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즐기기가 아까워서
지나간 겨울 동안 꽤나 많은 사색에 빠져 지냈다. 불교의 대승오온론을 중심으로 해서 연구하는 것 그리고 조선 시대의 여러 임금들과 주요 인물들, 근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사주를 통해 알아보고 연구해보았다.
참으로 흥미로웠다. 혼자만 즐기기가 약간은 미안해서 일단 동영상으로 이성계의 운세 순환에 대해 간략하게 올렸다. 그런데 너무 간략해서 글로 좀 더 보충해본다. 앞으로도 조선사의 흥미로운 대목들, 관련 인물들과 그들의 운명순환을 소재로 해서 간간히 동영상이나 글로 소개해볼 생각이다. 기존 역사학자들의 시각과는 제법 다른 측면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운명순환 얼개
태조 이성계는 1335년 11월 4일에 출생했다. (앞으로 나오는 모든 연도와 일자는 현재 우리가 쓰는 양력, 즉 그레고리력으로 표시한다.) 생시를 모르지만 프로필이 있으니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乙亥(을해)년 丙戌(병술)월 己未(기미)일이다. 생시를 모르니 이렇다 하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武人(무인)이라기보다는 강한 책임감과 더불어 스스로에겐 엄하고 주변에겐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성격임을 능히 짐작케 한다. 용모 또한 상당히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73년간의 생애에 있어 운세 순환을 보면 네 살인 1339년 己卯(기묘)년이 立春(입춘) 바닥이었고 34세인 1369 己酉(기유)년이 運氣(운기)의 절정인 立秋(입추)였으며 또 다시 64세인 1399 己卯(기묘)년에 이르러 立春(입춘) 바닥을 맞이했다.
이성계는 고려에 투항하면서 운이 트였으니
이성계의 집안은 고려 동북쪽의 쌍성총관부, 즉 몽골 제국의 강역이었던 곳, 오늘날 함경도와 두만강 일대의 부족을 다스리던 부족장인 戶戶長(천호장)을 세습해온 지배계층으로서 오늘날 북한 함흥의 남쪽에 살았다.
부친 이자춘이 선녀가 나타나는 태몽을 꾸고 나서 이성계를 낳았다는 얘기, 이성계 또한 어릴 때 꿈속에서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주었다는 설 등은 믿거나 말거나이고, 분명한 것은 이성계가 대단한 활의 名手(명수)이자 擊毬(격구), 오늘날 폴로(polo)와 같은 스포츠의 달인이었다는 점이다.
이성계가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온 것은 고려 공민왕이 몽골의 땅인 쌍성총관부를 공략할 때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에 투항하면서였다.
이때가 1356 丙申(병신)년이었으니 참으로 흥미롭고 신기하다. 이 해는 이성계의 운세 순환에 있어 立夏(입하)인 1354년으로부터 2년 뒤인 小滿(소만)의 운이었다.
小滿(소만), 한 해로 칠 것 같으면 5월 20일 경이고 이 무렵이면 새싹이 땅을 뚫고 올라와 파란 잎을 매달고 위를 향해 뻗어간다. (60년 운세 순환에 있어 소만부터 소설까지의 30년간이 좋은 운이라 하겠고 나머지는 힘들거나 성찰의 기간이 된다.)
따라서 이성계란 새싹은 고려 사람이 되면서 펼쳐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36년이 흘러 1992년에 고려를 폐하고 조선을 세웠으니 더욱 신기하다. 모든 사물은 시작으로부터 36년이 흐르면 그 변화의 결말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성계는 고려에 투항한 지 36년 만에 조선을 개국했다.
하지만 공민왕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16세 弱冠(약관)의 청년 이성계를 받아들인 것이 훗날 그렇게 되리라고 말이다.
夏至(하지)에 이르러 두각을 드러낸 이성계
아무튼 이성계는 1361 辛丑(신축)년에 부친 이자춘이 죽게 되자 그 자리를 이어서 동북지방을 담당하는 萬戶長(만호장)이자 장군이 되었는데 당시 운은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성장을 거듭해가는 夏至(하지)였다.
60년 순환에 있어 하지의 때에 어떤 일을 시작하면 훗날의 성공은 기정사실이다. 왜냐면 하지는 한 해를 통틀어 해가 가장 긴 때, 그렇기에 어떤 사람이 이 때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서 자신의 장래에 대해 정확하게 멀리 내다보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난 일은 스스로는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다는 점이다. 나 호호당이 얘기해주면 반신반의한다. 우리 내기할까? 난 자신 있는데 자네는 뭘 걸겠나? 하고 농을 한다.)
이성계는 동북 지방과 만주 일대에서 성장했기에 말을 잘 탔으며 휘하 장병들도 騎射(기사), 말을 탄 채 활을 쏘는 전법에 대단히 능했다. 이에 이성계는 그 이후 연전연승 지속적으로 큰 공을 세웠고 지위는 날로 상승했다.
화려한 寒露(한로)의 운에 이르러 名振天下(명진천하)하다
북쪽의 여진과 몽골, 바다로부터 들어온 왜구들과의 전투에서 패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1380 庚申(경신)년의 황산대첩을 통해 왜구를 대거 소탕함으로써 그의 威名(위명)은 고려 전체를 진동시켰던 바, 이는 가장 화려한 시기인 寒露(한로)의 운이었다. 10월 초순의 날씨를 생각해보라, 오곡이 무르익고 나들이하기 좋은 호시절이 아닌가!
이성계의 명성이 높아지고 권력이 커가자 당시 새로운 사조로 부상하던 성리학적 이상을 구현해보려는 신진계층들이 대거 그를 따르기 시작했고, 이성계 또한 고려 내에서 기반이 없던 관계로 그들과 손을 잡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결국 이성계로 하여금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열도록 설득한 이는 정몽주를 통해 만나게 된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그냥 고려왕조의 기둥이자 공신으로 남았을 것이라 본다.
(정도전과 이성계와의 관계, 정몽주와 이방원 등등의 일은 실로 자연순환운명학의 관점에서 봐도 흥미로운 얘깃거리이기에 나중에 별도의 글을 마련하고자 한다. 먼저 나 호호당의 생각을 말한다면 조선 개국에 있어 주된 인물은 당연히 이성계로서 50%, 정도전과 이방원에게 각각 25%씩 주고 싶다.)
위하도 회군, 이성계 개인으로선 비극의 시작
그러다가 결국 이성계는 1388 戊辰(무진)년에 이르러 明(명)제국을 정벌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어기고 군대를 되돌리는 대규모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결과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고 결국 건국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말이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운세 순환에 있어 본격 겨울이 시작되는 大雪(대설) 직전의 일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제 이성계 개인의 운은 바야흐로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4년 뒤인 1392 壬申(임신)년에 건국을 하고 왕위에 올랐을 때 이성계의 운은 冬至(동지)였으니 이제 모든 운이 다 막히고 끝나는 때였다.
그렇기에 나 호호당은 위화도 회군에서부터 건국을 하고 왕위에 오른 것 자체가 이성계 본인만을 놓고 냉정하게 따진다면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대실수이자 비극의 序幕(서막)이라 여긴다.
사람들은 건국을 하고 왕위에까지 올랐으니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다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면 왜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나 호호당이 보는지에 대해 얘기를 해본다.
얼마나 미안하고 괴로웠을까나!
가장 최우선적으로 막역하게 지내던 정몽주를 죽여야 했고 오래 전부터 이성계를 지원하고 지지해주던 최영이란 인물을 처단해야 했다는 점부터 그렇다. 아울러 자신의 심복이던 정도전마저 칼날에 쓰러졌다. 나아가서 왕좌에 오르는 바람에 아들들 간에 죽이고 죽는 피바람이 불었다. 그 과정에서 졸지에 허수아비 왕이 된 이성계 개인으로선 그저 망연자실했을 뿐 무슨 좋은 일이겠는가!
1392년 조선을 건국하면서 본인의 이름도 새롭게 旦(단)이라고 바꾸었던 이성계였다. 旦(단)이 무엇인가? 새 아침, 즉 조선이란 새 나라의 아침을 열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불과 6년 만에 허수아비 군주로 전락해버린 이성계였다.
다시 강조하는 바, 조선을 건국한 1392년 壬申(임신)년은 이성계에게 있어 새롭게 일을 도모하면 후회하게 될 冬至(동지)의 운이었던 탓이다. 이어 1399 己卯(기묘)년은 60년 운세순환에 있어 입춘 바닥이었다. 스트로크로 쓰러진 뒤 고생만 하다가 함흥차사란 전설만 남기고 1408년 역사의 무대에서 쓸쓸하게 퇴장했던 이성계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성계의 운세순환에 있어 최전성기는 위화도 회군 직전까지의 세월, 즉 추분인 1377년부터 소설 직전인 1387년까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남 보기엔 좋은 일 같아도 정작 본인에겐 오히려 슬픔과 상처만 안겨주는 일이 세상에는 허다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