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그리고 선정성
2012.1.16 호호당의 김태규님
며칠 동안 우리 농어업에 관한 글을 올렸더니 조회수가 현저히 적다. 지난 주 글로벌 운운하고 우리 경제에 관한 글을 올렸을 때와 차이가 크다.
진짜 돈이 되는 힌트나 아이디어는 글로벌 운운하면서 뭔가 거창해보이기도 하고 또 당장 눈앞의 경제에 관한 글 속에 있기 보다는 미래 우리 농어업의 진로와 같은 이런 종류의 글 속에서 찾을 수 있겠건만 독자들의 관심은 오히려 적다.
돈을 벌려면 10 년은 기본이고 20년, 30 년 뒤를 바라보며 준비를 해야 하는데, 당장 코앞의 일에만 관심이 쏠리니 웃음이 난다.
물론 웃음이 났다는 것이지 독자들을 비웃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당장의 일에 눈이 더 가는 것은 소위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말머리를 돌려보자.
‘진정성’이란 어휘가 있다. 사전에 있는 단어는 아니지만 흔히 쓰이는 말 중에 하나이다.
나는 眞心(진심)이고 眞正(진정)이건만 주변이나 나아가서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의 좌절감이 반영되고 있다는 생각에서 내 개인적으로는 웬만해선 쓰지 않는 어휘이다.
이렇게도 몰라주나? 하는 억하심정, 능히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이가 저마다 자기의 진정을 몰라준다고 외쳐댄다면 그건 좀 문제가 있다. ‘남의 몰라줌’을 호소함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남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더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남의 말을 들어주어야만 남도 내 말을 들어줄 것이니 그렇다.
하나의 사안에 대해 생각이 저마다 다를 경우에 나야말로 진짜라고 외쳐대기만 하고 남의 진짜는 외면하기에 우리사회는 어느덧 진정성이 강조되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討論(토론)이란 각자의 주장을 가지고 싸우자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어봄으로써 오해가 있으면 풀고 미처 몰랐던 것이 있으면 이해해가면서 서로의 생각을 좁혀가는 것이 토론이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우리사회는 아예 남의 생각을 들어볼 생각조차도 아예 포기해버렸다. 배틀, battle 이 유행하다보니 토론도 하나의 배틀, 즉 치고받는 투쟁의 장이 되었다.
마치 고대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투사, 글라디에이터 간의 선혈 낭자한 결투 장면과도 같다는 인상이다.
나와 다른 상대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이야말로 토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주어진 시간 내에 내 말을 속사포처럼 퍼붓고 상대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마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식의 표정을 짓는다.
세상에는 생각은 깊어도 말은 어눌한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이 오늘날의 토론에 참가했다가는 대번에 생각이 모자란 사람 내지는 下手(하수) 그리고 패배자로 낙인이 찍혀버릴 것이다.
그러나 사실 생각이 깊고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말은 오히려 조심스럽고 어눌할 때가 더 많다. 그러니 오늘날의 토론은 갈수록 더 무의미해지고 있다.
말을 교묘하게 하고 표정을 잘 꾸미는 자 중에 좋은 이 별로 없다는 공자의 말은 참 탁월한 지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배틀식 토론은 巧言令色(교언영색)에 능한 자를 거꾸로 승리자로 그리고 진정성 가득한 사람으로 뽑아내는 결과를 더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얼마 전 편의점의 매대에 놓인 책 중에 ‘닥치고 정치’란 책이 있어 좀 살펴보았다. 편의점 매대에 오를 정도면 베스트 셀러임이 분명한데, 무엇이 이런 책을 베스트로 올려놓았을까 싶어 몇 장을 넘기면서 읽어보니 과연 베스트 셀러로서의 모든 요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결국 재미가 있어서 나도 샀다.
먼저 내 눈길을 끈 것은 욕설이 툭 하면 들어가 있어 마치 진정을 털어놓고 있다는 느낌을 잘 유도하고 있었다. 욕설이 난무하니 솔직해 보이고 이른바 현장감, 내지는 ‘레알’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냥 말하기 보다는 ‘톡 까놓고 말한다’고 하면 귀가 솔깃해지는데, 책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욕설을 통해 그 솔깃함을 최대한 뽑아내고 있었다.
(아주 흘륭한 마케팅 포인트가 아닐 수 없었다. 아, 그렇구나, 좀 팔리는 글이나 책을 만들려면 욕을 좀 많이 섞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한 수 배웠지만 내가 써먹긴 좀 무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다 보니 평생 나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인용하면 이렇다. “누가 설득되려고 논쟁을 하나. 난 이래서 당신에게 설득당할 생각이 없다는 걸 일방 주장하는 게 논쟁” 이란 구절이었다.
너무나도 신선해서 어안이 벙벙했다. 토론이나 논쟁의 시작부터 ‘암 설득당하지 말아야지, 난 너의 말에 낚일 생각일랑 조금치도 없으니 그런 건 어림도 없어!’ 하면서 토론이나 논쟁에 들어간다는 주장이다.
이 구절에 탄복해서 난 책을 구매하기로 결정을 했다.
책의 뒷면에는 마케팅 포인트로 이런 말도 있었다. (책을 산 다음 매점을 나오면서 보니 발견한 문구였다.)
“쫄지 마! 떠들어도 돼. 씨바.” 욕짓거리가 넉넉하고도 후하게, 조금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장식되어 있었다.
책을 쓴 친구 정말 개인적으로 만나서 놀면 실로 즐겁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사온 책을 집에 가서 단숨에 다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책의 장점 중에 하나로서 우리사회의 일반적인 좌파 이론가들보다는 훨씬 실전적이고 구체적이며 친근한 면이 지은이에게는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책 표지의 제목 밑에는 명랑시민 정치교본이란 재미난 말도 붙어있었다.)
그리고 이 책만 아니라 모든 베스트셀러는 본질적으로 ‘포르노’적인 요소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해왔는데 정말 그런 생각을 확인시켜준 책이기도 했다.
읽은 책을 치우고 나서 제법 많은 생각들에 잠겨 들었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제 대한민국이 정말 맛이 가긴 갔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몸담고 사는 우리 대한민국은 이제 한 번 크게 죽어주어야 다시 살아나리라’ 하는 생각이었다.(물론 죽게 되면 함께 죽어줄 마음 있다. 도망갈 마음 전혀 없다.)
또 내 글쓰기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겉으로는 진정성을 표방하면서 본질적으로는 선정성이란 요소’를 지녀야만 확 뜨는 세상인데 과연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
하지만 뜬다는 것, 즉 공중부양에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나는 왜 글을 쓰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
짧지만 결코 적지 않은 질문들을 내게 던져보았다.
“나는 왜 쓰지?”
하지만 답을 얻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냥 나는 내가 사람들에게 해주고픈 말을 글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해주고픈 말에 시장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운명을 연구하는 사람답게 그냥 ‘팔자소관’으로 돌리기로 했다. 다시 말해 ‘없으면 뭐 할 수 없고’ 하는 낙관을 한다.
다시 명랑해졌다. 명랑하게 그림과 사진을 그려 올리고, 또 글도 그냥 쓰고픈 글을 쓴다. (그러니 ‘닥치고 정치’란 책도 나름 신선한 자극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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