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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결정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2. 3. 2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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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제위께 - 사람이 다르다.

구조론연구소  김동렬슨생  2012.03.28

 

 

이기는 법으로 이겨봅시다.

 

새끼곰과 어미곰이 있다면 어미곰부터 쏘아야 한다. 그런데 새끼곰이 눈앞에서 알짱거린다면? 그래도 참아야 한다. 교범대로 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전에 충분히 연습해야 한다.

 

바보는 장개석이다. 그는 어미곰 일본군은 내버려두고 새끼곰 공산당을 잡는데만 주력했다. 그의 변명이 걸작이다.

 

“일본군의 침략은 외부에서 공격 당하는 타박상과 같고, 공산군의 준동은 뱃속에 퍼지는 암종과 같다. 피부의 타박상과 뱃속의 암 중에 무엇을 먼저 치료해야 할까?”

 

교활한 변명이다. 강한 넘과 싸워야 무리가 우러러본다. 일본군을 물리치면 공산군은 저절로 흡수된다. 장개석은 쉬운 목표를 선택한 것이다. 이유는 비겁하니까. 길게 보고 어려운 목표로 가야 한다.

 

당시 키를 쥐고 있던 동북의 군벌은 청나라의 잔당이다. 이들 입장에서 보면 국민당과 공산당은 뿌리가 같다. 손문이 봉기했을 때 학생들이 가세했고 그들이 국민당의 핵을 형성했으며, 국민당이 일부 군벌과 손잡자 이탈하여 공산당이 된 것이다. 국민당=공산당이다. 동북의 군벌은 장개석과 모택동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중 공산당에 흡수되었다.

 

묻노니 새끼곰이 눈 앞에서 알짱거려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의연하게 바른 길을 갈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끼를 주면 덮썩 물어버린다. 낚이고 만다. 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게 잘못이라는 것은 대충 안다. 눈치로 안다. 감으로 안다. 그러나 그 따위 피상적인 지식은 보탬이 안 된다. 확실한 공식이 있어야 한다.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 숙달되어 있어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타조 새끼가 천적을 만나면 모래 속에 얼굴만 파묻는다고 한다. ‘새대가리’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얼마전 TV에 나온 내용인데, 집에 화재가 나자 실내에 있던 개들이 빨래더미에 얼굴만 파묻고 있다가 질식사했다고 한다.

 

사람은 다를까? 천만에! 위기가 닥치면 뭐라도 해야 한다. 가장 손쉬운 것을 한다.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뭐라도 선택하는 것을 선택한다. 바른 길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뭐라도 결정하는 길을 결정한다.

 

상황이 닥치면 당장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다. 아무거나 해버린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선택을 선택하고 결정을 결정한다. 이것이 잘못임을 알아도 피하지 못한다. 이는 인간의 원초적 약점이다.

 

상황이 급박하면 행동을 앞세우며, 행동에 맞추어 판단과 결정을 꾸며내는 것이다. 일제히 새대가리가 된다. 누구라도 그러하다.

 

이미 액션에 들어가 버리면, 액션에 바빠서 판단과 결정을 검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랬다 저랬다 되는대로 하다가 망하고 마는 것이다.

 

위험에 빠지면 무작정 비명을 지르는 수가 있다. 산길에서 맹수를 만났을때는 비명을 지르면 안 된다고 누누이 당부를 해도 기어이 비명을 지른다. 비명소리가 가만있는 맹수를 자극한다. 결국 잡혀먹힌다.

 

가만있으면 맹수가 민망해서 고개를 돌릴텐데 말이다. 맹수는 먹어본 음식만 먹으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맹수들도 내향적이고 수줍은 성격이라 낯을 가리는데 말이다.

 

왜 비명을 지를까? 뭐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명을 지르는 동안은 스트레스를 덜 받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의사결정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그 스트레스 때문에 정답을 알아도 행하지 못한다.

 

알면 행해야 한다. 그러나 아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다. 아는 것을 행하려면 훈련되어야 한다. 매뉴얼을 갖추어야 한다. 확신을 가져야 한다. 구조론이 필요하다. 이기는 법을 알아야 한다.

 

피상적으로 아는 것과 제대로 아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냥 창의하려는 것과 모든 창의란 것은 결국 일종의 팀을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도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냥 모여서 마구잡이로 팀을 짜는 것과, 공격과 수비로 역할을 분담하여 팀을 짜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중복된 포지션은 필요없고 필수 포지션은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꼭 필요한 사람만으로 최소화 되어야 최고의 팀이 갖추어진다.

 

불확실한 여럿보다 확실한 하나가 낫고, 오합지졸 만명보다 정예 한 팀이 낫다. 그러나 상황 발생하면 정예를 양성하기보다 무작정 세불리기에 집착한다. 정예를 훈련하기는 어렵고 세불리기는 쉽기 때문이다.

 

전투를 거듭하면 상승부대가 나타난다. 동학군은 세불리기보다 소수의 상승부대를 건설하는데 주력했어야 했다. 일의 선후가 그러하다. 곧 죽어도 양이 아니라 질이다. 이걸 확실히 알고가야 한다.

 

팀 안에 확실한 의사결정 구조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조조가 자기네 식구와 외부에서 스카웃한 영입파 장수를 둘씩 짝지어 전쟁터에 보냈듯이 절묘한 균형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결을 알고 결 따라 균형을 맞추어 팀을 조직하다 보면 저절로 창의가 되고 혁신이 된다. 그냥 막연히 창의하라고 하면 기발한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는 대개 오래가지 못한다. 잠시 반짝 한다. 새끼곰을 쏘는 실수를 반복한다. 새대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다낚시대회를 했는데 어떤 사람이 낚시를 담그자마자 고기가 연이어 올라왔다. 거기가 포인트임을 눈치챈 사람이 인근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낚시대회가 끝나고 물었다.

 

“옆에서 많이 잡는 것을 보고 가까운 곳에 자리잡았는데 왜 그쪽은 쿨러가 그득하고 나는 한 마리도 낚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무슨 비법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말했다.

 

“나는 새벽 다섯 시부터 나와서 계속 떡밥을 던지고 있었소.”

 

이기는 길은 있다. 다만 새벽 다섯시부터 떡밥을 던져야 한다. 해낼 수 있는가? 확신을 가진다면 해낼 수 있다. 사람들이 열심히 하지 않는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려면 계속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분석하고, 관측하고, 보고하고, 조율해야 한다. 그게 힘들어서 안 한다. 헷갈려서 안 한다. 확실한 길을 안다면 산이라도 거뜬히 옮기는게 인간이다.

 

게으런 인간은 없다. 다만 확신이 없을 뿐. 확실하기만 하다면 새벽부터 나와서 바다에 떡밥 던질 사람 많다. 확실한 목표를 주면 사람들은 반드시 움직인다.

 

승리는 가능하다. 창의도 가능하다. 결국은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 가는 길에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공식을 외어야 한다. 이기는데 흥미를 가져야 한다. 승리에 중독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상승부대를 조직할 수 있다.

 

 

독자 제위께

 

이 책은 특별합니다. 그동안 만든 책은 전여옥 소송 때문이거나, 혹은 구조론에 대한 어려운 이론서였거나, 혹은 서점에 먹힐까 테스트 해 본 것입니다. 이 책은 쉽게 썼습니다. 모두가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구조론의 이론적인 부분은 학문적 관심을 가진 사람이 봐야 하지만 ‘이기는 법’은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팀플레이 하려면 손발 맞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반에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쉬운 내용이고 읽혀집니다.

 

이 사이트에서 소화할 수 있는 부수는 최대 500권이지만, 만약 기적이 일어나서 3천권이 팔리면 구조론 연구소 오프라인 사무실을 가동할 계획이고, 1만권이 팔리면 정당의 창당에 도전하겠습니다.

 

정치를 하겠다는건 아니에요. 풀뿌리 모델을 만들어 정치에 영향을 주겠다는 거죠. 유럽의 진보정당은 주로 신문을 끼고 간다는데, 학교를 끼고 가는 정당을 실험할까 합니다. 학교는 대안학교지요.

 

정당이 되려면 절대적으로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공자도 학교로 시작했고, 탈레반도 학생들이 사고쳤고, 중국 공산당도 학생들이 만든 겁니다.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도 학생들이 중심에 섰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곧 학교의 문제라고 봅니다. 학교가 병들었으므로 사회가 병든 겁니다. 학교에서 자존감 교육을 시키지 않아요. 선진국을 본받아야 한다며 ‘부끄러운 한국인’ 어쩌고 하는 신문기사나 보며 열등감을 가르치지요.

 

한국인은 아직 정신적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군대문화의 영향도 있고. 주눅들어 있어요. 일본, 미국이 아버지인줄 알아요. 어리광도 부려요.

 

한국인들은 조직이 어떻게 약자인 개인을 엿먹이는지에 대해서는 달인입니다. 그 지식만 많아요. 강한 개인은 없고 약한 군중은 많아요.

 

예전에는 공동체 운동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게 노가다더군요. 21세기 이 문명화 된 시대에 가장 어리석은 사건은 종교의 신앙입니다. 아직도 종교를 믿는 사람이 있다는건 정말 웃기는 일 아닙니까?

 

그러나 인간에게는 원래 종교적 본성이 있습니다. 공동체적 본능이 있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종교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원초적 본능에 응답하기 위하여 제대로 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예전에 ‘뉴에이지’라는 것이 있어서 제법 대안을 모색했는데 ‘카르마’ 어쩌고, ‘외계인’ 어쩌고 하며 마약 먹고 헛소리 하는 똘아이들이 망쳤더군요.

 

종교처럼 하지 않고, 뉴에이지처럼 똘끼부리지 않고, 종교의 공동체적 본성을 충족시킬 대안의 공동체 모델은 어떤 것인가? 여러 구상이 있지만 저는 아직 확실한 답을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대안의 교육모델과 그 모델을 발전시킬 새로운 정당모델에 관심이 있습니다. 백년 후든 천년 후든 우리 세력이 집권하려면 합리적인 정당모델이 있어야 하며, 그 정당모델은 종교가 차지한 시장을 일부 잠식해야 합니다.

 

풀뿌리 정당이 되려면 종교가 가진 특별한 매력을 정당이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경기동부가 어떠니 호남향우회가 어떠니 하지만 저는 그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많다고 봅니다. 뭔가 끈끈한게 있어요.

 

종교의 본질은 대안의 가족입니다. 소속감을 주고 자존감을 주는 거지요. 미래사회는 정당이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정권획득에만 관심이 있는 기성정당은 그 역할을 못합니다.

 

유럽의 진보정당은 노조와 언론을 끼고 있는데 일부 순기능이 있지만 우리 현실에서 좋은 모델은 아니라고 봅니다. 학교를 끼고 가야 하고 공동체적 기능을 하는 대안의 정당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념이 다르다, 노선이 다르다, 정책이 다르다가 아니라 ‘사람이 다르다’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좋은 이념, 좋은 노선, 좋은 정책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경기동부가 어떻고 하지만, 사람은 이재오, 김문수같은 PD 애들보다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사는 세상’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NL 애들은 들어와도, PD 애들은 아마 못 들어올 겁니다.

 

자주냐 사대냐.. 자주는 들어와도 사대는 못들어옵니다. 아직도 마르크스 찾는 그들은 본질에서 노예입니다. 자주가 먼저입니다. 인간해방이 먼저입니다. 반미자주가 아니라 개인주의 자주가 필요합니다. 훈련되어야 합니다.

 

정책, 노선, 이념 따질거 없고, 무엇보다 사람이 좋은 당, 창의력 있는 사람의 당, 눈빛이 반짝반짝 하는 사람들의 당, 자존감 훈련을 받은 사람의 당,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는 사람의 당,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의 당, 동료를 믿고 동료를 지켜주는 사람의 당, ‘대한민국의 보호자’라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의 당, 강한 개인의 수평적 연대.. 어려운 목표라고요? 훈련하면 됩니다.

 

이는 구상에 불과하지만 혁명도 한 사람의 마음 속 생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의 협력플레이를 기대합니다. 조금씩 생각의 퍼즐을 맞춰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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