求道(구도)의 길을 가는 분들에게 드리는 약간의 어드바이스
2011.4.18 호호당의 김태규님
지난 주 두 차례에 걸쳐 지리산 쌍계사 계곡을 다녀왔다. 한 번은 제자들과 했던 풍류 여행이었고 또 한 번은 쌍계사 계곡을 지나 계속 산길을 오르면 있는 칠불사 순례 여행, 혼자 다녀온 길이었다.
이 무렵의 칠불사는 무척이나 특별한 느낌을 준다.
계곡 아래쪽 쌍계사 십리 벚꽃 길은 이미 꽃이 폈다 졌음에도, 칠불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경내 풍경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계곡 아래는 늦봄이건만 그곳은 초봄, 봄이 과연 오기는 왔나 싶을 정도로 경내 공기는 차갑고 꽃송이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살풍경한 듯도 싶은 칠불사, 내 화려한 장식을 일체 배제했으니 오는 너도 군더더기 다 떨치고 와야 한다고 꽤나 엄한 표정으로 맞이하는 절이 칠불사이다.
오는 것은 네 자유이나 그렇다고 내 너를 맞이하지는 않는다고 일러주는 절이 칠불사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러니 해마다 이 무렵 칠불사 순례는 환대받지 못하는 客(객)으로서의 여행인 것이다.
줄이면 칠불사 문수보살님 많이 까칠하고 그를 찾아가는 나 역시 적잖이 까칠하니 저나 내나 同類(동류)인 것이고 그로서 인연인 셈이다. 나는 오지 말라고 해도 갈 것이고, 칠불사는 내 간다고 한들 관심도 없겠지만, 계속 이런 인연을 이어갈 참이다.
참배를 마치고 산길을 걸어 내려오다가 여기저기 듬성듬성 피어나고 있는 진달래를 만났다.
참 딱하고 안쓰러운 마음이었다. 겨우내 돌보는 이 하나 없었건만 이 순간 저토록 선연한 분홍의 꽃으로 피웠으니 대견도 했지만, 저토록 어여쁘게 차려 입었다고 해서 그 또한 딱히 반기는 이도 없을 턴데 하는 마음에 미안하고 딱했다. 마치 잃었던 자식이 잘 성장해서 부모를 찾아온 듯한 심정이니 얼마나 그러하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누구 하나 돌보아주는 이 없는 당신이라고 하자. 그런 당신이 그래도 자신의 있음을 세상에 알리고자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소박하지만 최선을 다해 몸을 꾸몄건만 그 또한 반기는 이나 눈길을 주는 이 없다고 한다면 당신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비탈에 피어난 분홍 진달래를 눈물 글썽이며 눈길을 주었다. 그래도 넌 행운이네, 이 순간 내가 너를 보아주고 있지 않니 하고 말을 건네며 위로해주었다.
각자가 각자의 길을 걷는 법이어서 외로운 길이지만, 돌보는 이까지 바라지는 못한다 해도 쳐다보아 주는 이 정도는 있어야 그 길을 갈 수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지금 이 순간에도 求道(구도)의 길을 가고 있는 이, 그리고 그 길이 순간순간 너무 벅찬 이에게 드리는 약간의 어드바이스로 받아주시면 고맙겠다.
이런 어드바이스를 할 자격이 있는지 사실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어드바이스를 드릴 수 있는 근거가 최소한 하나는 있다.
그것은 내 스스로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칠불사 문수보살님을 찾아는 가지만 사실 복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복은 이미 받을 만큼 많이 받았으니 어드바이스 좀 해도 된다는 생각이다.
내가 무슨 복을 그처럼 많이 받았는가 하는 대목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해본다.
그것은 내가 걸어왔던 길이 내게 준 福(복)이다.
1993 년 겨울에 다니던 직장 덜컥 그만 두었지만, 돌이켜보면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1987 년부터 그럴 생각이 속에서 자라났던 것이니 나름 신중한 생각 끝에 그만 두었던 것임을 이제 알겠다.
그리고 고생길로 접어들었다. 물론 나는 그때 그 길이 고생길이 될 것을 전혀 몰랐지만, 미리 알았다면 그럴 리가 없었을 것이다. 걱정도 많았지만, 이제 자유롭게 내 길을 간다는 희망이 더 컸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내 운명의 길은 1997 년이 바닥이었다. 나이 마흔 하고도 둘에 바닥이었으니 펄펄 날아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참 한심하기도 하지, 고생길을 나선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현실의 길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었지만, 내 마음에서 그 길은 물 없는 사막 길이었고 출구 없는 밀림의 길이었으며 또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조각배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물 없는 사막 길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물을 구해 마실 수 있었으며 출구 없는 밀림의 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 밀림을 헤치고 나왔다는 것이다. 또 표류하는 조각배였지만 지금 나는 항구에 도착해서 이렇게 멀쩡히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건 나만의 행운이었던 것일까?
깊이 생각하고 궁리한 끝에 얻은 결론인 즉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행운이 따른다는 것이 내 확인이다.
그리고 얻은 소중한 경험이 몇 가지가 있으니 지금 드리는 어드바이스가 그것들이다.
첫째, 길을 믿으라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가는 길이 어떤 길이든 그 길을 믿으라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刀山(도산)을 넘고 있든 아니면 劍林(검림)을 헤쳐 나가고 있든 또는 火湯地獄(화탕지옥)으로 접어들었건 상관없이 그냥 그 길을 믿으라는 얘기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런 보장 없는 그 길을 믿어야 하고 또 믿지 않고서는 그 길을 갈 수 없다는 점이다.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당장 당황해서 그럴 뿐이지, 모든 길에는 당신을 수호하기 위한 按配(안배)가 되어있다. 그러니 길을 믿으라는 얘기이다.
다음으로 얘기할 것은 길을 믿으려면 그 길에 당신의 목숨을 송두리째 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믿을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송두리째 맡겨라는 것이 내 어드바이스이다.
이런 생각도 해야 한다. 어차피 맡긴 목숨이니 길이 당신의 목숨을 가져간다면 그 또한 행운이라고 여기기 바란다. 그렇다면 그게 최선이고 최상이라고 여겨야 한다.
물 없는 사막 길에서 목이 말라 죽는다면 적어도 하얀 백골이 되어 뒷사람에게 이정표라도 되어줄 것이니 그 정도를 오히려 幸運(행운)으로 받아들일 준비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길아, 내 너에게 나를 맡겼으니 죽이든 살리든 네가 알아서 해라, 난 모른다, 나는 그냥 간다고 마음을 갖는 것이 훨씬 편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드릴 얘기는 그 험한 길도 알고 보면 당신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이전에 무수한 선배들이 선인들이 걸어간 길이라는 점을 알면 되겠다.
꼭 내가 나이기에 행운을 거머쥐겠다는 생각을 어느 순간 내려놓으면 길은 서서히 그 안배의 정체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이 나선 길에 대해 투정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당신의 선택이 결국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물론 나 역시 내 길을 다 마치지 않았다. 그래서 어드바이스 드리기가 좀 그렇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과로 볼 때 내가 택한 길은 모두가 처음에 조금 까칠해서 그렇지 나름 좋은 길이었고 아름다운 길이었기에 지금 나는 길을 믿는다.
좋다는 보장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조건 좋다고 믿는다. 그리고 좋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길을 가고 있다면 당신 역시도 어느 순간 내 말에 공감하는 때가 올 것이다. 그 길은 아마도 같은 길일 것이니 우리는 어떤 행태로든 결국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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