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型(원형)과 本質(본질)로서의 삶
2010.11.16 호호당의 김태규선생 글
한해를 24 개의 節氣(절기)로 나누고 그것이 循次(순차)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을 運(운)이라 한다. 運(운)이란 운동한다는 것이니 변화를 뜻한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것을 命(명)이라 한다. 유전적 성향과 기질이라 해도 좋겠다. 命(명)과 運(운)을 합쳐서 命運(명운)이라 하고 달리 運命(운명)이라 하기도 한다.
나는 평소 사람의 삶과 운명에 대해 얘기할 때 농부의 農事(농사)에 비유할 때가 많다. 21 세기 첨단의 시대에 농사에 비유해 설명을 하니 더러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 싶기도 할 것이다.
오늘날 농사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미미하다. 농사를 지어본 경험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러니 삶의 여러 일들과 운세의 변화를 농사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당연히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비유하는 데에는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다.
農事(농사)야말로 一生(일생)을 經營(경영)해감에 있어 가장 적합한 설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농사야말로 우리의 삶이 가진 原型(원형)과 本質(본질)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농사는 자연의 순환과 변화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事業(사업)이다. 간단히 말해서 겨울에 볍씨를 뿌리는 농부는 없다. 겨울 언 벌판에 볍씨를 뿌리면 당장 얼어 죽을 것이니 말이다.
물론 얼어 죽지 않게 하는 것도 가능은 하다.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고 얼어붙은 땅을 녹여서 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며 계속해서 기름을 마구 써가며 보일러를 가동하면 벼농사가 가능은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농사를 지어서는 도저히 타산이 맞지 않으니 그렇다. 따라서 농사는 자연에 순응하는 사업인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의 時代精神(시대정신)이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을 美德(미덕)으로 삼지 않으며 따라서 권장하지도 않는다.
서유럽이 神(신) 또는 絶對者(절대자)로부터 반발하고 나서면서 近代(근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近代化(근대화)의 정신이란 곧 抗拒(항거)와 抵抗(저항)의 정신이며 도전, 즉 첼린지, 영어로 challenge 하는 정신이다.
도전하는 정신은 곧 바로 또 하나의 절대자였던 자연을 정복, 즉 conquest 하는 자세로 나타났다. 자연은 극복의 대상인 것이지 자연 속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을 높게 사주던 정신은 곧 落後(낙후)와 같은 의미로 치부되었다.
결국 근대화란 절대적인 무엇을 상대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낮추려는 정신 자세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 하겠다. 사실 神(신)이란 개념 자체가 自然(자연)의 模寫(모사)인 것이고 자연에서 따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서구의 近代精神(근대정신)이란 反(반)자연의 그것이라 하겠다.
근 150 년간 서구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주름잡으면서, 우리 역시 모든 가치 기준을 그들의 것에 맞추고 있다. 강한 자를 모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으나 강한 자의 약점이나 문제점까지 흉내 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자연에 反(반)하고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조는 이미 많은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널리 알려진 말이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말이다. 지속가능한 삶도 아니고 성장이라니, 成長(성장)이란 개념이 몹시도 중요한가 보다, 성장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가 보다. 어쩐지 달려가지 않고는 그냥 제 자리에 서있을 수 없는 자전거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말 속에는 ‘자연과 타협해가면서 성장해보자’는 뜻이 담겨져 있으니 이제 어느 정도 자연의 소중함과 자연의 힘을 사람들이 재인식하기 시작했는가 보다.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목적지는 서구의 그런 ‘反(반)자연의 정신’으로부터 탈피하는데 있을 것이다. 자연과 같이 가면서 자연과 同化(동화)하는 삶이야말로 우리의 최종목적지라 할 것이다.
자연과 같이 간다고 해서 예전처럼 빈궁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기술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가치중립인 것이니 기술을 활용하되 자연과 동화하는 삶의 방식이 이제는 충분히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본질적 原型(원형)은 결국 농부로서의 삶인 것이니 우리는 농부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농부의 삶이란 봄이면 씨를 뿌리고 여름에 경영하여 가을이면 수확하고 겨울에는 휴식 또는 省察(성찰)하는 것이다.
또 농부의 삶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것으로 봄에 뿌린 씨앗이 결실이 되어 돌아오려면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도전하는 자세, 도전하는 삶을 나쁘다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도전과 저항, 정복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무언가가 결핍된 것이 있다는 얘기이다.
무엇이 결핍되었을까? 기다림이다. 기다린다는 것,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기다리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저는 무척 열심히 살거든요, 그런데 왜 나의 삶은 이리도 팍팍하기만 할까요? 이렇게 묻는 이가 많다. 그러면 답해준다, 열심히 살아가면서 기다려보시게나, 팍팍하지 않고 풍요롭고 윤택한 삶의 날들이 다가올 것이니 말일세.
봄에 농부가 씨앗을 뿌리면서 당장 결실을 얻겠다고 하면 웃기는 일이듯이 지금 열심히 산다고 당장 윤택한 삶을 기대한다면 또한 웃기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운명을 연구하고 관찰해오면서 느낀 바, 우리 삶에 있어 농사의 기간, 즉 씨뿌리는 봄부터 거두는 가을까지의 기간은 30 년이었다. 지금 그대가 씨를 뿌리고 있다면 거둘 때까지 30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고, 그냥 기다릴 일이 아니라 지극정성으로 가꾸고 관리해가야 제대로 된 삶의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나노(nano) 초의 시대, 기회를 선점하고자 分秒(분초)를 다툰다는 이 시대에 30 년이라고 하니 마치 永遠(영원)과도 같이 다가올 수도 있겠다.
자연과 같이 하는 삶은 결코 무소유의 삶도 아니며 자연 속에서 빈곤한 삶도 아니다. 이제 우리는 기술을 가졌으니 자연과 함께 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수고로운 삶’이자 동시에 ‘가장 풍요로운 삶’임을 알게 될 때가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수고한 자가 풍요를 가져가는 법이고, 기다릴 줄 아는 자가 가장 많은 것을 가져가는 법이다.
자연 속에서 생겨난 우리의 삶은 그 본질과 원형에 있어 여전히 하등의 변함이 없다. 그러니 농부의 농사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삶의 형태라 할 것이니 내가 많은 것들을 농사에 비유해 설명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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