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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질지향에서 도구지향으로

◆의사결정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22. 4. 2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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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지향에서 도구지향으로

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022. 04. 23

 

 

인간은 도무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방법을 모른다. 대신 외부자극에 반응한다. 서구가 먼저 발전한 것은 그들에게 더 많은 외부자극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백인이 인종적으로 우월한 것이 아니고 지정학적 운이 좋았다. 그들이 목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그냥 보면 안다. 딱 보면 보이잖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은 바로 알 수 있다. 바다를 처음 봤을 때 가슴이 쿵 하는 거다. 꼬맹이 시절 남산에 올랐을때 뭔가 이상했다. 그 느낌을 잊지 못한다. 가슴에 콱 박혀 버렸다.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 마음이 편해질때까지, 목에 걸린 가시가 내려갈때까지 사유를 밀어붙인다. 나만 그런가? 인간들은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 벌거숭이 임금님과 같다. 권위에 굴종한다. 남들이 가만있으니 자신도 가만 있는다. 내가 느낀 것을 남도 느낄텐데.

    벌거숭이를 보고도 침묵하는 군중들처럼 기성질서의 권위에 굴종하므로 뭔가 느낀게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철지난 시절의 종교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윤석열이 당선되는 이유도 같은 것이다.

    1차대전의 참호전은 인류의 악몽이었다. 누가 내게 물어오면 3일 안에 30가지 해결방법을 알려주겠다. 참호는 낮다. 높이공격을 하면 된다. 호스로 석유를 쏟아붓고 참호를 불태우면 된다.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파훼법이 찾아진다. 그런데도 시도한 흔적이 없다. 

    왜일까? 늙은 장군들이 도무지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2차대전의 롬멜과 패튼, 주코프는 그나마 생각을 좀 했는데 말이다. 라이플의 등장 이후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남북전쟁과 보어전쟁에서 확인되었다. 그런데도 인간의 태도는 달라진 것이 없다.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유다. 문제는 낡은 생각이 아직까지도 안 변했다는 거다. 푸틴이 침략을 감행한 이유다. 치명적인 것은 우크라이나의 선전을 보고도 정신력이 어떻고 하며 오판을 하고 있다는 거다. 김성근이냐? 하여간 인간이란 동물은 답이 없는 종자다.

    공격은 무조건 진다는 사실이 무수히 확인되었는데도 인류는 혹시나 하고 로또긁기 삽질을 반복한다. 예컨대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 이런건 의미없다. 무조건 공격이 진다. 상대편에 내분이 일어난다든가 하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요새화된 상태에서는 그렇다.

    상대 실수에 편승하여 국지전에서 운으로 이기는 수도 있지만 그 경우 상대가 승복하지 않고, 승복하지 않으면 총력전으로 전쟁이 커지고, 그 경우 결국 공격이 진다. 최종적으로 물리학이 답을 낸다. 하나의 질서가 붕괴하고 새로운 질서로 옮겨가서 끝나는 것이다.

    전쟁이 전쟁으로 끝이 나는게 아니고 새로운 질서로 끝이 나기 때문에 공격측이 진다. 공격이 져야 새 질서가 수립된다. 남북한이 총알로 승부를 낸 것이 아니고 동서진영의 냉전에 따른 힘의 균형으로 승부를 낸 것과 같다. 간단한 사실인데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머리가 나쁜게 아니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물리적 상호작용의 결과다. 인간은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동물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누가 때려줘야 똑똑해진다. 일본처럼 고립된 나라들은? 

    외부에 때려줄 누군가가 없으면 멍청해진다. 과거에는 미국의 흑선이 동경만에 침입하여 일본을 매우 때려줬는데 말이다. 조선도 외부에 때려주는 나라가 없어서 개혁의 계기를 잡지 못했다. 이번에 윤석열 일당이 때려줬기 때문에 그나마 검찰개혁이 이루어졌다.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적이 생각을 못하도록 방해하면 된다. 양면전쟁을 유도하고 혼란을 조성하여 적의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재명을 비난하는 가짜문빠들이 반역자 윤석열을 위해 배후에 제 2 전선을 만들어준 것이 크다. 배신자가 배신자를 키웠다.

    본질주의냐 도구주의냐다. 인간의 본질은 지능이다. 사실이지 지능은 큰 의미가 없다. 두뇌는 장식이고 어차피 사피엔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인간은 손발과 치아를 비롯하여 많은 도구를 사용한다. 언어와 손짓발짓과 표정이 있다. 원숭이들도 손을 쓰지만 약하다.

    두 발로 직립해야 손으로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 손질밧짓을 혀짓과 턱짓으로 흉내낸 것이 언어다. 인간의 눈이 칼라를 보는 점도 각별하다. 고양이만 해도 냥펀치 소나기로 이빨만 쓰는 개를 쉽게 공략한다. 지능은 본질이고 도구는 관계다. 지능은 불변요소다.

    관계는 변한다. 한국은 아시아의 변방이었지만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도구를 장악한 셈이다. 지능은 고정이지만 도구는 변한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 머리가 좋은 사람보다 성격이 예민한 사람이 더 많은 성과를 이루곤 한다. 도구가 더 날카로운 것이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는둥 하며 말도 안 되는 초딩 교과서 개소리에 나는 아직도 분개해 있다. 남들은 덤덤한 것이었다. 한때 공감툰이 유행했는데 나 혼자 분개해 있고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더라. 우째 이런 일이. 그게 그냥 넘어가도 좋은 거짓말이란 말이던가? 

    어른들이 애들한테 그래도 되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환경이다. 상호작용의 차이, 자극과 반응의 차이, 도구의 차이, 관계의 차이, 매개의 차이다. 이는 해결된다는 점이 다르다. 타고난 본질은 어쩔 수 없지만 도구는 차지하면 된다. 해결책이 다 있다.

    인터넷을 빨리하고, 스마트를 먼저하고, 신대륙을 선점하면 된다. 우리는 본질지향적 태도를 버리고 매개지향적 태도로 갈아타야 한다. 본질로 보면 필연적으로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로 흘러가게 된다. 각종 혐오와 차별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플라톤과 칸트와 마르크스가 본질에 대한 터무니 없는 환상을 퍼뜨렸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없고 칸트의 이성은 없고 마르크스의 혁명은 없다. 도구가 있을 뿐이다. 본질은 인류가 도달해야할 종착역을 가리키고 도구는 그 머나먼 항해에 타고갈 수단을 가리킨다.

    진리의 답은 종착역이 아니다. 인간의 출발역은 탄생이고 종착역은 죽음이다. 인간이 죽으려고 사는게 아니다. 인간은 삶 그 자체를 완성하려고 한다. 그 항해에 배로 가느냐, 비행기로 가느냐 도구가 중요하다. 칸트의 이성이냐 감성이냐가 그럴듯 하지만 개소리다.

    감성이 예민한 사람이 칸트다. 그가 시계처럼 정확했던 것은 합리적인 이성 때문이 아니라 병적인 강박증 때문이었다. 칸트에게 과연 이성이 있었을까? 이성이 있는 사람이 분별없이 시계짓을 하고 다닌다는 말인가? 칸트는 감성이 지나치게 발달한 강박증 환자다. 

    성질이 지랄맞은 사람이 성과를 낸다. 인간의 본질은 지능이지만 도구는 손발과 이빨과 언어와 표정과 칼라를 보는 눈과 복잡한 감성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얼굴에 털이 없으므로 표정이 있다. 도구의 차이, 매개의 차이, 환경의 차이, 상호작용의 차이가 중요하다. 

    그 주변의 차이를 없애려고 하는 성찰, 진정성, 유기농, 생태놀음이 우리의 적이다. 도구를 버리고 본질로 갈아타라는 압박이다. 언뜻 그럴듯 하지만 룸펜 지식인의 천박한 권력의지다. 애국주의, 민족주의, 정신력타령, 노력타령이 우리의 적이다. 왜 성찰을 말하지? 

    인간의 손에서 도구를 빼앗으려는 것이다. 자본이라는 도구를 손에서 놓게 만들려는 것이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어 제압하고 지식인에게 복종하도록 만들려는 수작이다. 인간이 도구를 손에 쥐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더는 지식인의 주술이 먹히지 않는 거다. 

    과거에 종교인들이 하던 짓을 지금은 좌파 지식인이 하고 있다. 주기도문, 사도신경, 아멘이 성찰, 진정성, 생태주의로 단어만 바꾸었다. 인간을 제압하려는 행동이다. 학자들이 틀렸다. 지능의 발달이 도구를 격발한게 아니라 반대로 도구가 지능을 격발한 것이다. 

    특히 언어가 크다. 언어가 성립하기 전에 표정이 있었고 표정이 성립하기 전에 손짓발짓이 있었고 손짓을 하려면 직립해야 한다. 직립하자 손이 도구가 되고 도구가 입으로 붙은 것이 언어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표정을 흉내낸다. 상대의 감정을 읽어낸다. 

    다리를 다친 절름발이 침팬지가 있었는데 새끼 침팬지들이 일제히 절름발이 침팬지의 걸음새를 흉내내며 따라다니더라는 학자의 보고가 있다. 인간의 조상이 손짓을 흉내내다가 언어가 만들어졌다. 손짓으로 가리키던 것을 입술로 가리킨 것이 언어의 탄생이다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건으로 보고, 환경으로 보고, 관계로 보고, 상호작용으로 보고, 매개로 보고, 시행착오로 보고, 구조로 보고, 조율로 보고, 하모니로 보고, 앙상블로 보고, 조화로 보고, 균형감각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이는 중립이라 네거리에 선다.

    네거리에 자리를 잡으면 도구를 얻은 셈이다. 왼쪽에서 오는 사람은 오른쪽으로 막는다. 북쪽 애들이 쳐내려오면 남쪽 애들을 불러서 막는다. 대응할 방법이 있다. 거기에 균형감각이 있다. 좌파와 우파의 공통점은 인간을 외통수 구석진 곳으로 몰아간다는 점이다. 

    성찰, 진정성, 생태주의로 가든 애국, 민족, 차별주의로 가든 같다. 손에 쥔 도구를 버리게 한다. 인간을 제압하려고 한다. 비열한 권력의지가 숨어있다. 본질을 찾고, 이데아를 찾고, 이성을 찾고, 성찰을 찾고, 진정성을 찾는 사람이 결국 사람탓 하고 사람을 잡는다.

    도구가 없기 때문에 사람을 탓한다. 중국인은 총이 없으므로 맨손무술을 한다. 백인은 총을 쏘는데 의화단은 쿵푸를 한다. 권총이 안 되면 기관총으로 갈기면 된다. 장고형님 나와주시고. 쿵푸가 안 되면? 죽는다. 도구가 없으면 사람탓을 하다가 결국 죽게 된다. 

    좌파의 성찰타령이든 우파의 차별주의든 그게 사람탓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 잡는 세상이다. 왜 도구를 탓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는가?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보는 눈이 없고 듣는 귀가 없고 말하는 혀가 없고 생각하는 두뇌가 없으면 사람 탓 하게 된다.

    본질은 바탕이다. 바탕은 바닥이다. 더 갈 곳이 없다. 인간을 코너로 몰아 지배하는 본능이다. 부족민의 터부이자 무당의 주술이며 사이비의 우상이다. 이 분야에서 가장 심한 것은 자이나교다. 극단적인 불살생, 극단적인 고행을 주장한다. 그야말로 사람 잡는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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