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써보는 漫筆(만필)
2011.2.19 호호당의 김태규님
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은 西浦漫筆(서포만필)이란 책도 남겼다. 우리의 역대 詩歌(시가)와 說話(설화), 散文(산문) 등에 대해 그리고 儒佛仙(유불선) 三敎(삼교)에 대한 얘기, 수학이나 律呂(율려),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등등 그의 해박한 지식과 분방한 사고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으로서 내 생각에 조선조 최고의 에세이집이 아니겠는가 싶다.
김만중은 남해안의 孤島(고도)에서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西浦(서포)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약간은 빗나갔던 그의 생애였지만 뭐 산다는 것이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토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서초동의 洞窟(동굴)에 들어와 서포 김만중의 글을 읽는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니 햇빛 바르고 대기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오늘은 雨水(우수), 기운이 완연하니 이제 겨울 끝 봄 시작이다.
만필답게 말머리를 돌린다. 밤마다 길고양이 밥을 꽤나 오랫동안 주다보니 알게 된 것이 있다. 그렇게 열심히 먹을 것을 가져다줌에도 불구하고 길고양이의 삶은 대단히 짧다는 점이다.
작년 가을 무렵, 나만 보면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와 열심히 우렁차게 울어대며 조르던 ‘아옹이’ 모습을 못 본지 벌써 몇 달이다. 아들과 나는 ‘아옹이’가 다른 곳으로 이사해갔다고 서로를 위로해보지만 세상을 떠난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번도 보이지 않을 까닭이 없으니 그렇다.
그간 적지 않은 고양이들을 뒷산에 묻어주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고양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사는 동네는 갇힌 곳이라 다른 것으로 옮겨갈 가능성은 별로 없으니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는 길고양이의 세계이다.
이름을 붙여준 고양이만도 40 마리가 넘건만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고양이들이 너무도 많다. 屍身(시신)을 만나면 뒷산에라도 곱게 묻어주니 그나마 위로라도 되지만, 그냥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 고양이들은 간 자취마저 없으니 그저 내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다.
새 얼굴을 만나도 서서히 이름을 붙이지 않고 있는 나를 自覺(자각)한다. 사랑은 변함이 없고 다함도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상처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그렇게 시키는 것 같다.
다시 말머리를 돌린다. 이집트 사태, 民主革命(민주혁명)이라는 수식어가 역겹다. 세계적인 흉작으로 식량, 빵을 굽는 밀의 가격이 너무 올라서 벌어진 소동이건만 왜 미디어들은 그럴 때마다 민주혁명 운운 할까?
배가 고파 살수가 없어 들고 일어났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서방세계 미디어들은 생전 배고플 일이 없어서 그런가? 1960 년의 4.19 역시 배고픈 국민들의 외침이었지 그게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었던가 말이다.
孟子(맹자)선생이 일찌감치 말했듯이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무바라크가 백성의 먹을 것을 미처 살피지 못해서 쫓겨났다고 하면 어디 잘못된 소리일까? 空虛(공허)한 觀念(관념)의 장난질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역겹기만 하다.
다시 다른 얘기로 가본다. 엉뚱한 얘기지만 곁들여 보자. 漫筆(만필)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 ‘신성로마제국’에 관한 에피소드이다.
‘Holy Roman Empire’, 기막히게 멋진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홀리 로만 엠파이어, 환타지 소설에 나오는 제국의 명칭이라 해도 아무 부족함이 없다.
유럽의 샤를 마뉴 대제가 황제에 올랐던 800 년부터 1806 년 공식적으로 사망할 때까지 무려 1000 년간이나 존속했던 제국의 이름이 신성 로마 제국이다.
그러나 강력한 하나의 집중화된 실체라 하기보다는 그저 수많은 제후들의 연합체였던 세월이 훨씬 많았던 제국이었다. 유명무실한 제국이었던 셈이다. 그 바람에 18 세기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로부터 “神聖(신성)하지도 않은 것이 로마도 아닌 것이 이제는 帝國(제국)도 아니네!” 하는 야유를 받기까지 했다.
그런 수모를 받은 신성 로마 제국이었지만, 이름 자체는 전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神聖(신성)이란 기독교의 신성이니 敎權(교권)을 상징하고 있고 ‘로마’는 현실 권력의 대명사이니 교권과 정권이 결합한 神政一致(신정일치)의 제국을 표방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절묘한 결합이었기에 이 신성로마제국의 이상은 오늘날에도 살아남아 마침내 통합유럽, EU를 결성시키는 근원적인 바탕이 되고 있다. 아침 신문을 보니 독일의 메르켈 아줌마가 EU 회원국들에 대해 근검절약해야 한다는 내용의 이런저런 잔소리를 연신 토해내고 있다고 한다.
신생의 EU 가 신성로마제국처럼 또 하나의 실체가 없는 연합체로 끝날 것인지 이제 서서히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따지고 보면 미국과 소련이 힘을 겨루었던 冷戰(냉전)도 로마제국의 법통을 이어가기 위한 투쟁이었으니 아무튼 ‘신성로마제국’의 관념은 유럽과 그로부터 파생된 미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백인 코카서스 인종의 나라들을 이끌어가는 영원한 里程標(이정표)인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신성로마제국에 관한 얘기를 한 번 해볼 생각이다.)
만필은 갑작스런 종말을 볼 수도 있다. ‘써든 데쓰’ 방식이 허용된다. 그래서 오늘은 이만 마칠까 한다.
이제 봄이다.
생동 발랄한 개나리가 먼저 피면 이어 極端(극단)적으로 優美(우미)한 木蓮(목련)이 필 것이며, 화냥기 가득한 벚꽃이 피면 붉되 천진한 진달래, 桃色(도색) 가득한 복숭아꽃이 순번대로 산야를 메우는 봄이 저기서 오고 있다.
우리 마음도 피어나는 꽃을 따라서 색깔이 물들어가고 변해갈 것이니 봄은 변덕스러운 계절, 그 변덕과 변심을 허용하는 계절이다. 맘껏 변덕을 부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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