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는 내 안의 나
2010.12.21 호호당의 김태규님
겉으론 보기엔 멀쩡해도 속을 들여다보면 아픈 사람이 많다. 그러나 아픔을 느끼는 사람은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희망이 크다. 痛覺(통각) 자체가 치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겉과 속이 다 온전해보여도 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으니, 그런 사람은 자신의 속에 아픔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까닭으로 치유하기가 아주 어렵다.
(지금 하고 있는 얘기는 오랜 상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고 나 역시 그 이전에는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내용이다. 그 이전에 프로이드나 융의 책을 여러 권 즐겁게 읽긴 했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교양 수준이었다.)
우리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많은 것들이 있다. 우리 속에 우리가 모르는 채로 있는 것들은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로 인한 경우가 많다. 그것들은 나쁜 것도 있지만 좋고 긍정적인 것들도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 긍정적인 것들은 우리가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을 때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흔히 ‘肯定(긍정)의 힘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지만 그 긍정의 힘은 우리 속에 우리가 모르는 긍정적인 것들이 있을 때에만 발휘된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우리가 모르는 부정적인 것들이다. 처음에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정신적인 상처였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악화가 되어 나중에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되면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신기한 것은 그런 외부를 향한 발작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여서 아예 처음부터 없던 일로 해놓는 수도 있다는 점이다.
치유된 것도 아니고 히스테리로 발작을 일으키지도 않으면서 마치 없던 것처럼 자신의 내면으로 감추어 버리는 것이다. 감춘 채 시간이 많이 지나면 그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아예 의식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상처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의식하지 않고 살아도 아무런 일이 없다면 그 나름 나쁘지 않다고 할 것이다. 망각도 치유의 하나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기에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사람의 속에 자신도 모르는 상처가 있고 그것이 살아가면서 긍정적인 삶을 방해하고 심지어는 자신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위를 먼저 설명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의 생년월일시, 즉 四柱(사주)를 알면 그 사람의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동시에 그 사람의 운세가 지닌 60 년에 걸친 오름과 내림을 산정할 수 있다.
어릴 적에 운세의 바닥을 통과해온 사람 중에 바로 그런 상처를 감추고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경험했다.
인간은 누구나 偏見(편견)을 지니고 살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돌이킬 수 없이 되어 그 문제에 대해서만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거나 유난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 그 사람의 어릴 적 시절, 특히 바닥 운에서 있었던 일들 속에 그 원인이 있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기에 물어보면 없다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더러는 그 시절에 대한 아무런 기억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도 큰 상처가 되어 그 아픈 시절 전체를 기억 속에서 통으로 지워버린 경우이다.
심하게는 중학교 시절에 대해 아예 그 어떤 기억도 없는 경우도 여러 번 보았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그 때 친했던 친구는 누구였는지 당시 가정환경이 어떠했는지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그 시절에 대해 통째로 기억이 없는 경우였다.
이런 사람 역시 살아가면서 남들이 중학교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을 보고 들었을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스스로에 대해 중학교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하고 물어보면 ‘글쎄요, 저 역시 중학교를 졸업한 것이 사실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여태껏 한 번도 그 당시에 대해 회상해본 적이 없으니 정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네요’ 하거나 또 어떤 이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절에 대한 기억 자체가 아무 것도 없네요, 왜 이렇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그대로 의식의 깊은 곳으로 밀어 넣고, 다시는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처는 그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부단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끊임없이 그 사람의 좋은 길을 방해하고 훼방 놓는다. 때로는 본인 스스로도 ‘내가 이런 경우 왜 이러지?’하고 의아해하면서도 못내 부정적인 선택을 한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 속에 그 사람도 모르는 무엇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존재하니 이를 뭐라고 해야 하는가?
빙의 현상이란 것이 혹시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뭐 정신과 전문의도 아니고 귀신을 보는 초월적 능력을 지닌 사람도 아닌 까닭에 뭐라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어린 시절 운세가 바닥을 지나면서 겪어야 했던 괴로웠던 일들이 스스로도 모르는 상처로 남아 훗날 성장한 다음에도 그 사람의 行路(행로)를 방해한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물론 그런 시절에 많은 상처를 받았으나 우리 속에 있는 또 다른 긍정적인 것들이 그 상처를 잘 치유한 경우 또한 허다하다.
어린 시절에 당했던 성폭행, 부모에게서 받은 폭행, 가난한 나머지 철없는 또래 아이나 친구로부터 받은 수모나 모욕 등등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상처는 실로 다양하다.
그런 상처 중에서 숨겨졌을 뿐 치유되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은 상처는 나중에 성장 과정에서 그 사람만의 특이한 편견이나 고집이 되고, 그런 편견이나 고집은 경험이나 학습, 독서를 통해 더욱 강화되어 그 사람의 정상적인 삶을 방해하게 된다.
다만 그 본인은 그것이 경험이나 학습, 또는 독서를 통해 자신이 그런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여길 뿐 어린 시절 지울 수 없는 상처, 스스로 숨겨버린 상처에서 발단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다.
그렇기에 아주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여도 어떤 부분에선 도저히 합리적이라 할 수 없는 태도나 자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합리적이나 논리적인 설득이 불가능해지고 더러는 자신 스스로도 내심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결국 좋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다.
수백 여건의 이런 경우를 상담하면서 경험했다. 그런데 이를 치유하는 것은 뜻밖에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치유란 아주 간단하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 기억에서 지워진 부분, 너무나도 아파서 스스로 지우는 방법밖에 없었던 그 일 내지는 상처를 이제 성인이 된 본인이 다시 연상토록 해서 확인해보는 것이 전부이다.
다만 처음에 그 부분을 다시 연상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대부분 본인 스스로 끝내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그 장면을 확인하게 되고 그것으로 치유가 된다. (아니 치유가 시작된다고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겨울 구름 낀 하늘 아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런 얘기가 하고 싶어져서 두서없이 이런 이상한 얘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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