冬至(동지) 앞에서
2010.12.16 호호당의 김태규님
옛날 옛적에, 기후가 온화해질 무렵 씨를 뿌리면 그것이 다시 자라 그 수십 배 또는 수백 배의 열매를 가져다주는 신통방통한 기술을 우리 선조들은 알게 되었다. 우리들이 지금 農事(농사)라고 부르는 일이다.
농사를 시시하다 여기는 이 많지만, 그건 착각이다.
오늘날 자기자본이익률(ROE)이 15 % 정도면 초우량기업이라 할 수 있는데, 벼농사의 경우 투자하는 볍씨만을 자기자본이라 보면 이익률은 실로 엄청나다. 알곡 하나가 땅에 들어가 자라면 가을에 가서 그 수백 배로 돌려주니 그 이익률은 퍼센트로 환산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니 농사는 대단한 기술이고 사업인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처럼 대단한 농사가 하늘을 가로질러 다니는 불의 알, 열의 알인 ‘해’가 있기에 가능한 것임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농사는 해의 은택이었다.
동시에 우리 선조들은 모든 생명의 원천인 해가 더욱 왕성해지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시들해지기도 하니, 만일 저 해가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세상이 암흑천지, 빙한 지옥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걱정을 하면서 내심 두려워했다.
그 결과 우리 선조들은 해가 내뿜는 열기가 약해지고 해가 비치는 시간이 아주 짧아지면 해가 다시 예전처럼 왕성한 힘을 되찾을 수 있도록 祭祀(제사)를 올렸다.
거둔 곡식과 열매로 맛난 음식을 만들어 상에 차려놓고 무리 중에서 가장 연장자나 어진 사람을 대표로 뽑아 ‘해님’께서 왕성한 원기를 다시 찾으시라고 정성껏 축원을 드렸다.
주로 제사를 올리는 때는 추수가 끝나고 곡식을 창고에 갈무리한 때, 아니면 해님이 날로 시들해져서 자칫 돌아가실 것도 같아 걱정이 많이 될 때였다.
우리 옛 기록에 하늘의 해님을 우러르며 기쁘게 해드리고자 모두가 열심히 춤을 추던 제사를 舞天(무천)이라 하고, 해가 다시 살아남에 너무도 반가워서 북을 치며 해맞이를 나가던 것을 迎鼓(영고)라고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오니 모두 그런 행사들이다.
이처럼 해님은 소중하고 또 귀한 분이셨다.
그런데 이 소중하고 귀한 해님이 앓아누워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것 같은 걱정이 가장 많이 들던 때가 언제였을까? 다시 말해 우리 선조들이 해님의 병환을 지켜보며 잔뜩 조바심하던 때가 언제였을까?
그때가 바로 冬至(동지)이다.
우리 선조들은 세대를 통한 경험의 전승을 통해 해가 가장 짧아지는 동지가 지나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늘 조심하는 마음으로 해님에 대한 제사를 등한시하지 않았다.
오늘날에 이르러 동지가 되면 해가 가장 짧고 그로부터 다시 길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 되었고 따라서 그 누구도 해님의 쾌차를 기원하는 이는 전혀 없어 보인다.
해가 짧아지고 또 길어짐은 自動(자동), 오토마틱인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기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해님에 대한 기도라는 본질이 감춰졌을 뿐 우리들 모두 실은 해마다 동지 무렵이 되면 마음을 다해 여전히 기도를 올린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지만 실은 冬至(동지)에 해님의 부활이 그 배경에 놓인 근본 테마이다. 불교에서도 동지기도를 드린다. 모든 종교가 해님의 부활을 기원하고 축하하는 기도를 드린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세밑이 되면 한해를 돌이켜보며 새해에는 좋은 일이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한다. 모두 해님의 부활, 다시 말하면 스스로를 포함한 생명의 부활을 기원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누구나 할 것 없이 동지 또는 세밑 아니면 새해 벽두에 기도를 올리는 것은 당연히 까닭이 있다.
우리를 포함해서 모든 생명은 冬至(동지)로서 한 번 죽는 것이고 동지를 맞이하여 다시 復活(부활)하고 새 생명을 얻는 까닭이다.
해는 한해를 통해 길어졌다가 다시 짧아지기를 반복한다. 이 반복은 ‘영원한(eternal)’ 것이라 말해도 좋으리라.
(이 대목에서 태양이 몇 십억 년 뒤에 폭발한다는 천문학적 지식을 들먹인다면 그야말로 재수 없는 소리가 된다.)
해의 길어지고 짧아짐이 영원한 반복이라면 우리 생명도 실은 그러할 수 있으리라. 해마다 해와 함께 죽고 동지에 다시 거듭나는 삶이기 때문이다.
해의 길어짐과 짧아짐, 그 消長(소장)을 우리는 반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달리 표현하면 循環(순환)이라고 한다.
循環(순환)을 우리 조상들은 마침내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세상은 영원히 반복되고 또 순환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세상과 생명의 영원성을 알게 되고 또 믿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중요한 무엇이 좌절하거나 실패했다고 느낄 때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충동을 가진다. 그것도 아예 原點(원점)에서부터 전혀 새로운 출발을 해보고 싶어 한다.
그냥 잘못된 것을 손보거나 아니면 잘못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도 될 것을 아예 ‘클리어’하고 전혀 새롭게 출발해보고 싶어 한다.
냉정히 말하면 전혀 새 출발은 노력의 낭비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새 출발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런 마음이라 하겠으니 이는 우리의 속 깊은 곳에 순환의 관념이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환의 발견’은 인류가 걸어온 긴 路程(노정) 전체를 놓고 보아도 가장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은 기본적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순환적 구조임을 우리가 알기에 우리는 마음이 편하다.
시간이 그렇지 않고 흔히 말하는 바, ‘시간의 화살’이 되어 이쪽에서 날아와 저쪽으로 영원히 날아가 버린다면 그거야말로 우리는 그 영원한 저쪽의 未知(미지)가 두려울 것이다.
시간은 순환 구조를 가졌기에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未知(미지)에 대한 걱정이 없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시간의 순환’을 저버리고 ‘시간의 화살’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우리 모두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떠돌이로 전락했으며, ‘생경한 未來(미래)’의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괴로워하며 지내게 되었다.
폴 고갱의 그림, 그림보다도 그 제목으로 인해 더 유명해진 그림의 타이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 여전히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근원적 不安(불안)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이른바 서구적 進步(진보)의 관념과 近代性(근대성)은 우리에게 순환으로서의 시간을 망각하게 하고 화살로서의 시간을 안겨 주었다.
姓(성)이 중요하지 않고 각자의 고유한 이름이 더 중요해진 세상 역시 순환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화살로서의 시간에 우리가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전체로서의 생명을 버리고 낱개로서의 생명에 익숙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낱개로서의 생명은 전체로서의 생명에 비하면 한갓된 것이고 찰나에 불과한 것이니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한 반복과 영원한 생명을 亡失(망실)해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낱개가 되고 조각이 되어 영원한 불안 속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러니 ‘화살로서의 시간’은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부당한 폭력인 것이다.
이에 우리가 순환으로서의 시간을 되찾는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오지도 않고 또 어디로 갈 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 시간이 순환 구조이고 영원한 반복이었음을 우리가 다시 인식하게 되는 날, 우리는 모든 생명이 하나임을 알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그때야 비로소 영원한 安息(안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해님이 서글프고 어깻죽지가 늘어진 것처럼 보이는 날이 동지이다.
그러나 동지로부터 새로운 순환이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빛은 희망이어서 동지로부터 새 희망이 다시 움터오는 것이다.
동짓날 好好堂(호호당)은 제자들과 함께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으로 가서 헌 생명을 털어낼 것이고 다음 날 아침 동해로 떠오르는 해님의 새 빛을 받아 새 생명으로 부활해서 돌아올 것이다.
어디에서 온 것도 아니요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닌 것이니
2010.12.17 호호당의 김태규님
어제 글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제목의 고갱 그림에 대해 잠깐 얘기하면서 그 不安(불안)은 것은 우리가 시간이란 것을 ‘순환’이 아니라 ‘화살’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시간을 순환으로 받아들이느냐 화살로서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양상을 나타내게 된다. 아예 근본에서부터 달라지며, 더 나아가서 行(행)과 不幸(불행)이 여기에서 갈라진다고도 말할 수도 있다.
이 대목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행복인 만큼 중요하고도 심각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부터의 얘기를 잘 들어보시라.
어떤 순간이 우리의 눈앞에서 휙 하고 지나가버리는 것이라면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많이 서운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겨울밤에 따뜻한 자리를 만들어 마음 주고받는 사람들끼리 정겨운 술자리를 펼쳤다고 하자.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 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윽고 그 술자리는 罷(파)하게 될 것이다.
아쉬워서 시간을 더 잡아 밤새 술을 마시며 情談(정담)을 나눈다 해도 결국은 끝이 날 것이다. 그러면 못 다한 情(정)이 남아 다음에 또 술자리를 만들자고 청하고 또 수락하면서 헤어진다.
정다운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니 당연히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행복할 것이니.
여기서 다음에 또 술자리를 갖자고 요청하는 것은 ‘시간을 반복해보자’는 요청이다.
그러나 다음에 또 만나자는 저쪽의 요청에 대해 이쪽에서 ‘다음은 다음이지요’ 하면서 기약을 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또는 어느 한쪽은 몹시 서운한 마음이 들 것이다.
여기서 문득 詩句(시구)를 소개하고 싶어졌다. 먼 옛날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王維(왕유)는 千古(천고)에 전하는 시를 남겼으니 후반 두 구절을 옮겨보자.
勸君更進一杯酒 (권군경진일배주)
西出陽關無故人 (서출양관무고인)
‘그대에게 다시 술 한 잔을 권하노니, 서쪽으로 길을 떠나 陽關(양관)밖으로 나서면 아는 이도 없을 것이니’ 하는 시구절이다.
양관은 중국 서쪽 끝의 실크 로드에 있던 변경의 요새로서 거기를 나서면 그야말로 異域(이역)으로서 멀리 이란과 인도로 이어진다.
이에 왕유는 서역 만리 길을 떠나는 친구에게 술자리 송연을 베풀면서 이런 시를 남긴 것이다. 정든 친구에 대한 절절한 감정이 담겼기에 漢詩(한시)를 좀 읽어본 이로서 이 시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정든 친구가 이제 험한 길을 간다고 해서 마음이 이럴 정도이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송연 술자리라면 그 감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여기서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가 정든 친구가 아니라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情人(정인)이라면 그야말로 세상 캄캄해지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 간에 만나고 또 헤어지면서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다시 만날 수 있다는 期約(기약)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기약도 없이’ 처럼 유행가 가사에 흔히 등장하는 이 期約(기약)이란 단어는 ‘날을 정하는 약속’을 뜻한다.
기약도 기약 나름이다.
그냥 ‘다음에 우리 언제 시간이 되면 또 만나요’ 하는 것보다는 ‘다음에 꼭 만나요’가 좋고, 그보다는 ‘어느 날에 우리 꼭 만나요’가 훨씬 마음을 편하게 하는 약속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이라면 ‘기회를 봐서 만납시다’ 하는 것이고, 그보다 좀 더 친밀한 사이라면 ‘다음에 우리 꼭 만납시다’ 하는 것이며 열렬한 연인 사이라면 ‘가까운 날 무슨 요일에 우리 봐요’ 하고 헤어지는 법이다.
만남의 시간을 반복하는 것이 期約(기약)인 것이니 ‘좋은 시간’을 반복하자는 것이며 더 줄이면 ‘시간을 반복하고 시간을 재현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연인 사이에서 시간은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再現(재현)되는 것이니 이처럼 우리는 시간의 反復(반복)을 요망한다. 그래야만 행복할 수 있다.
반대로 기약이 없다면 유행가 가사처럼 ‘아무런 기약도 없다’면 우리는 슬퍼지고 불행해진다.
가고 오지 않는 시간이라면 우리는 불행해진다. 지금 비록 가더라도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이 있고 그 기약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면 힘들어도 우리는 기다릴 수 있다.
그리하여 다시 만나는 그날이 오면 ‘많이 보고팠다’고 하면서 서로의 정을 더욱 진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은 再現(재현)되어야 하고 反復(반복)되어야 하는 것이니 이를 두고 시간의 循環(순환)이라 하는 것이다.
시간이 쏜 화살처럼 날아와 눈앞을 스쳐 다시 저 멀리 사라져버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견딜 수가 없다. 고갱의 그림 제목,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처럼 근원적인 불안과 불행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된다.
또 시간이 화살이라면 그것은 붙들 수 없는 것이고, 지금 눈앞의 이 찰나와도 같은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시간은 어떻게 하든지 그저 찰나일 수밖에 없기에 모든 것을 다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때문이다. 지금이 마지막이고 순간순간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흔히 영화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연인들이 나누는 사랑 또는 섹스 장면을 보노라면 처절하고 또 지독하다. 한 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기 싫은 나머지 서로를 한없이 갈구한다. (이 대목에서 프랑스 영화 ‘연인’이 기억난다.)
그런 영화 장면에 물론 공감은 하지만, 우리가 실제 그렇게 살아선 불행한 것이니 그래선 아니 되는 것이다. 연인끼리 그런 영화를 함께 보면서 矜恤(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되는 것이지 실제 그래선 아니 된다.
우리는 내일 만나서 다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연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재현되고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살아야만 편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
시간은 재현되어야 한다. 재현되지 않고 반복되지 않는 시간을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러니 시간은 반복되어야 한다.
예전에 우리 선조들은 반복되는 시간을 살았다.
門前沃畓(문전옥답)이라는 말이 있다. 그다지 비옥하지 않아도 농부에게 있어 그 땅은 진정 沃畓(옥답)이었으니 왜냐면 반복되는 시간과 장소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봄이면 씨뿌리고 여름에 땀 흘려 가꾸면 가을에 수확으로 돌아오니 옥답이었다.
그 땅은 그 이전에 할아버지가 가꾸던 땅이었고 아버지가 또 가꾸었으며 지금은 자신이 가꾸고 있으며 다시 시간이 지나면 내 자식이 가꿀 땅이니 같은 땅에서 시간을 반복하고 재현했던 것이다.
그처럼 살다가 죽으면 뒷산 언덕 양지바른 곳, 조상들이 계시는 곳 곁에 가서 편히 쉴 수 있었으니 그건 죽어도 사실 죽는 게 아니었다. 조상들 곁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것을 두고 ‘돌아간다’고 했던 것이다.
‘돌아감’을 한자로 쓰면 回歸(회귀)가 된다. 회귀란 말 역시 그 속에 반복과 재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간은 돌아오는 것이며 반복되는 것이며 재현되는 것이다.
근대화, 그리고 급성장 급발전을 통해 우리는 都市(도시)에 살게 되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요 속에서 살고 있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시골 산골에 사는 청년을 보면서 미래가 없다 여기고 또 거기에 사는 청년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는 현실이다.
그런데 하나 물어보자, 도시에 사는 풍요로운 당신은 돌아갈 곳이 있는가를.
현대 문명은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안겨 주었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돌아갈 곳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우리들이 그토록 평생을 걸려 부동산 하나 장만하려고 드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는가?
그런대로 그 부동산이 돌아가 쉴 곳이라는 마음 하나 때문이다. 콘크리트 건물에 땅 지분이라곤 겨우 수 평 남짓에 불과한 그 아파트에 목숨을 거는 우리인 것이다.
그런 낌새를 차린 일부 사람들은 歸農(귀농)이란 것을 하지만, 시간을 화살로 받아들이는 현대 문명의 정신 사조 속에서 몸은 시골로 돌아가도 정신은 도시에 두고 있으니 귀농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온다. 많은 구실과 핑계를 대면서, 속으로는 그 또한 사뭇 못 마땅해 하면서도 도시로 돌아온다. 다시 도시로 돌아와서는 불행하게 살아간다.
근대성 그리고 현대 문명이 가진 근원적인 불안과 불행은 시간을 화살로 받아들였다는데 있다.
지금의 고루한 이 시간을 버리고 미래의 신나는 세계로 가버린 다음에 다시는 지금의 낡은 인습으로는 돌아오지 말자면서 출발했던 발걸음이었다. 그래서 그 힘찬 발걸음을 進步(진보)라고 불렀다.
서구의 근대성을 한 마디로 압축하는 단어가 그래서 進步(진보)이다.
進步(진보),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는 뜻이니 참 좋다, 아니 좋은 것 같다.
그러나 그 진보는 돌아옴, 회귀를 전제로 하지 않았을 때 멀리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반복도 재현도 없고 그저 이상한 곳에서 그리고 그 이상한 곳마저도 정 붙일 만하면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흘러가버려야 하는 까닭에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자들 때문이라고 그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자들도 생겨났다.
자본주의가 문제이고 시장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진보를 향한 발걸음이 시작된 다음 불가피한 선택이 자본주의였을 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문제는 자본주의나 시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라는 관념 자체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모두 進步(진보)라고 하는 같은 배에서 태어난 雙生兒(쌍생아)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다시 회귀해야 한다. 시간을 반복하고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더 불행해질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진 기술과 문명을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계속 앞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 하나, 시간을 화살이 아니라 순환으로서 받아들이기만 하면 현대문명의 근원적 불안은 놀라울 정도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하자는 자리가 아닌 까닭에 이 문제는 이 정도로 그치고, 다만 편안한 반복이 불안한 새것보다 더 좋다는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만 얘기해두고자 한다.
오늘날 모든 이가 고리타분하고 낡은 미신이라고 여기는 음양오행이란 사고의 틀을 지난 36 년 동안 혼자서 새롭게 연구하고 다듬어내고자 노력해온 것 역시 이런 까닭이다.
음양오행이란 사실 循環(순환)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간 봄에 벚꽃이 피었으니 明春(명춘)에도 당연히 그러리라는 기대가 있기에 분분히 지는 꽃을 보며 슬픈 한편으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 꽃이 다시 피어나지 않는다면 다시는 볼 수 없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차마 어찌 그 마지막 꽃의 져 내림을 감내할 수 있겠는가.
또 사랑하는 사람을 지금 보는 것이 마지막이라면 그 이별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반복되는 삶은 단조로운 삶이 아니다. 期約(기약)할 수 있는 삶이고 따라서 행복을 반복할 수 있는 삶이다.
한때 우리가 물질적으로 궁핍했을 때 궁핍의 반복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하고서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반복 그 자체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 시간의 반복과 재현, 순환이야말로 우리가 마음 편히 쉬면서 주어진 삶을 누리고 또 때가 되면 그 삶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다는 거, 비록 낱개로서의 나는 가더라도 그건 돌아가는 것이고 생명 그 자체는 영원히 반복된다는 거, 지금 나는 이런 것들을 길게 얘기하면서도 진정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그러지 못했을 것 같아 조바심하고 있다.
시간은 반복되고 재현되어야 하는 것이며 실제로 그런 것이다. 일러서 시간의 當爲(당위)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가 아니라, 원래 여기에 있었고 앞으로도 여기에 머물 것이다.
여기에 머물면서 보고픈 사람, 좋은 사람을 늘 만나며 살아야 행복할 것이니 말이다.
꽤나 긴 글 읽느라 수고 많이 하셨다.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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