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이름을 부름으로써 시작된다.
2010.12.19 호호당의 김태규님
어떤 무엇을 다른 것과 구분하여 이르는 것을 ‘이름’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무엇에 대해 이름을 지어주는 까닭은 다른 것과 ‘구분’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왜 구분을 짓는가? 그것은 다른 것과 구분을 지어야 하는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과 구분을 지어야 하는 동기가 무엇일까?
그것은 이름을 붙여주는 대상이 다른 것들에 비해 ‘내게 또는 우리’에게 특별하기 때문이다.
생활 속에서 우리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 通姓名(통성명)을 하게 된다. 그런데 새로 만난 그 사람이 내게 특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이름을 대개 忘却(망각)하게 된다.
내게 특별하지 않은 존재나 대상은 비록 이름이 있어도 사실상 내게 있어서는 이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다가 자주 그 사람을 만날 이유가 있고 또 만나다 보면 절로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실은 그때서야 비로소 그 사람의 이름이 ‘내게 있어서’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모르는’ 우리 사이에는 이름이 없는 거나 같다. 대한민국에 5천만의 사람이 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그리 많지 않고 이 글을 읽는 독자 역시 그럴 것이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록 이 시각에 대한민국에서 함께 존재하고는 있지만,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나의 삶’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예 이름이 없는 것도 많다. 실은 이름 없는 것이 더 많고 일반적이다. 이 세상은 존재는 하되 ‘이름이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지나간 여름, ‘곤파스’란 이름의 태풍이 쓸고 지나간 동네 뒷산에는 한동안 쓰러지고 꺾어진 나무로 가득했었다. 꽤나 시일이 걸려서야 구청 사람들이 나와 전기톱으로 베고 썰어서 겨우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 죽어간 나무들은 내게 있어 이름이 없었기에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고 그다지 가슴이 쓰라리지도 않았다. 야간의 산책 시간에 많은 나무들이 죽었구나, 아까운 것들 하면서 약간 哀悼(애도)의 생각을 가졌던 것이 고작이다.
근년 간에 남쪽 나라 어디선가 큰 海溢(해일)이 일어 수만에서 수천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접하곤 하지만, 사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니 저런’ 하고 그 순간 어이없어 하는 것이 전부이다. 때로는 묘한 逆說(역설) 같은 것도 느낀다.
존재하는 사람도 많고 사물도 많지만 존재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내게는 더욱 값어치가 적어진다는 생각이 그렇다. 흔하면 싸지고 적어야 귀해진다더니 정말 그렇다.
세상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人權(인권)의 소중함을 열심히 떠들고 외치지만, 내가 그 주장에 동조하는 정도라는 것 역시 앞의 해일 소식을 들었을 때 ‘아니 저런’했던 것 정도이다.
물론 인권의 개념과 소중함에 대해 동조한다. 하지만 내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러니까 내 삶 속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人權(인권)이란 내게 있어 무거운 價値(가치)로 다가오는 實感(실감)이 없다.
오늘날 인터넷이나 신문 그리고 텔레비전을 통해 정보와 뉴스가 넘쳐나고 있고 나 역시 그런 흐름들을 그럭저럭 쫓아가고는 있지만 사실 그 뉴스와 정보라는 것들은 내 삶 속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사물의 일인 까닭에 사실 가상의 공간에서 가공된 것들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다시 말해 그냥 흘려보내는 대상들이다. 그저 심심풀이 삼아 듣거나 보는 용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때로는 살인마에 의해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는 보도를 접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그 억울함을 공감하고 가슴 아파하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 다른 사소한 일로 바쁘다 보면 그저 흘려보내기 일수이다.
이름이 있어도 내가 그 이름을 모르는 존재는 내 삶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세상은 아예 이름조차 없는 무수한 것들로 넘쳐난다.
그러니 내가 그 이름을 알고 있거나 때로는 내가 이름을 붙여준 존재들만이 내개 있어 실존하고 또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있기는 하다. 가령 내 삶 속에 사실은 없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주고 또 미디어들 사이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는 존재가 그것이다.
이명박이란 이름, 우리나라의 대통령인 까닭에 하루도 듣지 않는 날이 드물 정도의 사람이다. 하지만 내 삶속에 존재하는 사람은 아니다. 보도의 빈도가 워낙 높다보니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이름들이 적지 않다, 내 삶속에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존재들, 특히 연예나 스포츠 방면의 이름들, 장동건, 김태희, 이효리, 이대호, 박지성, 이청룡 등등 상당히 많다.
하지만 그들은 내 삶속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분명 존재는 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들은 내게 있어 ‘없는 존재’라 해도 되고 ‘가상의 존재’라 해도 된다.
그들은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상의 존재 같기도 하다. 가령, 저번 월드컵에서 이청룡이가 골을 넣던 그 순간 잠시 내게 실존하는 듯 했지만 다시 그 이후로는 애매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사람들은 왜 내개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상의 존재인 것도 같은 것일까? 그 이유를 많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내가 상대의 이름을 알고 있고 가끔 그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지만, 그 상대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애매해진다는 결론이다.
나는 ‘이명박’이란 사람의 이름을 알지만 이명박이란 사람은 내 이름을 불러줄 일이 없으니 내게 있어 그 사람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중간의 애매한 존재가 된다는 생각이다.
이름을 서로 불러줄 때에만 비로소 실감 있는 존재, 意味(의미)있는 존재가 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름 역시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김태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독자들에게 내 이름은 好好堂(호호당)이다. 또 내 아들에게 있어 내 이름은 ‘아버지’이다. 아버지라 해도 되는 것이 내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란 존재는 나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정리할 때가 되었다. 세상에는 이름이 없거나 내가 붙여주지 않은 까닭으로 존재하지만 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사물들이 대부분이다.
이어 이름을 가지고는 있지만 내가 그 이름을 모르고 불러줄 까닭도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사람들과 사물들 또한 허다하다.
그리고 내가 그 이름을 들어 알고는 있지만, 그가 내 이름을 부를 일이 없기에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애매한 사람들과 사물들이 또한 적지 않다.
내게 있어 실존하는 것은 내가 이름을 알고 있고 불러주며 상대 또한 내 이름을 알고 있고 불러주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내 삶속에 실존하고 있고 나와 함께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름이 없었지만 내가 그 이름을 지어주고 붙여준 존재들이 있다. 가령 우리 동네의 많은 길양이들은 내가 사랑해서 그 이름을 붙여주었으니 어떤 면에서 나의 一部(일부)이고 分身(분신)이기도 하다.
물론 그들도 내 이름을 부르지만 내 귀가 좋지 못해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한다. 그저 나를 만나면 ‘아옹’하는 소리를 내니 그들에게 있어 내 이름은 ‘아옹이’인 셈이다. 내 이름이 아옹이라 하니 좀 그렇지만 그들에게 있어 내 이름은 분명 그러하다.
잘 산다는 것은 이름을 불러주는 상대가 많고 그 상대 또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자가 많을 경우인 것 같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름이 없었어도 내가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는 특별한 대상이 많을 때 삶은 더 풍요해진다는 생각이다.
내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에게도 나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은 ‘그대 혹은 당신’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만은 ‘그대’ 혹은 ‘당신’은 대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이다.
그대도 이름붙이기 놀이를 많이 하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에게도 나무에게도 길양이에게도 그대의 관심을 끄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냥 있지만 말고 이름을 붙여보기 권한다. 삶이 풍요로워질 터이니.
사랑은 ‘이름을 부름’으로써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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