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性(이성)의 계절, 感性(감성)의 계절 (1)
2011.1.4 호호당의 김태규님
오늘은 음양과 그 변화에 관해 제법 깊이가 있는 얘기를 드릴 까 한다. 올해 2011 년의 경우 夏至(하지)는 6월 22일에 든다. (참고로 작년에는 6월 21일이었다.)
여름 夏(하)가 至極(지극)한 날이라는 뜻의 夏至(하지)이다. 여름이 가장 절정에 이른다는 의미인 데, 여기서 여름이란 한해 중에서 해가 비치는 시간, 즉 日照(일조)시간이 가장 긴 날을 의미하는 것이지 온도가 가장 높은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가 계절을 구분하는 것은 온도가 아니라 해가 비치는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반대로 冬至(동지)는 겨울이 지극한 지점이란 뜻이며, 여기서의 동지 역시 해가 가장 짧은 때를 말한다. 온도가 기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는 여름의 가운데에 있고 동지는 겨울의 가운데에 있다. 마찬가지로 춘분은 봄의 가운데, 추분은 가을의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해가 비치는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계절의 구분은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계절 감각과는 차이가 크다, 상당히 크다.
하지를 여름의 절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없으며 동지를 겨울의 절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없다. 우리는 7월 하순의 바캉스 시즌을 여름의 절정이라 여기며, 1월 하순을 겨울의 절정으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몸은 그렇게 받아들인다.
3월 21일에 있을 춘분이나 9월 23일에 있을 추분을 봄과 가을의 절정이라 여기는 사람도 당연히 없다. 봄이라면 당연히 꽃이 피고 새가 우는 4월 중순 경부터이며, 가을이라면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날씨가 선선한 10월 중순이다. 그 역시 우리 몸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감각에 바탕을 두고 계절을 정할 것이지 왜 이상하게 해가 비치는 시간을 기준으로 계절을 정해서 그런 時差(시차)를 만든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6월 22일의 夏至(하지)가 아니라 7월 23일의 大暑(대서)를 여름의 한 가운데에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가장 더운 때를 여름의 정중앙에 놓고 가장 추운 때를 겨울의 정중앙에 둘 일이지, 왜 애매하게 해가 가장 긴 때와 가장 짧은 때를 여름과 겨울의 정중앙에 놓느냐 하는 얘기이다. (독자 중에 사실 이런 의문을 가져보신 적이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아무튼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계절’과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계절’ 간에는 정확하게 한 달의 시차가 존재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365.25일을 12 로 나눈 30.43 일의 시간적 차이가 있다. 달리 말하면 理性(이성)으로 알고 있는 계절과 感性(감성)으로 느끼는 계절 간에는 한 달의 시차가 존재한다.
이와 같이 理性(이성)과 感性(감성) 간에는 거리가 있으니, 이에 대해 乖離(괴리)라는 하는 다소(?) 유식한 단어를 써보자. 이성과 감성 간의 괴리, 이 차이가 중요하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중요하며, 세상의 흐름을 미리 예견함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이 세상의 모든 복잡한 사회 현상은 바로 이 이성과 감성 간의 괴리로 해서 생겨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절은 축이 비딱하게 기운 지구가 태양을 한해에 한 바퀴 돌아오는 것, 즉 公轉(공전), 영어로 revolution 으로 해서 생겨난다. 여기까지는 천문학적 지식의 영역이다. (모두들 관심 없어 하는 이성의 영역이고 학문과 지식의 영역이다.)
그러나 당신의 사랑하는 연인이 어느 날부터인가 시큰둥해지면서 애정이 식어버리게 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고 중차대한 문제이다. 그런데 그런 좋지 못한 일이 생기는 까닭이 근본적으로 지구의 태양 공전에 있다고 한다면 놀랄 일이 아닌가! 그러니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천문학적 영역이 愛情(애정)의 영역과 직결된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돈이 최고야 하면서 열심히 돈 버는 데 골몰하는 당신도 마찬가지. 당신이 지금 하려는 아이템 또는 프로젝트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역시 지구의 태양 공전과 연결된다면 당연히 천문학적 영역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좀 건너뛰긴 했지만 결코 견강부회는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지금 내가 당신의 관심을 끌고는 있지만, 이성과 감성의 영역 간에는 차이가 있고 거리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 성적이 떨어지고 있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가열차게 공부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이는 이성의 영역에서 내려오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지금 손은 책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게임하느라 마우스와 키보드를 건들고 있으니 이는 감성의 영역에서 나오는 명령이다. 이성이 감성을 이기지 못하는 학생은 성적이 계속 뒤로 쳐질 것이고, 싫지만 이성으로 감성을 통제하는 학생은 성적이 오를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다 보니 문득 헤르만 헤세가 떠오른다. 그가 남긴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우리말로 ‘知(지)와 사랑’이란 제목의 소설이 생각난다.
知性(지성)은 이성의 영역이고 사랑은 감성의 영역이다. 헤세는 이성과 감성의 차이, 그리고 그간의 갈등과 조화에 대한 아름다운 소설을 남겼다.
우리 사회가 지금 한창 겪고 있는 이념의 문제에 대해서도 나는 이성과 감성의 문제로 구분할 수 있다는 약간 색다른 생각이 있다. 이른바 右派(우파)는 理性(이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사조이고, 左派(좌파)는 感性(감성)을 대변하는 정치적 사조라고 구분할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구분이 꼭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이 있다고 본다.
가정에서 대개의 경우 아버지는 이성적이고, 어머니는 감성적이다. 가정 내의 우파와 좌파라 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 구분이니 혹시 여성분들 열 받지 않으시길.) 아버지는 돈을 계산하고 있고 먹고 살 일을 궁리하느라 여념이 없다.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보다 엄격해지고 구두쇠 노릇도 한다. 권위적이고 명령조로 변한다.
아들이 ‘아버지, 나 미국으로 어학 연수 가고 싶어요’ 하면 아버지는 ‘시끄러, 지금 우리 형편이 어떤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니’ 하고 호통을 친다.
그러면 야단을 맞고 우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조용히 불러서 ‘네가 정녕 가고 싶다면 이 애미가 어떻게 해서든지 보내주마, 너만 열심이고 진지하다면’ 하면서 달래준다. 이처럼 이성은 陽(양)이고 감성은 陰(음)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아버지들도 세태가 그래서 그런지 모두 어머니 같다. 자상하고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주려고 한다. 나는 이런 경향을 두고 시대 자체가 陰(음)해졌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세상흐름이 음의 원리가 양의 원리를 압도하면 세상은 대개 어려워지기 直前(직전)이다. 우리가 어렵던 1960-1970 년대 시절의 아버지들은 모두 엄격하고 구두쇠였다. 일에 열심일 뿐 자상한 면은 별로 없었다. 양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였고 바닥에서 일어서 도전해가는 시대였다.
그러나 1990 년 대 중반부터 어느 정도 우리가 기반을 잡자 서서히 음의 원리가 앞서가기 시작했다.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 역시 강력한 남성적 리더십보다는 대중의 감성을 돌보고 살피는 시대로 변해갔다.
우리 국민들의 정서도 우에서 좌로 옮겨갔다. 그 절정은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하는 감성의 시대였다. 陰陽(음양)이 갈마드는 모습이라 하겠다.
대개 이성의 소리는 조용하고 박력도 없지만, 기본적으로 흥미가 없다. 흥미는커녕 어려운 주문만 가득하다. 대표적으로 히틀러의 독일에 맞서 전쟁을 이끈 처칠의 연설에 들어있는 ‘피와 땀과 눈물’ 같은 재미없는 것들이 이른바 이성의 요구이고 주문이다.
반면 감성의 소리는 정겹고 살갑다. 동시에 거칠 때도 많다. 하지만 작게 말해도 귀에는 크게 울려온다. 대표적인 좌파의 주장으로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서 같이 가자고 호소해온다. 당연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가진 자를 미워하는 거친 소리도 많다.
우리 사회 내 좌파의 목소리가 사실 이성적이지 않은 구석이 많아도 우리가 함부로 부인하지 못하는 것은 감성적 공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좌와 우에 대해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세상이 풍요로워지면 좌파적 주장, 감성적 주장이 득세를 한다. 풍요의 시대인 까닭에 같이 나누자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 본다. 하지만 세상은 그대로 가는 법이 없고 때가 되면 세상이 어려워진다. 그러면 어느덧 서서히 우파의 주장이 귓전에 들려온다.
어려운 자에 대해 온정을 가지고 돕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을 배우게 하여 결국 자립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이성적인 주장이 더 설득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최근 박근혜 전 대표가 내세운 복지국가론에도 이런 요소가 있는 것 같다. 이에 우리 국운이 서서히 힘든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음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옳은 것이 없듯이 우파와 좌파의 주장 역시 세상 흐름에 따라 변할 뿐 궁극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내 스스로 陰陽觀(음양관)이라 한다.
참 오늘 글은 종횡무진이다. 천문학으로 시작해서 사회 이념의 문제에까지 이르렀다. (내친 김에 갈 데까지 그냥 가보기로 한다.) 이성과 감성 간의 乖離(괴리)를 얘기하다 보니 그런 것인데, 이 차이는 머리로 아는 계절과 몸으로 느끼는 계절의 차이에서 온다는 얘기에서 시작되었다.
이성과 감성의 괴리에서 시작된 것을 얘기하라고 한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朱子學(주자학)은 인간과 사회가 공존하고 잘 살아가려면 이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학문이고, 陽明學(양명학)은 감성을 좀 더 강조한 학문이니 이 또한 이성과 감성 간의 괴리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로 이해하는 계절과 몸으로 느끼는 계절의 차이는 바로 이성과 감성의 차이이자 괴리인 것이다.
언젠가 세상은 5 년의 時差(시차)가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 얘기 또한 이성의 계절과 감성의 계절 간의 차이를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아주 좋은 사업 아이템을 발견한 사람이 있어서 올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해보자. 물론 그 사람의 보는 눈이 정확하고 예리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얘기이다. 당연히 일반 사람들 또는 잠재고객들은 그 아이템의 좋은 점을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잠재고객이 진짜 고객으로 변하기까지 5 년이 걸린다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 올해 제대로 된 사업 아이템을 시작했다면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망을 확충하는 내적인 자체의 노력과 고객들이 그 아이템의 진가를 인정하고 대거 사주기 시작하는 외적인 환경이 서로 맞물리는 시점이 5 년 뒤가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아이템이 좋아도 고객들 사이에 인지도가 높아져서 본격 판매 내지는 대량 판매되기 까지는 5 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니, 그 사이에 자금 부족 등등 여러 다양한 이유에서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이템의 문제가 아니라 준비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 되는 셈이다.
여기서 좋은 아이템을 발견하는 것은 사업자의 훌륭한 理性(이성)이고 그것을 ‘시간이 지나서’ 받아들이는 것은 대중의 感性(감성)인 것이다. 좀 더 얘기하면, 지금 아이템 인지도가 이미 급상승하는 국면이라면 그 사업에 뛰어들기는 늦은 감이 있다 하겠다.
대개 인지도가 급상승하면 이를 알아차린 대기업이나 큰손이 물량작전으로 사업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실패로 그친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한국야쿠르트의 비락식혜가 있다. 비락식혜가 1994 년 무렵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여러 업체에서 모두 유사제품을 만들고 할인판매 등 다양한 판촉으로 식혜 시장에 진입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비락식혜가 결국 시장을 차지했고 지금도 이 회사의 효자 품목으로 굳건히 위치를 점하고 있다.
크게는 자동차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자동차가 선두 주자였고 이에 기아나 삼성, 대우, 쌍용 등의 자동차 기업이 생겨났지만 결국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사실상 현대자동차 밖에 없다.
기아는 현대자동차에서 인수했고 삼성은 프랑스 르노로, 대우는 GM 으로, 쌍용 역시 외국기업으로 넘어갔다. 결국 선두 주자가 시장을 만들어내고 이에 다른 기업들이 진입해서 어려움을 겪지만 그것은 시련일 뿐이고 선두주자가 살아남는 것은 그만큼 시간과 세월의 내공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결국 고속도로마저 제대로 없던 시절 자동차 시장이 열릴 것으로 내다본 고 정주영 회장의 생각은 뛰어난 이성적 판단이었던 것이다.
이성의 계절과 감성의 계절이 빚어내는 다양한 일들이니 얘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글이 길어졌으니 오늘은 이만 하고 내일 다시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정리하고자 한다.
理性(이성)의 계절, 感性(감성)의 계절 (2)
2011.1.5 호호당의 김태규님
이성과 감성 간에는 乖離(괴리)가 있다는 얘기를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6월 22일의 夏至(하지)는 ‘빛의 최대점’이고, 그 한 달 뒤인 7월 23일의 大暑(대서)는 ‘열의 최대점’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괴리는 태양빛이 땅을 달구기 시작하면 땅은 그 빛을 받아들여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데워지는 까닭에 그런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머리, 즉 이성은 하지를 여름의 절정으로 판단하지만 감성 즉 몸은 대서를 여름의 절정으로 느낀다.
理性(이성)은 陽(양)이고 感性(감성)은 陰(음)이다. 太陽(태양)은 陽(양)이고 大地(대지)는 陰(음)이다.
이 시간적 차이는 한해를 기준으로 하면 한 달이 되고, 60 년 주기를 기준으로 하면 5 년이 된다. 나아가서 360 년 주기를 기준으로 하면 30 년이 된다. 세상의 흐름을 이해하려면 이 시간적 거리들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지금부터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제 응용 편에 들어가 본다.
사람은 이성과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해보자. 어떤 이는 이성이 감성보다 앞설 것이고, 어떤 이는 감성이 이성보다 더할 것이며, 간혹 이성과 감성이 均衡(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성과 감성 간의 정교한 균형을 취하고 있는 사람은 대단히 드물다. 이런 사람은 無病長壽(무병장수)하는데 이는 몸과 마음이 모두 균형을 잡은 까닭으로서 한의학에서는 이런 사람을 陰陽和平之人(음양화평지인)이라 한다.
참고로 건강에 관해 짧게 얘기할 것이 있으니 길을 약간 벗어나보자. 최근 들어 ‘시대와 不和(불화)한다’는 제법 감성적인 표현을 쓰곤 한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고 원망스럽거나 미울 때 그런 표현을 쓰는 것 같다.
‘시대와 不和(불화)’하는 자 중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으니 온건한 자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고 하듯이 스스로 세상과 담쌓고 사는 방식이 있고, 보다 적극적인 자는 세상과 계속 마찰하면서 사는 방식이 있다. 극단적으로는 개인적으로 세상과 戰爭(전쟁)을 하는 사람도 있다.
시대와 불화하는 것에는 당연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화하면 그에 따른 應分(응분)의 代價(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알아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가 중에 가장 우선적인 것이 ‘건강의 상실’이다. 다시 말해 몸을 다치게 된다.
몸을 다쳤다는 것은 사실 정신을 다친 결과이다. 불화하는 가운데 우리의 정신과 감성 체계가 균형을 잃게 되면 몸이 傷(상)하는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여러 가지 감정, 이른바 七情(칠정) 중에서 가장 에너지 소모가 큰 것은 다름 아닌 미워하는 마음이다. 화를 내는 것이 순간적으로 가장 소모가 크지만 너무나 큰 까닭으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워하는 마음은 마치 화로 속의 꺼지지 않는 불길과 같아서 두고두고 우리 마음을 태우고 말린다.
不和(불화)는 바로 이런 감정의 소모를 동반하기 마련이기에 두려운 것이다. 그러니 시대와 불화한다? 말은 제법 그럴 싸 해도 실은 할 짓이 아니다. 그저 젊어 혈기왕성하고 나름 멋 좀 부리는 시절에 좀 하다가 그만 둘 일이다.
좌파 성향의 사람 중에 시대와 不和(불화)하고 세상을 미워하면서 힘들게 사는 사람 많이 보게 된다. 그런 분에게는 진심을 담아 얘기해주고 싶다. 미움의 말은 상대를 다치게 할 뿐 아니라, 실은 내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 칼날이라고.
그러니 진보와 좌파를 하려면 미움이 아니라 더 따듯한 마음과 세상을 포용하는 胸襟(흉금)을 가지고 해야만 그게 더 알차고 힘찬 진보가 되고 좌파가 된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다.
예전에 어떤 온건 좌파성향의 후배가 술자리에서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자 이제 자신은 세상과 불화해서 담을 쌓고 살기로 했다고 서운한 표정의 말을 하는지라, 나는 ‘글쎄, 그 담 오래가지 않아 무너질 껄’ 하는 생각에 그냥 웃으며 말없이 술잔을 건넸던 일화가 있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이성이 너무 앞서면 심하게는 세상을 30 년 앞서 간다. 앞서 간다고 하니 先覺者(선각자)인 것도 같고 시대를 초월한 사람 같아 칭찬 같기도 하겠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앞서 가다보면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데 말이다. 뒤돌아보면 따르는 이 없고 홀로 눈 펄펄 내리는 벌판을 가야하니 그거 할 짓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가 끝나갈 무렵인 2007 년에 2030 비전이란 것을 발표한 적이 있었으니 시대를 30 년 앞서가는 좋은 표본이다. 당시 우리의 모든 희망과 원망을 담은 아주 훌륭한 정책 연구서였고 그림이었다.
그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한숨도 내쉬었다. 그 내용의 대강이라도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싶어 미소를 지었고, 구현될 시기를 헤아려보니 한숨이 나왔다.
2030 년은 庚戌(경술)년이 된다. 경술년은 알다시피 우리의 국운이 이제 막 겨울을 벗어나 초봄의 때에 해당된다. 1910 년의 경술국치가 그렇고, 1970 년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였다. 바닥을 친 국운이 상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무렵이 바로 경술년이고 오는 2030 년 역시 나름 그런 운일 것이다.
따라서 2030 비전은 2030 년에 가서 구현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비로소 구현하기 위한 실천적 노력이 펼쳐질 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비전은 그로부터 30 년이 지난 2060 庚辰(경진)년에 더 훌륭한 모습으로 구현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녀와 후손들의 미래에 대해 너무 혼자서만 해결해주려고 유학 보내고 집 물려주고자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다.)
노무현 정부를 두고 얼치기 좌파다 아니다, 우파가 보낸 트로이 목마였다는 식의 실망스런 평가들이 무성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노무현 정부는 진정한 복지국가로 가기 위한 사전 예행연습이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또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정부에 대해 나름의 점수, 적어도 獎勵賞(장려상) 정도는 주고 싶다. (연습은 해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성이 앞서면 30 년을 질러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의 고달픔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다. 이성이 앞서면 심하면 30 년, 중간이면 5 년, 적게는 한 달을 앞서 가게 되고 자칫 그 바람에 시대와 불화할 수도 있으니 그럴 필요 있겠는가.
다음으로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잡은 자는 지금 일을 시작하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5 년 뒤 또는 30 년 뒤라는 점을 잘 알고 그 기간 동안 부단히 준비하고 노력해가게 된다.
앞글에서 사업 시작 시기는 대중들이 고객들이 대거 받아들이는 시기보다 5 년이 빨라야 한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 또한 미래를 바라보고 지금 着手(착수)를 하는 것이니 적지 않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함은 물론이고 당연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서 그 사람은 성공을 하게 될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민주화로 공식 이행한 것은 1992 년에 등장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였다. 그리고 그 30 년 전인 1960 년 무렵 4.19 당시에 등장한 민주화 세력은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마침내 결실을 거두었고 성취를 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감성이 이성보다 앞서가는 사람의 경우를 말하기로 하자. 햇빛이 비쳐오니 땅이 조만간 데워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냥 땅이 달구어지고 나서야 느끼는 사람의 경우이다.
눈앞에 닥쳐서야 어떤 일에 착수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뒷북을 친다’고 말한다. 일이 끝나가는 마당에 시작을 알리는 북을 쳐대니 생뚱맞은 것이다. 남이 애써서 일구어놓으면 염치도 없이 젓가락 얹고자 하면 그것 역시 뒷북이다. 후발주자는 후발주자의 전략과 남다른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냥 따라하는 것만으로는 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세상은 대부분 뒷북치는 이들로 가득하다. 남이 MBA 마치고 돌아와서 그것을 기화로 한참 잘 나가기 시작할 때 그제야 MBA가 무슨 말의 略語(약어)니 물어가면서 유학 떠나는 이가 뒷북치는 것이고 미래가 없다. 이게 대세라는 말이 너도 나도 떠들기 시작하면 그게 대세가 아니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이고 따라가면 그 또한 뒷북이다.
대세에 편승하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길을 항상 찾아야 하고 달리 생각할 줄 알아야만 자신의 길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대세에 편승한 주제에 그것으로 대박을 꿈꾸는 얼토당토않은 이도 있으니 그런 자의 미래는 볼 것도 없다 하겠다.
2006-2007 년에 집값 상승이 대세다 싶어 거액의 빚을 내어 집을 산 이에게 무슨 해줄 말이 있으리! 정신 차려야 한다, 지금은 디레버리지가 흐름이고 다시 레버리지의 시대가 오려면 한 30 년 기다릴 요량을 하든가.
스스로가 잘못해서 어려워져도 정부 탓을 하고 정부가 해결할 일이라 주장하는 것이 요즘 유행이긴 하지만 정부 역시 무한정의 힘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 잊지 말아야 하리라.
이제 얘기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 오늘 글도 제법 분량이 된다. 이성의 계절이 있고 감성의 계절이 있으니 어느 것도 옳은 것이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다. 두 가지를 구분할 줄 알면 되는 것이다.
새해 비록 陰陽和平之人(음양화평지인)은 못 되더라도 그 흉내는 내어보자는 취지에서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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