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022. 11. 14
지식의 근본은 인과율이다. 인과율은 자극과 반응의 대칭성이다. 대칭은 축이 있다. 모든 대칭되는 것은 가운데 중심이 있다. 왼발과 오른발 사이에는 몸통이 있다.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에는 적도가 있다. 인류가 놓친 부분이다.
원인은 변화를 거쳐서 결과가 된다. 원인=결과가 아니라 원인=변화=결과다. 원인=변화=결과이므로 원인과 변화의 관계를 통해서 결과를 알아내고 반대로 변화와 결과의 관계를 통해서 원인을 알아내는 3단논법이 성립한다. 원인은 변화한다. 변화는 결과한다. 고로 원인은 결과한다. 모든 사유를 이 원칙에 맞추어야 한다.
2단 사고 - 원인 > 결과
3단 사고 - 원인 > 변화 > 결과
원인에서 곧장 결과로 가는 이단사고를 버리고 변화를 거쳐서 가는 삼단사고로 바꿔야 한다. 대부분 이단사고를 한다. 결과를 놓고 원인을 찍는 넘겨짚기를 한다. 이분법적 사고가 되고 이항대립적 사고가 된다. 획일적 사고, 틀에 박힌 흑백논리가 된다. 뻔한 이야기 밖에 못한다. 창의는 삼단사고로 가능하다.
프로와 아마가 다르듯이,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다르듯이 지식인은 일반인과 생각하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변화가 있고 그 변화가 동일할 때 그것은 구조다. 구조는 같은 변화를 반복시켜 같은 결과를 재현한다. 변화 속에서 구조를 추출하여 결과를 재현하는 것이 과학이다.
존재 속에 감추어진 변화의 메커니즘을 해명해야 한다. 존재는 곧 상호작용이고 상호작용은 곧 사건이다. 사건 속에 감추어진 의사결정구조를 해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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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Cogito. 그러므로ergo 존재한다sum.'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존재야말로 진리라는 이름의 퍼즐맞추기에서 첫 번째 퍼즐조각이다. 모든 이야기는 존재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왜 존재학은 없는 것일까? 인류는 아직 멀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논증이 유명하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코기토 논증도 검색하면 나오는데 이게 데카르트에 앞서 천년 묵은 생각임을 알 수 있다.
진리를 구하는 자는 엄격한 표현을 써야 한다. 우주의 근본은 상호작용이다. '나는 상호작용한다.'로 시작되어야 한다. 존재는 곧 상호작용의 존재다. 에너지는 상호작용하는 계다. 힘은 상호작용 형태의 변화다. 모든 것은 상호작용으로부터 시작된다.
동전의 앞면을 본 사람은 그 동전에 뒷면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백 퍼센트 절대적 확신이 든다. 추호의 의심도 없다. 앞면만으로는 동전의 존재가 불성립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완결되어야 하며 그러려면 뒷면이 있어야 한다. 생각한다는 동사다. 동사만으로는 문장이 안 된다. 명사가 있어야 한다. 존재가 명사다.
우리는 세상을 대칭적으로 이해한다. 사유는 대칭의 퍼즐 맞추기다. 존재는 곧 대칭이다. 그러나 변화는 비대칭이다. 주어와 목적어는 대칭이지만 동사는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동사는 둘을 연결한다. 연결되는 대상은 둘이지만 연결자는 하나다. 세상은 연결과 단절이다. 구조는 연결되는 둘과 연결하는 하나다. 두 바퀴 사이에 하나의 바퀴축을 끼운 것이 구조다.
우리는 연결되는 둘의 대칭을 알지만 연결하는 하나의 비대칭을 모른다. 인류가 이항대립적 사고, 이원론의 오류, 흑백논리 이분법의 수렁에 빠져버린 이유다.
앞면과 뒷면은 대칭이다. 존재는 완전하며 완전한 것은 전체이며 앞면과 뒷면은 부분이다. 지식을 구함은 대칭을 근거로 부분에서 출발하여 전체를 찾아가는 것이다.
부분은 나다. 나는 주체다. 주체와 객체는 대칭이다. 주체와 객체를 합치면 완전체다. 그것은 상호작용이다. 존재는 곧 상호작용이다. 우리가 아는 존재는 주체가 객체를 보는 것이다. 이는 주관의 오류다. 인간의 관점을 배제하고 객관으로 봐야 한다. 객체가 객체를 봐야 한다. 객체 내부에 숨은 자체 상호작용이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단사고에서 삼단사고로의 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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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있으면 볼 수 없다. 본다는 것은 변화를 보는 것이다. 내가 가만 있어도 볼 수 없고 상대가 가만 있어도 볼 수 없다. 나는 자극하고 상대는 반응한다. 그것은 움직임이다. 내가 움직여서 상대의 움직임을 끌어낸다. 그것이 보는 것이다.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은 객체를 본다. 주체가 자극해서 반응이 있으면 거기에 무엇이 객체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객체가 인간의 자극에 반응하려면 객체 내부에도 그러한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 무가 무인 이유는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문명의 토대는 과학이고, 과학의 토대는 수학이고, 수학의 토대는 인과율이고, 인과율의 토대는 상호작용이다. 인류문명의 기초가 부실하다. 모든 것은 상호작용에서 시작되는데 인간은 그 부분을 탐구하지 않았다.
주체인 인간과 객체인 존재의 상호작용을 통해 객체 내부의 상호작용을 포착할 수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내부에 상호작용을 감추고 있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이 자극해도 반응하지 않는다. 인간과 존재 사이에 A=B, B=C, 고로 A=C를 성립시킨다.
상호작용의 의미는 존재 내부에 변화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존재가 외부의 작용에 의해 2차적으로 변화하는게 아니라 원래부터 내포되어 있는 변화가 밸런스의 틀에 가두어져서 외견상 변하지 않는 안정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존재다. 존재는 두 변화의 나란함이다. 텅 빈 우주공간에 나란히 가는 두 대의 로켓이 있다면 둘은 서로의 변화를 인지할 수 없다.
내부적인 모순에 의해 변화를 가두는 틀이 깨졌을 때를 가정한 개념이 에너지다. 틀이 깨지는 작용은 힘이다. 그 결과는 운동이다. 틀은 균형이다. 존재는 상호작용이며 상호작용은 밸런스가 있으며 내부 밸런스가 무너지면 새로운 밸런스를 찾아낸다. 그 변화의 절차가 에너지와 힘과 운동이다.
힘은 상호작용의 디자인이다. 힘은 계 내부의 밸런스를 조절하여 상호작용의 형태를 바꾼다. 에너지가 진행하는 경로를 바꾼다. 힘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상호작용형태의 변화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단계를 거친다. 이는 존재의 다섯 가지 모습이다. 이 중에서 입자만 혹은 힘만 혹은 운동만 설명한다는 것은 불능이다. 힘은 아는데 운동은 모른다는 식은 성립될 수 없다. 로미오는 아는데 줄리엣은 모를 수 없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전체과정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사람은 없다.
물리학의 에너지는 때로 질이 되고 입자가 되고 힘이 된다. 전혀 다른 형태의 밸런스를 에너지 하나로 얼버무리는 것이다. 질은 안밖의 밸런스, 입자는 중심과 주변의 밸런스, 힘은 코어의 움직임에 대한 진행방향과 역방향의 밸런스다. 밸런스 형태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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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작용의 의미는 존재 내부에 변화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존재가 외부의 작용에 의해 2차적으로 변화하는게 아니라 원래부터 내포되어 있는 변화가 밸런스의 틀에 가두어져서 외견상 변하지 않는 안정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존재다. 존재는 두 변화의 나란함이다. 텅 빈 우주공간에 나란히 가는 두 대의 로켓이 있다면 둘은 서로의 변화를 인지할 수 없다.
내부적인 모순에 의해 변화를 가두는 틀이 깨졌을 때를 가정한 개념이 에너지다. 틀이 깨지는 작용은 힘이다. 그 결과는 운동이다. 틀은 균형이다. 존재는 상호작용이며 상호작용은 밸런스가 있으며 내부 밸런스가 무너지면 새로운 밸런스를 찾아낸다. 그 변화의 절차가 에너지와 힘과 운동이다.
인류는 안과 밖의 밸런스를 모른다. 닫힌계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천칭저울의 두 접시가 밸런스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지구와 밸런스를 이루는 사실은 모른다. 두 팀의 밸런스는 아는데 주최측이 관중과 밸런스를 이룬다는 사실을 모른다. 관중이 찾지 않으면 주최측은 룰을 바꾼다. 공인구 규정을 바꾸고 도핑테스트를 강화한다.
삼단사고를 훈련해야 한다. 2를 1로 해석하기다. 주어와 목적어가 하나의 동사로 연결된다. 주어와 목적어 2가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변화가 있으며 그 변화의 시작점이 주어, 도착점이 목적어다. 2를 품은 1, 이원을 품은 일원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원을 품은 일원은 상호작용이다. 세상은 상호작용이다. 그것은 밝음과 어둠을 동시에 품은 빛이다. 선과 악을 품은 사회화를 이해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를 품은 하나의 문명을 이해해야 한다. 탄생과 죽음을 품은 삶을 이해해야 한다. 대칭되는 2가 화살표의 머리와 꼬리임을 이해해야 한다.
힘은 상호작용의 디자인이다. 힘은 계 내부의 밸런스를 조절하여 상호작용의 형태를 바꾼다. 에너지가 진행하는 경로를 바꾼다. 힘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입자와 운동은 그 힘이라는 화살의 머리와 꼬리다.
상호작용형태의 변화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단계를 거친다. 이는 존재의 다섯 가지 모습이다. 이 중에서 입자만 혹은 힘만 혹은 운동만 설명한다는 것은 불능이다. 힘은 아는데 운동은 모른다는 식은 성립될 수 없다. 로미오는 아는데 줄리엣은 모를 수 없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전체과정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사람은 없다.
에너지는 때로 질이 되고 혹은 입자가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한다. 전혀 다른 형태의 밸런스를 에너지 하나로 얼버무리는 것이다. 질은 안밖의 밸런스, 입자는 중심과 주변의 밸런스, 힘은 코어의 움직임에 대한 진행방향과 역방향의 밸런스다. 밸런스의 형태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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