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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에게 묻는다, 덧없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4. 1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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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에게 묻는다, 덧없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2011.4.7  호호당의 김태규님

 

 

 

촉촉한 봄비에 목련이 벙글고 있다.

 

젖은 저 목련 잘도 優美(우미)하구나. 하지만 저 꽃도 시들어 내릴 때는 차마 볼 수가 없으리라.

 

이에 생각하는 故事(고사)가 하나 있다.

 

중국 전한의 영걸 황제였던 武帝(무제)는 傾國之色(경국지색)을 얻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美色(미색)에 빠져 놀다보면 나라가 기울 정도의 미인이란 뜻이다.

 

그런데 그녀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죽기 얼마 전, 무제는 총애하는 美人(미인)을 찾아가 위문도 하고 그 아름다운 얼굴도 한 번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초췌해진 자신의 용색을 황제에게 보여주기를 한사코 거절했다. 이에 황제는 끝내 애첩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북방에 한 佳人(가인)이 있어 그 아름다움이 다시는 없을 정도로 홀로 빼어나니’ 하는 노래, 北方有佳人(북방유가인) 絶世而獨立(절세이독립)으로 시작하는 노래의 주인공인 李夫人(이부인)의 고사이다.

 

젊은 시절 목련이 질 때면 생각해보곤 했다, 아름다움은 한때의 榮華(영화)란 말인가 하고.

 

정신적 아름다움 운운 하고 들어보긴 했으나, 나는 사실 그런 말을 곧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눈앞에 아름답고 어여쁜 것이 진짜이지, 정신의 아름다움이라니 이건 또 무슨 변명 또는 수작이냐 싶었다. (나 역시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었던 것이다.)

 

이제 또 하나의 봄을 맞아 목련 피어나는 것을 지켜본다.

 

나이든 내가 다시 물어본다, 아름다움이 여전히 한 때의 榮華(영화)인가를.

 

그러나 쉽사리 답을 얻지 못한다. (나이든 내 얼굴에서 혹시나 어떤 아름다움이 남아있을까 하는 미련 때문인지도 모른다.)

 

옛 어른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아깝다’는 표현을 했다. ‘아이고, 참 아깝기도 하지!’, 이런 식으로. (이제 나도 그런 말을 쓴다.)

 

아름다움이 한 때의 영화라는 말이 실로 맞는 까닭에 ‘아깝다’는 표현을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미디어들은 일본 지진이 났을 때 이웃나라로서 많이 동정을 하다가 ‘독도 문제’로 해서 갑자기 비난 모드 일색이다. 일본의 원전 사고 대응에 대해 가차 없는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일본이 이제 지진이 났다고 해서 그간의 독도 안건을 아예 포기할 일도 아닐 것이고, 또 원칙을 강조하는 일본 정부가 한국의 성원이 있다고 해서 그 문제를 슬며시 감출 것도 아닐 것이니 참 딱하다.

 

지진 건과 독도 건은 별개의 사안으로 다루는 것이 좀 더 성숙되고 온당하다고 보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닌 것 또한 현실이니 그게 좀 그렇다.

 

우리와 일본 사이에는 서운한 감정도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는 상호간에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 실로 적지 않다.

 

그래서 오늘은 일본의 ‘우키요에’에 대하여 간략한 소개를 할 까 한다.

 

한자로는 浮世繪(부세회), 일본 말 ‘우키요’는 浮世(부세)란 말이고, ‘에’는 그림 繪(회)가 된다.

 

우키요에는 ‘뜬 세상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고래로 일본 사람들은 중국 당나라에 대하여 깊은 仰慕(앙모)의 마음을 지녀왔다.

 

신라 시대 혜초 스님처럼 많은 스님들이 중국을 통해 인도에까지 구법여행을 했듯이, 일본 역시 遣唐船(견당선)을 타고 많은 이들이 중국을 찾아가 불법을 연구하고 또 경전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런 까닭에 唐(당)이라 하면 일본인들에 문명과 개화의 상징이 되었고, 당의 제도와 문물을 크게 모방하면서 발전을 했던 일본이다.

 

그러니 이에 당나라 때의 대시인 이백이 남긴 명시 春夜宴桃李園序(춘야연도리원서), ‘봄밤 복숭아꽃과 배꽃이 핀 정원에서 연회를 열면서’ 라는 시는 일본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심어주었다.

 

시에 보면 浮生若夢爲歡幾何(부생약몽위환기하), ‘뜬 인생이 꼭 꿈과 같으니 즐거움은 얼마나 되리?’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浮生若夢(부생약몽)이란 구절이 바로 우키요에, 浮世繪(부세회)의 명칭적 기원이 되었다. 浮生(부생)을 浮世(부세)로 약간 변용시켰을 뿐이다.

 

일본인들은 불교를 깊이 받아들이면서 한 세상 살다가는 것이 실로 덧없는 것이라 여겼다. 人生無常(인생무상)이란 말을 다소 虛無(허무)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삶이 덧없는 것이라는 이 관념은 오늘날 일본인들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뒤 일본 시민들이 얌전히 그리고 묵묵히 처참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 역시 ‘덧없는 삶이 마치 꿈속 같다’는 관념이 여전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어에는 ‘어쩔 수 없다’는 표현이 상당히 다양하다. 체념하는 인생관이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강한 까닭이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일본이고 일본 경제였기에 미국을 비롯한 서구인들이 상당히 경계하기도 했지만, 사실 일본인들은 그다지 욕심도 많지 않고 진취적인 국민성이 아니다. 오히려 이처럼 ‘뜬 세상 이럭저럭 살다가는 것’이라는 관념이 강한 일본인들이다.

 

얌전하고 허무적인 일본인들이 한 때 군국주의의 광기에 싸여 야만성을 보였던 모순된 일도 전체 흐름이 그렇다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여기는 일본인들의 심성이 반영된 것이다.

 

반면 우리는 박정희의 개혁 이후 강렬하고도 악착같은 도전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기에 전 국민 모두가 대단히 적극적이고 의욕 또는 욕심도 엄청나다.

 

그런 까닭에 일본인들은 자기 욕심을 차리기 보다는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것을 우선하는 사람들이고, 우리 국민들은 다소 남에게 부담을 줄지언정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적극성을 보인다.

 

이런 차이에서 실로 다양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와 일본 간의 문화적 이질성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는 점 기억해 두어도 좋을 것이다.

 

돌아가서 ‘우키요에’에 대하여 얘기한다.

 

우키요에는 ‘뜬 세상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의 소재나 대상은 대단히 자극적이고 현란해서 요란스럽기까지 하다. 얼핏 생각에 뜬 세상을 그린 것이라면 조용히 허무한 광경을 그려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으니 여기에 우키요에의 매력이 있다.

 

이런 식의 생각이 담겨 있다.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한 번 살다가는 인생이다. 그러니 이왕이면 요란스레 떠들썩하게 놀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는 생각으로 인해 더 적극적인 표현과 삶의 구가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인생 뭐 있어, 한 번 땡기면 좋은 거고 또 아니면 말고’ 하는 식 말이다.

 

그런 까닭에 우키요에는 더없이 화려하고 사정 없이 요란하다. 관능적이고 자극적이다.

 

주로 목판화로 제작되었지만 천에 물들인 그림도 있고 또 공방에서 손으로 그려낸 값비싼 육필화도 성행했었다. 그리고 엄청 과장법을 사용한 春畵(춘화), 즉 포르노화도 많이 그려졌다. (난 김홍도의 춘화도 좋아하지만, 일본의 춘화 역시 무척이나 즐긴다. 반면 요즘 야동같은 것은 볼 마음이 없다.)

 

우키요에는 주로 도쿠가와 막부 시절인 17 세기부터 20 세기 초까지 성행했다.

 

많은 명인들이 우키요에를 통해 명성을 얻었으니 실로 대중문화의 滿開(만개)였다. 이는 일본이 우리와는 달리 상인 계급, 즉 죠닌들이 급성장하면서 대중적이고 너무 많은 고급 인문적 지식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그림에 대한 수요가 컸기 때문이다.

 

1592 년의 임진전쟁 이후 우리는 모든 면에서 일부 특권 계급들이 세상을 전단하면서 기운이 삭아내렸고 그 바람에 망국의 비운을 겪어야 했지만, 일본은 상인 계급의 성장으로 이미 근대화의 기운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고 이에 부응한 예술 양식이 우키요에였다.

 

후지산을 배경으로 하는 일본 목판화를 한 번 정도 보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이는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후지 36 경이다.)

 

실로 뛰어난 명작들이 많다. 양과 질에서 조선 후기의 우리 그림은 그에 비하면 특히 양적인 면에서 실로 왜소하다 하리라.

 

‘뒤돌아다보는 미인’이란 ‘미야가와 쵸순’의 걸작, ‘도카이도 53 역참’이라는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판화도 생각이 난다.

 

우키요에는 판화로 제작되다 보니 때로는 상품의 포장지로도 사용되었으며, 그런 중에 어떤 것들은 포장지를 통해 서구 세계에 소개되었다.

 

그것을 보고 인상을 받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 특히 고흐는 우키요에의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고흐의 ‘해바라기’나 기타 많은 그림들은 사실 우키요에를 자기 식으로 그려본 것이다.

 

서구 화가들은 일본의 우키요에를 통해 새로운 영감과 스타일을 흡수했고 이에 일어난 흐름이 1890 년 무렵부터 서구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아르 누보’ 즉 ‘뉴 아트’ 였다.

 

미술 평론할 생각은 아닌 까닭에 이런 얘기는 그만 줄이고, 일본인의 문화와 감성을 엿보는 데 있어 우키요에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이런 글을 썼다.

 

‘뜬 세상 붙잡을 것 없으니 이왕이면 더 적극적으로 생명을 구가하고 표현하는 것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리!’ 하는 것이 우키요에, 浮世繪(부세회)가 표방한 정신이었다.

 

기회가 되면 우키요에의 화려 요란한 세계를 즐겨보시기 바란다.

 

목련 피어나는 비내리는 봄날에 꽃의 榮華(영화)에 대해 생각이 갔고, 그러다 보니 덧없는 세상을 노래한 ‘우키요에’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이 좋은 촉촉한 봄날 정취에 방사능 같은 거 생각하기도 싫다. 그저 목련을 보며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화려한 삶의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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