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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小滿(소만), 그 실로 아슬아슬한 境界(경계) : 진정한 성취

◆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5. 12.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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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滿(소만), 그 실로 아슬아슬한 境界(경계)   

2011.5.11  호호당의 김태규님

 

 

 

오는 21일이면 小滿(소만), 한 해를 통틀어 어쩌면 가장 결정적인 때이다.

 

오늘은 정말이지 저 自然(자연)이 주는 아주 중요한, 너무나도 중요한 가르침 한 가지를 일러드릴까 한다. 그렇기에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약간 嚴肅(엄숙)한 표정으로 변해있다.

 

小滿(소만)은 작을 小(소)에 찰 滿(만)이다. 그러니 저 들판에 어떤 무엇이 비록 작으나마 차게 된다는 뜻이다.

 

무엇이 차게 되는 것일까?

 

농부는 4월 20일 경에 볍씨를 뿌리지만, 그 씨앗들은 땅속에 있어 잘 자랄 것인지 아니면 그냥 죽고 말 것인지를 볼 수가 없다. 씨앗을 다 뿌린 농부는 한 달 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지낸다.

 

그 씨앗이 과연 대지위로 싹을 틔워내느냐 아니면 그냥 헛일로 끝이 나느냐가 결정되는 시기는 4월 20일 곡우로부터 한 달이 지난 바로 小滿(소만) 때가 된다.

 

어리고 여린 싹이 대지 위로 고개를 내밀면 그로서 작지만 그 푸른 잎이 대지를 가득 메울 것이니 그래서 작은 小(소)에 찰 滿(만)인 것이다.

 

여린 것들이 푸른 대지 위를 메웠으니 이제 잘 가꾸기만 하면 가을에 가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니 소만은 ‘막연한 희망’을 확인하고 ‘구체적인 욕망’을 가지기 시작하는 때, 다시 한 번 열심히 정성껏 잘 키워낼 것을 다짐하는 때이다.

 

뿌린 씨앗이 이제 잘 자랄 것이냐 아니면 실패로 끝이 날 것인가 결정되는 때가 소만이니 소만은 ‘희망에서 욕망으로 전환’이 가능한 가를 결정짓는 엄숙한 경계인 것이다.

 

씨앗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무들도 그렇다. 소만 무렵까지 새 잎새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 나무는 그것으로서 끝내 죽어버리고 만다.

 

그런 까닭으로 응달진 곳의 나무들은 소만을 앞두고 태양 빛을 받기 위해 가지를 온통 비틀어 가면서 필사적으로 해를 찾는다. 해를 받아야만 새잎을 틔워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눈에는 그저 푸른 신록의 계절이고 여름이 시작되는 좋은 때로만 보인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건 참 한가로운 얘기이다.

 

볍씨를 포함한 모든 식물들, 그리고 실은 자연의 모든 생명들이 소만을 境界(경계)로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다. 생사가 갈리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때가 바로 소만이다.

 

아침에 작업실로 나오다 보면 늘 지나게 되는 길이 있으니 고속도로 주변의 제방 도로이다. 오늘 아침 길가에는 신록이 많이 짙어지고 우거져서 이제는 숲의 그늘, 綠陰(녹음)같은 것도 제법 느껴졌다.

 

‘아, 너희들 성공했네, 이토록 무성하게 잎을 만들어내었으니 말이야’하고 축하 인사를 건네는 한편 잠시 나는 숙연한 마음이었다.

 

군데군데 잎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마른 나무들도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살기 어려울 것이다.

 

나무가 죽든 말든 그게 뭔 상관? 하는 독자가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바로 그 잎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나무일 수도 있다고.

 

이건 比喩(비유)가 아니다, 액면 그대로의 리얼 스토리이다.

 

그런 연유로 이 글을 쓰는 내 표정도 약간은 굳어있는 것이다.

 

해마다 맞이하는 생사의 경계가 소만이다.

 

우리의 삶은 한해살이가 아니어서 소만과 같은 생사의 경계가 없다고 생각하면 실로 誤算(오산)이다.

 

모든 이의 삶과 그 운명을 통해 60 년의 주기를 통해 소만의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소만의 때가 당신 나이 몇 살에 맞이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당신도 나도 소만의 때가 있다는 것이고, 그 소만 무렵으로서 당신 삶의 새싹과 새잎을 틔워내지 못한다면 그로서 삶을 실패로 마무리하게 되는 것이니 어찌 아니 엄숙할 수가 있겠는가!

 

사람의 60 년 주기에 걸친 운세 흐름에 있어 소만은 바닥점, 그러니까 삶의 입춘으로부터 17.5 년이 지난 시점에 맞이한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크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의 운명도 그러하다.

 

우리 대한민국의 경우 소만은 언제였던가?

 

1964 甲辰(갑진)년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시작된 우리 대한민국은 그로부터 17.5 년이 지난 1981 辛酉(신유)년 가을이 소만의 때였다.

 

그해 난데없이 날아든 88 올림픽 개최 소식은 전 국민적 낭보였다. 그 소식은 우리 대한민국이 소만으로서 드디어 푸른 싹을 틔워내는데 성공했다는 결정적인 징표이자 일대 상징이었다.

 

당시 고 정주영 현대회장은 대회 유치를 위해 온힘을 아끼지 않았으니, 그 분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기여를 남기고 가신 분이다.

 

1981 년 그 소식이 전해진 이래 우리는 해서 안 되는 일이 없었으니 여리고 푸른 싹을 정성을 다해 키워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30 년이 지나 금년 2011 년 가을, 국운의 小雪(소설)에 이르고 있다. (60 년의 절반은 30 년이다.)

 

그간 우리는 이미 풍성한 수확을 보았고 그로 인해 ‘극단의 럭셔리’를 우리가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를 예로 들었지만 이는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라서 그렇지만, 오늘은 특별히 예외적으로 여러 독자들이 다 알고 있는 사람을 예로 들고자 한다.

 

오세훈 현 서울시장을 예로 들고자 한다. (그분에게는 정말이지 각별한 양해를 부탁드린다.)

 

1961 년생인 이 분의 운명은 1967 년이 바닥, 즉 입춘이었다.

 

그러니 소만은 17.5 년을 더해보면 1984 년이 된다. 그 분의 프로필을 검색해보라, 1984 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그 해 오 시장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 시험을 통과한 것이 오세훈 씨의 소만에 있었던 일이고 그로서 삶의 의미 있는 방향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사법 시험에 붙어 나름 보람된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희망은 그 이전의 일이고 사법 시험 합격으로 구체적인 욕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니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소만의 때가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큰 가 말이다.

 

훗날의 서울시장은 그 1984 년으로서 서서히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쳐야 미친다, 狂人(광인)이 되어야 도달, 즉 及(급)할 수 있는 것이니 간절한 소망을 담은 노력을 통해서만 우리가 각자의 小滿(소만)에 이르러 당신 운명의 벌판에서 그 여린 싹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분의 경우 비교적 일찍 성실한 노력을 펼칠 수 있는 행운이 있었기에 큰 성공을 거둔 분이라 하겠다.

 

그와 반대로 나 호호당처럼 인생 중년의 나이에 참담한 바닥을 경험한 사람도 많다.

 

여러분이 접하고 있는 이 블로그는 그 참담한 바닥을 삶의 중반에 겪은 나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되었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서 재주도 많고 머리도 좋아 자존심 팍팍 살려가며 엄벙덤벙 대충 살다보니 이윽고 맞이한 40 대의 바닥이고 입춘이었다.

 

내 얼마나 부끄럽고 쪽이 팔리던지, 내 조금만 진지하고 성실했어도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며 뜨거워져 오던지.

 

이런 내 개인적인 일을 얘기하는 것은 혹여 당신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고 또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는 말을 드리기 위함이다.

 

당신이 바닥에 이를 것 같으면 그로부터 세월이 지나 당신의 소만에 이를 것이 아니겠는가?

 

소만에 가서 그 여리고 푸른 싹을 틔워내고자 한다면 간절해야 할 것이고, 간절해야만 그 싹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진정한 성취를 바라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 바라는 소망이 간절하고 또 간절하다면 당신 운명의 소만에 가서 그 진정한 성취의 싹을 틔워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진정한 사랑을 바라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 바라는 소망이 간절하고 또 간절하다면 당신 운명의 소만에 가서 그 진정한 사랑의 싹을 틔워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바라든 성취를 바라든 그 무엇이든 좋다. 그리고 소만에 가서 그 여린 빛을 보았다면 다시 한 번 마음을 정갈하게 가지시기 바란다. 어렵게 마침내 겨우 피워낸 싹이고 빛이니 그를 정성껏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니 그렇다.

 

저 들녘을 보라, 5월의 푸른 신록이 세상을 메워가고 있다. 그러나 평화로운 광경만은 아니라는 거, 모두들 살기 위해 살아보겠다고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소만의 때인 것이다.

 

세상 앞에서 우리는 더러 畏敬(외경)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대의 소만에 피워낼 여린 싹을 위해서라도 그렇다.

 

자연은 한해의 순환을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부단히 가르쳐주고 있다. 고맙지 않은가!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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