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집값 하락땐 서민 가계도산 불보듯”
DTI 규제 한시완화… 최대 4억5천만원 대출가능
(위클리경향 / 박병률 / 2010-09-09)
2일부터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때 소득수준을 고려할 필요가 없게 됐다.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서울 강남·서초·송파 등 강남 3구를 제외하고 전국 어디에서나 집값의 50∼60%까지 대출을 받게 됐다. 내년 3월까지 한시라고는 하지만 연장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주택을 담보로 1억원까지 대출 받을 경우는 소득증빙 서류를 내지 않아도 되게 됐다. 이전에는 5000만원까지였다. 결과적으로 돈을 빌려 집 사기가 한층 쉽게 됐다.
▲ DTI를 해제하면 부동산시장은 살아날까? 정부가 부동산 거래 활성화 대책을 발표한 8월 29일 오후 부동산시장 활성화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듯 용산지역 주상복합아파트인 ‘용산 더 프라임’ 모델하우스가 수요자들로 북적대고 있다. |연합뉴스 |
정부는 지난달 29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실수요 주택거래 정상화와 서민 중산층 주거안정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일명 8·29대책으로 불리는 이날 발표에서 정부는 “무주택자 또는 1가구 1주택자가 투기지역을 제외한 곳에서 9억원 이하의 집을 살 경우 금융회사가 자율적으로 DTI 적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자율결정’이라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결국은 DTI를 폐지한다는 소리였다. 당초 DTI 규제를 유지하되 현행보다 5∼10%포인트 더 올릴 것이라는 관측을 넘어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금융위 제안에 국토부·재정부 합작
같은 시각 여의도 금융위원회에서 가진 백그라운 브리핑에서는 정은보 금융정책국장에게 DTI 폐지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전날까지 ‘DTI 규제는 은행 건전성 규제라 손댈 수 없다’던 금융위가 DTI 폐지까지 물러선 데 따른 의문이 증폭됐기 때문이다.
정 국장은 “정부 내에서 현재의 주택시장 안정기조는 바람직하다는 데 이견은 없었다”며 “다만 거래 위축이 심한 만큼 실수요자의 거래 불편에 대해서는 해소해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 이같은 조치를 내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국내 아파트 가격은 3%로 떨어졌지만 거래는 60%가 위축됐다”며 “이번 조치의 정책 타기팅은 최근 가격이 급락하고 거래가 위축된 분당·용인 등 수도권 외곽지역 6억원대 아파트”라고 밝혔다.
정부는 이번 대책에 대해 시종일관 ‘정상화’라는 표현을 썼다. 집값 상승 없이 거래만 늘린다는 것이다. 집값 부양 의미를 담은 ‘활성화’는 그래서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부의 두 마리 토끼론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집값이 오른다는 기대 없이 주택거래가 활성화된다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이번 조치는 고소득층보다는 중산·서민층들이 돈을 더 많이 빌릴 수 있도록 설계됐다. 9억원 이상 초고가 주택이 대상이 되거나 고소득층에게 추가대출의 길을 열어주면 투기가 일어나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정부는 중산·서민층에 대해 ‘혜택’을 줬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정부가 자산관리에 대한 정보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서민들을 대상으로 돈빌리기를 권했다는 비난도 만만찮다.
DTI 폐지는 금융당국 내에서도 깜짝 뉴스였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DTI 규제를 전면 해제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며 “금융당국으로서는 DTI는 금융기관 건전성을 유지하는 일종의 보루였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DTI 폐지는 청와대나 국토해양부, 한나라당이 밀어붙인 결과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첫 제안한 쪽은 금융위로 뒤늦게 밝혀졌다. 금융위 관계자는 “DTI 전면 폐지는 우리 쪽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라며 “이를 청와대와 국토부 등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당초 정부는 지난 7월 부동산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때도 DTI 규제 완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국토부와 재정부, 금융위가 접점을 찾지 못했다. 국토부는 금융규제가 거래 활성화를 막고 있다며 서울과 수도권에 적용되는 DTI 규제를 10∼20%포인트 높일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금융당국은 “보금자리 주택을 비롯, 주택 공급 과잉이 집값 하락의 원인”이라며 팽팽히 맞섰다. 청와대 경제금융점검회의, 경제장관회의를 거쳤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고, “현장 의견을 한번 더 수렴하자”며 발표를 한달간 미뤘다.
금융위는 이 과정에서 DTI 전면 해제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다만 단서조항은 있었다. 내년 3월까지 한시적으로, 강남 3구는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또 대상은 무주택자와 1가구 1주택자로 한정했다. 금융위의 또 다른 관계자는 “DTI 규제를 일률적으로 완화하면 효과도 적을 뿐더러 부동산경기 부양을 한다는 잘못된 신호를 시장에 줄 수 있었다”며 “해제폭은 넓지만 기간과 적용장소를 좁히면 원하는 정책목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설명했다.
금융보호막 폐지 가계 리스크 커져
DTI 전면 해제안에 청와대 등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한나라당도 지난달 28일 가진 당정협의에서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DTI 규제 완화를 줄기차게 밀어붙인 한나라당 고흥길 정책위 의장은 반색했다. 지역구인 성남시 분당을 위한 사실상의 맞춤식 조치였기 때문이다. 29일 발표는 그렇게 이뤄졌다.
▲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오른쪽)이 8월 29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완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
이날 발표를 주도한 것은 국토부였다. 부동산정책 총괄부서인 기획재정부와 DTI 규제 완화 주무부서인 금융위는 뒤로 한 발 빠졌다. 과거 주요 부동산정책을 재정부가 도맡아 발표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일각에서는 DTI 규제 완화가 불러올 부작용을 우려해 재정부와 금융위가 자리를 피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재정부 관계자는 “부동산 관련 내용이니 국토부가 앞서는 것이 맞지 않느냐”며 말끝을 흐렸다.
금융위가 DTI 전면 폐지라는 ‘역제안’을 한 것은 청와대와 한나라당, 국토부의 규제 완화 주장을 더 피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차라리 금융위가 주도할 수 있는 파격안을 꺼내 사안을 리드해 나가는 게 모양새로보나, 추후 정책 수립에 유리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는 것이다. 금융위 자체 시뮬레이션 결과 주택담보대출 중 집 구매용으로 60%가, 생활자금으로 40%가 쓰이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 중 부동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집 구매용 자금이다. 집 구매용 자금 중 절반이 돌면 집값 및 거래의 현상유지가 가능하고, 나머지 절반이 돌면 집값이 뛰거나 거래량이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설명이다. 금융당국은 이번 조치로 이 ‘절반’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언론들은 발표 직전인 28일까지도 ‘DTI 5∼10%포인트 상향조정 검토’라는 과천발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발표 2일 전인 27일께 금융위 핵심인사들은 DTI 전면 폐지 가능성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한 관계자는 “금융위가 일부러 연막을 친 것이 아니고 과천쪽에서 언론플레이가 나온 것 같다”며 “27일께에는 DTI가 폐지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솔직히 말하자면 발표 전날까지 모든 방안이 다 테이블에 올라 있었다”며 “당시 시점에서는 DTI 5∼10%포인트 검토 기사가 꼭 틀렸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부가 DTI 한시 폐지를 결정했지만 여론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부동산담보대출 증가를 주목하는 금융권은 물론 부동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왜 그럴까. 갚을 능력을 보고 돈을 빌려주는 DTI는 가계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으로, 담보가치를 보고 대출을 해주는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은 금융권을 보호하기 위한 격막으로 해석된다. 이번 조치는 어떻게 설명하든 가계 보호막을 치운 것이라는 지적이다.
DTI 폐지 전후의 대출액을 분석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같은 소득에서는 비싼 주택을 살수록, 같은 가격대 주택이라면 저소득일수록 대출을 더 받게 됐다.
20년 만기, 6% 대출금리를 조건으로 DTI 50%를 적용하는 경우를 감안해보자. 연봉 3000만원 소득자는 1억7000만원, 5000만원 소득자는 2억9000만원, 7000만원 소득자는 4억1000만원, 9000만원 소득자는 4억6000만원(추정치)까지 각각 빌릴 수 있다. 얼마 가격대의 주택을 사든 이 이상은 빌릴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DTI가 적용되지 않는다. 주택담보 가치에 비례해 대출을 해주는 LTV만 고려하면 된다. 5000만원 연봉자가 각기 다른 가격대의 아파트를 사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LTV는 50%로 가정한다. 5000만원 연봉자가 6억원짜리 집을 살 때 빌릴 수 있는 자금은 3억원이다. DTI가 적용되던 과거 2억9000만원과 비교하면 1000만원을 더 빌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연봉자가 7억원짜리 집을 산다면 어떨까. 집값의 절반인 3억5000만원까지 대출 받을 수 있다. DTI 기준(2억9000만원)보다 6000만원을 더 빌릴 수 있다는 말이다.
“중산층 빚으로 부동산 경기 부양”
그가 욕심을 내 8억원짜리 집을 사면 4억원을 대출 받을 수 있어 과거보다 1억1000만원을 더 은행권에서 빌릴 수 있다. 구입 상한선인 9억원짜리 집이라면 과거보다 1억6000만원이 늘어난 4억5000만원을 빌릴 수 있다. 값비싼 아파트를 살수록 받을 수 있는 대출총량도 늘어나게 된다.
대출자 소득별로 분석해보면 어떨까. 적용 상한선인 9억원짜리 아파트를 기준으로 해봤다. 9억원 아파트는 누구나 집값의 절반인 4억5000만원을 은행에서 빌릴 수 있다. DTI 규제에 따라 1억7000만원만 빌릴 수 있던 3000만원 소득자도, 2억9000만원까지 빌릴 수 있던 5000만원 소득자도 같은 규모의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3000만원 소득자는 과거보다 2억8000만원을, 5000만원 연봉자는 1억6000만원을 결과적으로 더 대출 받게 된다. 또 연소득 7000만원 연봉자는 기존보다 4000만원 더 빌릴 수 있다. 하지만 연봉이 9000만원을 넘으면 현행 추가대출을 받을 수 없다.
연봉 9000만원 소득자의 DTI 대출한도는 4억6000만원으로 이미 9억원 주택에 대한 LTV 한도(4억5000만원)를 넘긴 상태였다. 기존에도 4억5000만원, 이번에도 4억5000만원밖에 못빌린다. 같은 가격 아파트라면 소득이 낮은 사람일수록 돈을 더 빌릴 수 있었다.
돈을 빌릴 때는 좋지만 못 갚으면 그대로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가 증명한 사실이다. DTI 폐지에 대해 ‘약탈적 대출’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동국대 강경훈 교수는 “아직까지 집을 못산 사람은 중산·서민층이 많을텐데 사실상 이들에게 집을 사라고 정부가 권하는 꼴”이라면서 “어떤 측면에서 보면 떨어지는 집값을 중산·서민층의 빚으로 부양하겠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고 말했다.
고려대 이필상 교수도 “그나마 집값이 오르면 다행이지만 집값이 떨어지면 중산·서민층은 이자도 갚을 수 없을 수준의 빚더미에 앉게 된다”며 “고소득층은 처분할 자산이라도 많지만 저소득층은 집이 유일한 실물·투자 자산이라서 집값이 하락하면 견딜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DTI를 해제하면 부동산시장은 살아나게 될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가 없이는 돈을 끌어들여 집을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돈 없어 집을 못사는 것이 아니라 집값이 오를 기미가 없어서 안사는 것”이라며 “별다른 정책효과는 없이 정부의 주택정책에 대한 불확실성만 시장에 던져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번 조치 이후 강남권과 버블세븐 지역에서 급매물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린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보름 이상은 지나봐야 성패를 알 수 있을 것으로 조심스레 내다보고 있다. 실제 지난 2005년 부동산 버블 당시에도 고강도 규제책이 쏟아져나왔지만 발표 때만 반짝 했을 뿐 일주일이면 어느새 부동산 가격은 오르고 있었다.
금융당국 일각에서는 DTI 규제 한시적 폐지에도 불구하고 주택시장이 ‘정상화’되지 않으면 또 다른 부작용이 생길 수 있음을 걱정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DTI 규제를 완전히 무력화시켰음에도 계속 집값이 떨어지면 실망심리가 본격적으로 커져 투매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며 “집값 하락을 막기 위해 취한 조치가 되레 폭락의 진원지 역할을 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 :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009081518281&code=114
박병률 기자 / 경향신문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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