구성원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경우 네트워크적인 공동체에 참여하는것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회사의 CEO가 회사를 발전시키는 방법은 인재를 널리쓰고 공평무사한 보상을 하는것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그 CEO에게는 가족이 있고 그 가족을 자신의 '분신'이라고 여기는것이 보통사람들의 수준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승진을 빨리시키고 회사를 물려주려고하며, 아내의 친인척들이 회사에서 힘을 쓰게되는 것입니다.

 

사실 가족에 대한 집착이나 애정은 자기자신의 DNA에 대한 집착이고 자기애입니다. 자식에 대해서 지극히 사랑하는 감정을 드러내고 집착하는것은 이미 그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재하는 '타인'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자기 소유의 존재로 생각하는것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의 일부이기때문에 지극히 집착하는 것입니다. 즉 에고(自我)가 강한사람입니다.

 

자아가 강하다보니, 남이라고 느끼는 타인에 대해서 배려나 양보를 하기 어려워지고 모든것을 자신과 가까운 혈연위주로, 또 조금 넓혀봤자 학연,지연에 의지해서 우선권을 부여합니다. 즉 자아가 강한사람이란 결국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아까 서구에서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데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고 본 이유로 제가 우리에게는 네트워크적 소통의 장점이 있다는 것을 들었지만, 그 근간이 되는것이 나와 남의 경계를 뛰어넘는 힘, 자아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의식을 가지는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이 한단계 진화해 나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누구나 자아가 있고, 누구나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며 가족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아에 대한 집착을 줄여나가면서 공동체적인 의식을 받아들일때 우리는 네트워크에 접속하게 되는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열지 않으면 네트워크도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의 아내, 나의분신과 같은 자식들 그리고 부모님, 학교동창들 그리고 고향친구들 이것은 우리가 원칙과 상식을 지키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권을 부여해서는 안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제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동참하는 분들은 대단한 분들입니다.

 

정신적으로 한단계 진화한 분들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가 지향하는 네트워크적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안에서 우리는 협소하게 100명 또는 200명단위의 혈연,지연,학연으로 이뤄진 옛 공동체를 넘어서 그보다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세포로 만들어진 하나의 인격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하나 생명의 존재인 세포들이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하나의 인격을 형성해서 차원높은 사고로 나아가는것처럼 우리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정신의 진화입니다.

 

혈연,지연,학연을 버리는것이 아닙니다. 나와 남의 구분을 넘어서려고 끊임 없이 노력하는 와중에 우리는 원칙과 상식을 가장 큰 명제로 받아들이고 사실상 전자보다도 더 작은 공간에서 빅뱅을 통해서 형성된 우주는 원래 하나의 존재, 하나의 의식이었다는것을 이해하게 되는것입니다.

 

물론 이 우주는 시작조차하지 않은 전자보다 작은 시공이면서 동시에 137억년동안 팽창해온 엄청난 크기의 시공이라는 두가지 동시성이 양립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이 두가지 성질이 공존하는 미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의 최종적인 진화단계를 넘어서야만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경계가 사라져버립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이 흔히 알고있는 깨달음의 단계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구성하고 혈연,지연,학연으로 부터 자아에 대한 집착을 희석시키기위해서 노력하는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우주 그자체에 일치시키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입니다.

 

5년동안 지켜보면서 특히나 자기 자식에 대한 애정이 큰 부모일수록 이런 이야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가도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가서 네트워크에 접속하지 못하는 ,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기자식에 대한 애정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라는것을 직시해야됩니다.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우리가 하려는 미션이 성공하는 것이고 또 우리 공동체의 성공은 경제,사회적으로 현존하는 시스템을 깨어 부술 수 있게 됩니다.

 

 

개인들이 이해관계를 희석하고 공동체로 공명하는 단계로 나아갈때 재벌들이 1%의 지분으로 시장을 독점하는 구조는 깨어집니다. 그러한 기업들의 소유는 공동체로 넘어오고 그들 공동체 전체가 투입한 자본의 수백배에 이르는 이익을 향유하게 됨으로써 (그 전에는 재벌일가가 독점하던) 공동체 전체에 여유를 허용하게 됩니다. 즉 80%의 죽어라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휴식하는 또는 노는 구성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의 글로 제가 이야기하는 모든것들을 전달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것이 중요하고, 그것은 우리 공동체가 실제로 대한민국의 경제,사회시스템에 어떤 충격파를 던지기 시작할때에 여러분의 이해를 돕는 설명이 될것입니다.

 

나와 남의 경계를 뛰어넘는것, 그것이 인간이 우주적 존재로 승화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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