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당의 철학 旅行(여행)
2010.11.21 호호당의 김태규님
30 대 시절 불교의 金剛經(금강경)을 읽으면서 삶의 무상함과 또 덧없음에 대해 깊이 탄식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녕코 진리라 한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생각했다. 그래서 욕망을 끊어내고자 했다.
금강경의 가르침이란 과연 무엇인가? 모든 것을 여섯 가지로 바라보라는 것이니 그 여섯 가지란 夢(몽), 幻(환), 露(로), 影(영), 泡(포), 電(전)이다.
삶을 포함하여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꿈속과 같이 보라는 것, 헛것처럼 보라는 것, 이슬처럼 그리고 일순 지나가는 번갯불처럼 볼 것이며 나아가서 물거품이나 그림자처럼 보라는 것이다.
삶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그런 것들이니 거기에 매달려 애태우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결국 욕망을 떠나서 보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고, 욕망의 헛됨을 직시하라는 얘기이다.
般若心經(반야심경)은 금강경에 비해 약간은 더 인간적이다. 즉 약간은 더 세속적이다.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재성이 없으니 우리가 제아무리 어떤 것을 꼭 움켜잡거나 붙들고 놓치지 않으려 해도 결국 손에 쥘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이다. 쥐려고 해도 쥐어지지가 않는다는 얘기이다.
집착하려는 네 마음 충분히 이해는 한다. 하지만 눈뜨고 가만히 잘 살펴보면 집착할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지 않느냐,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지혜로운 자들도 그런 것을 알아 마음 편하게 지내다 갔고 지금 가고 있으며 또 갈 것이라 한다.
어차피 그런 것이니 하면서 우리의 허한 마음을 달래고 위로하고 있다. 그런데 내 나이 40 이 넘도록 욕망이 사라지기는커녕 여전함을 느꼈다. 이건 아닌데, 이건 솔직함이 아닌데 하고 회의하던 중에 ‘힌두의 철학’과 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욕망을 끊어내려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다는 것을 느꼈다.
힌두철학과 불교의 가르침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간단히 말해야 하겠다. 힌두의 가르침 역시 이 세상 모든 것이 실재성이 없는 幻(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힌두의 가르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와는 다르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개체로서의 삶이 비록 한 번 왔다 가는 허무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존의 의무를 더욱 성실하게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렇듯이 세속적인 삶이 가져다주는 쾌락 역시 그것이 비록 덧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우리는 世俗(세속)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세속적인 것을 神聖(신성)한 義務(의무)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세속적인 삶이 하나의 幻(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눈앞의 게임에 몰두하라, 게임이 주는 즐거움을 기꺼이 받아들여라, 하지만 지금의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에 불과한 것이고 진짜는 아니다. 그 놀이는 이윽고 끝이 날 것이며 그러면 선수 퇴장의 때가 온다는 것을 잊지는 말기를, 이런 이야기이다.
여기서 좀 더 얘기하면 그렇다면 幻(환)에 지나지 않는 이 모든 게임을 연출하는 최종 지고의 게임메이커가 과연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고의 神(신)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힌두 철학은 답을 하지 않는다.
브라마와 비쉬누 그리고 시바라는 위대한 神(신)들이 있어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또 파괴하고를 永劫(영겁)의 시간 속에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위대한 신들마저도 생겨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 한다. 이처럼 힌두의 세계관은 시간적 공간적 스케일에 있어 너무나도 엄청나서 그저 不可思議(불가사의)할 정도라 하겠다.
그 神(신)들이 게임의 메이커로서 幻(환)을 연출하는 메이커로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상대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幻(환)이라고 얘기한 것, 최근 이와 유사한 개념을 선보인 것이 있으니 영화 ‘매트릭스’가 그것이다. 그러면 좀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여기서 幻(환)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보자. 이를 힌두 철학에서는 마야(maya)라고 한다. 마-야-라고 長母音(장모음)으로 발음해야 한다.
마야는 영어 단어 make 와 어원이 같다. 다시 말해 ‘만들다’는 뜻이다. 위대한 신들이 이 세상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며 때가 되면 파괴해버리고 다시 만들어낸다는 것이 ‘마야’이다.
그렇기에 마야는 造作(조작)이란 뜻을 가지게 되고 조작된 것이니 幻(환)으로서 달리 보면 詐欺(사기)라고도 할 수 있다.
세상 자체가 조작되어 임시로 만들어진 것이니 세상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만들어진 것이고 우리가 대하는 자연을 포함한 모든 것도 만들어진 것이니 실은 신들의 장난이고 놀이일 뿐이라는 것이 ‘마야’가 가진 뜻이다.
이 생각은 그대로 불교로 이어졌다. 金剛經(금강경)의 四句偈(사구게)가 그 대표적인 표현이다. 相(상), 즉 형태를 가진 모든 것들이 虛妄(허망)한 것이니 그 여러 相(상)들이 실은 임시방편에 불과함을 볼 수 있다면 그 즉시 여래를 볼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相(상)들이 마야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면 그로서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에서 벗어난 부처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불교의 가르침이란 모든 것들을 마야, 즉 幻(환)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불교적 표현으로 應無所住(응무소주), 즉 당연히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아 덧없는 삶의 시간들을 마음 편히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힌두의 가르침은 세상 모든 것,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이 ‘마야’, 幻(환)이고 장난질이고 造作(조작)인 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왕지사 주어진 삶과 그 시간들을 긍정적으로 보내라고 가르친다.
허무한 것인 줄 당연히 알아야 한다. 하지만 잠시 머물다 가는 삶이더라도 이왕이면 즐겁게 유쾌하게 살다 가라는 것이 主流(주류) 사조인 힌두 철학이라면, 허무한 것인 줄 알아서 내 쓸데없이 집착하지 않으리 하는 것이 불교 철학인 것이다.
힌두 철학은 대단히 세속적이다, 더 없이 세속적이다. 본질이 환이고 허무임을 알아도 그럴수록 더 적극적으로 세속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긍정적인 삶의 철학이 다시 있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나는 40 대 후반에 와서 삶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自號(자호)를 好好堂(호호당)이라 한 것 역시 어쩌면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 것도 같다.
재미있는 것은 젊은 시절 지어서 쓰던 호는 影波(영파)였다는 점이다. 이는 금강경의 여섯 가지 관법 중에 하나인 그림자 影(영)에다가 물거품 泡(포)를 바꾸어 물결 波(파)로 한 것이니 실은 금강경의 영향이다. 그러니 불교의 금강경에서 힌두의 베다(Veda) 철학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긍정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다. 욕망을 인정하고 욕망을 부리며 사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다만 문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욕망이 희석되고 묽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러다가 욕망을 끊어내기는커녕 아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황당한 시츄에이션!)
그런데 내 속에는 또 다른 여러 갈래의 가르침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음양오행을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운명과 自然(자연)의 循環(순환)에 대해 알게 되었고, 또 性理學(성리학)적인 배움들, 또 다른 갈래로서 노자의 道德經(도덕경)과 그 해설서인 淮南子(회남자)를 읽으면서 無爲(무위)에 대해 배울 수 있었으며 莊子(장자)를 통해 호쾌함을 배웠다.
그런가 하면 서양의 儒敎(유교)라 할 수 있는 스토아 철학자들, 秘敎(비교)라 할 수 있는 헤르메스 철학자들, 이어 신플라톤주의의 스승들로부터 마지막으로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이처럼 내 속에는 많은 가르침들로 한 때는 복잡한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내 나름으로 정리가 되어 편안해졌다.
나는 참 먼 길, 여러 갈래의 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걸어온 셈이다. 내 얼굴에 새겨진 많은 주름들과 발바닥의 굳은살이 그 여정을 증명하고 있다.
최근 들어 잠시 休校(휴교) 중이지만 그간 ‘고전강독’이란 이름으로 클라스를 해왔다. 이는 고리타분하고 어려운 漢文(한문)들을 가르치려는 목적이 아니다. 내가 여행하면서 듣고 보고 배웠던 동서양 先人(선인)들의 智慧(지혜)를 후배들에게 알려줌으로써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힌두인들이 말하는 삶의 바람직한 네 단계에 대해 얘기하면서 맺고자 한다.
인생을 八十(팔십)이라 한다면 그것을 네 단계로 나누라는 것이다.
20 까지는 성장하고 배우는 단계이고
40 까지는 돈과 권력 또는 그 무엇이든 열심히 성취하라는 것이다.
다시 60 까지는 욕망을 마음껏 부리고 누리며 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60부터 80 까지는 광야나 인적 드문 곳을 찾아가 홀로 명상에 들어가 우주와 세상에 대해 성찰하는 가운데 삶을 마감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참 좋은 권유가 아닌가 싶다. 이 네 단계를 가만히 음미해보면 그것은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의미하고 있다.
일생을 한해의 네 계절처럼 살다 가라는 것이니 이는 순환에 맞추어 살라는 것이고 老子(노자)가 말하는 無爲自然(무위자연)과도 같다.
읽어오느라 수고하셨다. 글속에 어려운 단어와 생소한 개념들이 제법 있었다. 스토아 철학, 헤르메스주의, 신플라톤주의 등 서양 고대 철학에 관한 생소한 어휘들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시간을 봐서 그들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 사실 그들을 이해하지 않고서 플라톤만 읽어서는 근대 철학의 드높은 봉우리인 칸트를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겨울이 시작되는 小雪(소설)이 내일이다. 겨울이면 사람은 성찰을 한다, 철학을 한다. 이 글도 그런 까닭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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